'현실적인' __ : 스포일러 분석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글은 영화 <놉>의 스포일러가 대량 함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미지에 대한 공포감이 전반부 공포의 근원이므로, 절대로 스포일러를 읽고 봐선 안 되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왔다면 바로 시작한다.
<놉>의 핵심 주제는 '동물, 더 나아가 자연은 인간이 대상화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고 상품화해선 안 되는 것이다' 다. 당장 영화의 시작 장면부터가 말을 자극해서 걷어차이는 스태프이고, 영화 내내 동물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무작정 통제하고 상품화하려다 봉변을 당하는 인간들이 끝없이 나온다. 침팬지를 드라마 촬영하는 용도로 쓰다가 고디의 습격에 배우들이 끔찍하게 죽어나가는 장면이 그렇다. 침팬지는 엄청나게 사납고 힘이 센 동물로, 절대로 일반인이 다룰 수 없는 맹수다. 그런 동물을 재미있는 소품 정도로 취급했으니 자업자득이다. 그리고 영화의 최종 보스라고 부를 수 있는 진 재킷 역시 그렇다. 진 재킷에게 잡아먹힌 모든 사람들은 진 재킷을 생각할 수 있는, 우리와는 다른 하나의 생명체로 취급하지 않고 그저 돈을 벌 대상, 구경거리, 진귀한 촬영거리 등으로 우습게 봤다. 주프는 그런 사상의 극단으로, 어릴 때 그저 우연히 고디의 습격에서 살아남고 나서 자신을 동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진 재킷을 길들이려 시도한다. 그 결과야 뻔하지만.
부제의 가려진 부분은 '현실적인 괴수' 다. 이 영화는 명백히 괴수물이다. 진 재킷은 지구 생명체일 가능성도 크다. 외계인이 아니라. 저런 모습만 보고서 외계인으로 단정하는 것 역시 이 영화가 그렇게 비판하는 동물의 대상화다. 단지 특이하게 생겼다고 저게 외계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그리고 진 재킷은, 정말 드물게 그런 편견이 거의 없이 현실적인 동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은 자연과 동물을 우리 입맛대로 상품화하는 시대에 진짜 동물은 이렇다고 보여주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자연, 그리고 동물은 인간의 시각에 맞게 가공되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비추어진다. 예를 들어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들이 지칠 줄 모르고 주인공들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육식동물들은 절대 이렇게 포악하지도 않고, 오히려 매우 신중한 편이다. 적당히 쫓으면 체력을 아끼기 위해 물러나고, 위협적인 상대를 가려서 덤빈다. 사실 거의 모든 매체에서 우리는 입맛대로 자연을 멋대로 가공해서 상품화하고, 그것이 생각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개미를 부지런하다고 표현하거나, 사자를 용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예시다. 더 나아가자면 자연은 뭔가 부드럽고 신비롭다는 편견, 초식동물은 육식동물보다 온순하다는 편견, 식물은 평화롭다는 착각 등 끝이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실제 동물은 절대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인간이 마음대로 재단 가능한 존재도 아니다. 진 재킷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행위에 자극받는 것은 아주 명백한 은유이다. 마음대로 쳐다보고 판단하지 마라.
그래서 진 재킷은, 나름의 습성과 학습능력이 있으며, 영역표시도 하고 인간을 잡아먹긴 하지만 배부르면 피하고 위협당하면 공격하는, 현실적인 짐승의 모습을 보인다. 어느 정도로 현실적이냐면, 이 영화에서 진 재킷의 행동들 중 설명이 안 되는 게 거의 없다. 이 영화에서 진 재킷이 진짜로 전형적인 흉폭한 괴수의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딱 한 번 있는데, 주인공 OJ에게 속아 흥분된 상태에서 온갖 쓰레기를 집어삼킨 후다. 딱 실제 동물이 공격할 법한 상황에서만 공격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일반적인 동물의 다양한 습성을 보여주는 것에 더 가깝다. 크기가 무지막지하게 크고 형태가 이질적이라 그렇지, 영화 속 진 재킷의 행동은 야생동물의 습성과 아주 비슷하다. 이 정도로 괴수의 생태에 자세한 묘사를 들인 괴수물도 드물다. 감독의 의도는 동물을 단순하게 대상화시키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매체에 대한 비판이다. 당연히 그 반대로 진 재킷은 대상화되지 않고 훌륭하게 생물 취급을 받아야 한다. 하나하나 짚어보자.
1. 진 재킷은 말미잘 같은 단구성 생물이다. 섭취와 배설이 같은 구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진 재킷은 먹이를 빨아들여 소화한 후, 남은 금속이나 혈액 등의 배설물은 다시 뱉어낸다. 영화 초반부에 하늘에서 떨어진 열쇠라던지, OJ의 집 위에 피를 토해낸다던지 하는 식이다.
2. 그렇다면 OJ의 집 위에 피를 쏟은 이유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괴수물이라면 그냥 관객에게 무서워 보이려고 그런 거겠지만, 당연히 이 영화에선 이유가 있다. OJ가 말하기를, 진 재킷은 아구아 둘세를 자신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 자연에서 생물들이 흔히 하는 배설물을 사용한 영역 표시다.
3. OJ와 일행의 계략에 빠져 깃발로 위협당하고 철조망을 삼켜버린 후 진 재킷은 몸을 완전히 풀어헤쳐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이 모습은 마치 해파리 같이 여러 촉수가 나풀대는 형태로, 적을 위협하는 동시에 포획하기 알맞은 형태로 몸을 변형시킨 것이다. 실제로 영화 마지막에서 거대 풍선을 촉수로 휘감고 몸을 변형시켜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평소에는 몸을 접어 조개 형태로 사냥하다 너무 크거나 위협적인 (아마도 동족) 적을 만나면 몸을 풀어헤쳐 싸우고 잡아먹는 행동 양식을 추측 가능하다.
4. 영화 내내 이 녀석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바뀐다. 은밀하게 숨어 사냥하던 초반부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실수로 (괴수가 진짜 동물처럼 실수를 하는 것도 특이점이다) 플라스틱 말을 삼키거나 주프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등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는 알다시피 절대 금물이다) 진 재킷을 자극할 만한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고, 진 재킷은 자신의 영역에 표시를 하고 위협적이라 생각하는 인간을 콕 집어서 공격하는 등 더 적대적으로 변한다. 진 재킷이 본격적으로 인간을 습격하기 시작한 이유는 주프가 이 녀석한테 계속 먹이를 주면서 인간->먹이라는 인식을 심어서다. 이유 없이 사람을 습격하는 흔한 괴수가 아니다. 엄연히 하나의 동물로써 자극받아서 공격하는 당연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5. 진 재킷은 자신을 쳐다보는 대상에게 공격성을 띤다. 이것은 상술 했듯이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편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의 은유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습성이기도 하다. 상당수의 육식성 맹수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멀어지는 동물'에게 강력한 공격성을 띤다. 사냥의 본능 말이다. 진 재킷 역시 육식성 생물이니, 비슷한 종류의 사냥 본능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대단하지 않은가? 철학적인 은유로 집어넣은 습성까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니.
즉 이 영화는 단지 동물을 인간의 입맛대로 멋대로 판단해 상품화하다간 큰코다친다는 메시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진짜 '현실적인' 괴수는 이렇다는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단지 괴수물이나 공포영화뿐만 아니라, 이런 복잡한 설정을 좋아하는 사람도 볼 만한 영화다. 당장 위에도 내가 아주 길게 분석하지 않았는가. 진 재킷의 공포가 특별한 이유는, 흔해빠진 영화적 장치로 만들어진 괴물이 아니라 진짜 하늘을 날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현실적인 맹수이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의 통제를 거부하고, 우리의 기준에 맞춰 단순화되고 왜곡된 자연의 모습이 아닌, 진짜 현실의 자연 속 동물의 모습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