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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lee Aug 21. 2023

프로젝트 헤일 메리

영업글입니다


영문판 표지. 책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과학. 기술. 화학물질. 긍정적인 이미지만큼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도 강한 단어들이다. 과학은 이성적이고 정확하며 차가운 학문이다...라고들 많이 생각한다. 특히 각종 광고에서 화학물질, 이라는 단어는 절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감성적인 말을 과학으로 반박하면서 낄낄대는 농담은 이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전형적인 문이과 유머. 혹시 궁금하다면, 혈압 자체는 높아도 바로 죽지는 않지만, 뇌혈관 같은 게 터진다면 뇌압 상승으로 꽤 빨리 죽을 수 있다.


이런, 과학은 대단하면서도 묘하게 냉정하고 감성적이지 않다, 는 이미지는 꽤 오래되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과학에 빠져 사느라 실생활을 내팽개친 라퓨타 사람들을 풍자하니까. 그리고 상당수의 SF물도 장르는 공상과학이면서 핵심 주제에선 과학에 대한 거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잃어버린 즐거움>에서는 로봇 교사가 일상화된 미래에서 진짜 학교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이 나오고, 최근 영화 <정이> 도 장르는 공상과학이지만 핵심 주제는 과학과는 거리가 먼 모성애다. 과학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정작 하는 이야기나 주제 의식은 과학이 아니라 인류애, 사랑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과학은 감동적일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이번에 분석하는 작품인 앤디 위어의 <프로젝트 헤일 메리>는 순수한 과학이 만들어내는 전율과 감동이란 무엇인지 아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사실 작가의 이런 성향은 <마션> 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마 <마션>을 본 사람은 꽤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굉장히 재미있게 봤을 거고,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가 5시간짜리이길 바라고 있을 거다. 원작을 안 읽은 다수의 사람에게 설명하자면, 원작의 절반 정도는 수학적 계산이다.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사고로 화성에 홀로 남겨져 살아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식량, 산소, 전력량 계산이 필수다. 화성 기지 내에서 확보할 수 있는 농지의 면적, 감자의 생장 속도, 하루 전력량, 산소 소비 속도, 방사능 전지가 배출하는 열의 양과 화성 탐사차량의 배터리 양 등등. 주인공이 말하듯이, 소수점 하나 빼먹으면 죽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엄청 재미있다! 시각 매체로는 재미있게 만들기가 어려운 수학 계산을 소설에선 필력으로 극복 가능하다. 소설은 하다못해 등장인물이 잠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일하는 것도 재미있게 쓸 수 있다. 필력만 충분하다면. 그리고 앤디 위어의 쉴 새 없이 농담과 빈정거림이 휘몰아치는 문체는 그 어떤 과학 실험도 재미있게 만든다. 

프로젝트 헤일 메리는 앤디 위어 작가의 세 번째 장편 소설이며, 작가의 장점이 극대화되고 단점은 거의 없어졌다. 이 책은 주인공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우주 한가운데의 우주선에서 시체 두 구와 함께 기억 없이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해 주인공이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된 건지 마션보다 훨씬 재미있어졌다. 분량도 더 길어졌다. 소설의 장점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필력 하나로 과학 실험을 재미있게 묘사하는 솜씨가 일품. 예를 들어 작품 내에서 주인공이 혼자서 중력 등을 재 가며 상황을 파악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영화나 만화가 아닌 소설이라 주인공이 1인극을 찍어도 심리 묘사나 주인공의 추리 과정이 세세히 묘사되고 지루한 부분은 바로 문장 하나로 치울 수 있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예를 들어 작품 내에서 몇 주간 이어지는 과학 실험이 다수 등장하는데, 영화라면 몽타주 기법이라도 써서 빨리빨리 넘겨야 했겠지만 작품 내에선 "몇 주 동안 계속 ~~~를 했다."로 간단히 끝내버린다.


서사 구조도 단순히 계산-실행-문제 해결의 반복이던 마션과 달리 계산-실행-문제 해결의 기본 구조는 지키면서 지구 멸망 등 더 자극적이고 현대적인 요소를 다량 추가했다. 실제로 작품 내에서 굉장히 참신하면서 섬뜩한 지구멸망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설명은 최대한 줄이고 싶은데, 왜냐하면 주인공이 과학자로서 실험을 통해 세계의 미스터리를 하나하나 벗겨 나가는 과정이 이 책의 묘미이기 때문.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같이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없다. 다 어디서 본 익숙한 맛의 조합인데, 이 책의 진짜 매력은 그게 아니다. 인물들이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거해 난해한 상황을 추론, 실험, 그리고 검증을 통해 하나하나 밝혀내는 과정 자체가 이 책의 묘미다. 주인공이 소설 초반에서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하고 혼란스러워하다가 수십 페이지를 넘어가선 이미 실험해서 분석을 끝내고 익숙한 듯 활용하는 모습도 소소한 재미 중 하나. 그러므로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고 싶다면 두 가지 조건이 있다. 1. 고등학생 정도 과학 지식. 적어도 중성미자가 뭔지 알 정도는 돼야 한다. 2. 줄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읽을 것. 독특한 점은 우정과 지구를 구한다는 낭만적인 주제를 가지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인 과학 지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며 지나치게 낭만적인 묘사는 자제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앤디 위어의 작품 세계는 결국 하나로 요약된다. 주인공이, 여러 가지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해 낸다. 모든 상황에서 주인공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약간 짜증을 내거나 당황할지언정 주인공, 더 나아가 모든 등장인물의 행동은 오직 과학적인 분석 하에서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명작 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독자를 전율하게 만드는 필력은 없다. 그러나 감동은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과학적 사고방식과 행동은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해. 인류를 위해. 지구를 위해. 


과학은 목적이 없다. 과학은 그저 진실을 밝혀내는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을 무서워하고, 과학과 감성을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과학 기술이 보편 윤리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활용된 일이 너무나도 많기도 하고. 그러나 과학 기술은 악한 일만큼이나 선한 일에도 활용될 수 있다. 우리는 방사능으로 도시를 파괴했지만 암세포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앤디 위어의 소설은 현실과는 다르다. 모든 이들은 과학을 보편적이고 선한 목표를 위해 사용하며, 그 과정에서 현실적이고 구질구질한 문제 및 갈등은 더 큰 선을 위해 화끈하게 무시된다. 인물들이 마주치는 갈등은 악당도, 사회도 아닌 과학에서 마주칠 수 있는 통제되지 않는 변수들에서 나오고, 해결 방법 역시 오로지 추론과 실험뿐이다. 물론 우리는 현실에서 소설과는 달리 과학과 기술, 정보를 가지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놔두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과학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앤디 위어가 그려내는 이상적인 과학의 모습이 감동적인 게 아닐까. 


여기까지는 영업 글이다. 이다음부터는 읽을 인내심이 없거나 이미 재미있게 읽었는데 왜 재미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스포일러 리뷰다. 


1. 외계의 침공-과학적인 적 

태양 에너지를 먹어치우며 지구를 얼어붙게 만드는 외계 미생물 아스트로파지는 상당히 참신한 외계생물이다. 그리고 그 어떤 외계인보다 무시무시하다. 이 책은 딱히 악당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마지막으로 물리쳐야 하는 대상은 역시 외계 미생물이자 아스트로파지의 천적인 타우메바다. 미생물이 작품의 최종 악당이다! 그런데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작품 내내 아스트로파지와 타우메바는 실로 공포스러운 존재로 취급된다. 왜냐하면 허구한 날 나오는 레이저 총 든 외계인이 아니라, 타협도, 대화도 불가능한 미생물이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않고 싸울 수도 없는 적. 그 크기와는 달리 규모 역시 어지간한 스페이스 오페라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아스트로파지의 생활권은 태양 전체, 금성 전체, 그 사이를 잇는 페트로바선 전체다. 타우메바 역시 진화의 결과로 주인공이 귀중한 연료로 사용하는 아스트로파지를 모조리 잡아먹고 굶어 죽을 정도로 극단적인 습성을 가졌다. 


그리고 오히려 아스트로파지와 타우메바의 이런 특징이 이 소설의 작품성을 극대화시킨다. 대화도 싸움도 통하지 않는 적과 맞서 지구를 지키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과학이다. 과학으로 어떤 생물이든 가지고 있는 약점을 공략하는 것. <터미네이터> 나 <아바타>, <스타쉽 트루퍼스>에 나오는 적들은 과학과는 상관없이 물리적으로 두들겨 패면 되는 적이다. 그러나 앤디 위어는 오직 과학에 의거한 문제 해결만을 다루기 위해, 실험과 검증으로만 상대할 수 있는 단순한 미생물을 적으로 설정한다. 전에 말했듯이, 이 책의 재미는 문제를 해결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을 응용하는 것이다. 처음에 주인공 그레이스가 아스트로파지의 번식 과정을 밝혀내겠다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후반부에선 아스트로파지를 무슨 물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모습은 재독 할수록 감동적이다. 현실에서도 가장 큰 진보, 가장 큰 변화는 실험과 검증, 응용에서 탄생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말이다.  

 

아바타 시리즈의 주요 악의 기업 RDA. 아바타 시리즈는 SF지만, 주인공 제이크가 RDA를 무찌르는 방법은 간단하고 직관적인 물리적 전쟁이다. 

2. 지구 멸망

사실 이 작품의 지구 멸망은 꽤나 낭만적으로 다루어진다. 아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이 지브리 스타일로 낭만적이란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절대 없는 수준으로 잘 나간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지구멸망의 위기가 찾아오자마자 전 세계 정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문제 해결에 나선다. 자기들끼리 핵전쟁을 벌여서 다 죽고 벙커로 튀는 게 아니라. 앞서 설명했듯이. 작품의 주제가 '과학이 나아갈 올바른 길'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읽어보면 이 지구 멸망의 위기가 정말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무작정 인간 최고라는 식으로 막 나가지 않고, 인간이 과학을 어떻게 사용해 지구를 구했는지 아주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책을 끝까지 읽더라도, 너무 감정적이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주인공이 외계인 친구 로키를 구하러 갈 때도 우정이나 인간에 대한 설교는 거의 없다. 대신 주인공은 빛 반사로 로키의 위치를 추적한다.


 지금까지 지구멸망을 다루는 작품이 멸망 후, 아니면 멸망 속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앤디 위어는 과감하게 진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구를 구하기 위해 발에 불이 나게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에너지 생산을 위해 사하라사막의 1/4를 아스트로파지 농장으로 뒤덮고, 핵무기를 징발해 남극 빙하를 터뜨려 지구의 기온을 억지로 올린다든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대서 진짜 이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전 지구적인 임시권한을 부여받은 지구의 지배자 에바 스트라트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독자가 지루해질 법한 관료주의, 외교, 전쟁 같은 요소는 신속하게 치운다. 물론,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이것이 우리가 과학을 써야 할 올바른 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3.  번역

작품의 번역 상태는 괜찮다. 단 몇 가지 오류가 존재한다. 작 중 등장하는 외계인 로키는 광물질 신체를 가진 다리 5개의 거미 형상인데, 이걸 '엉덩이가 큰 거미'라고 번역했다. 원문은 'big-ass spider' 그러니까 '굉장히 큰 거미'가 맞다. 번역가가 관용구를 몰라서 생긴 오류. 그리고 작 중 로키는 주인공과 불완전하게 언어를 번역해서 대화하는데, 그래서 원문을 보면 로키의 대사는 단어들로만 구성되고 그 사이 be 동사나 조사, 접속사가 거의 없다. 이걸 한국어로는 "과학 장비로 살펴봄, 질문?" 같이 최소한의 어미가 있게 번역했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면 "과학. 장비. 관찰. 질문?" 이렇게 써야 한다. 더 아쉬운 건 다 이렇게 번역하는 바람에 결말부에서 로키와 그레이스가 서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해 로키가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는 부분의 감동이 줄어든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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