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Dongsunlee
Aug 22. 2023
어머니는 극렬한 눈빛으로 나를 오랫동안 주시 하시더니 뭐라고 속삭이는데 너무 작은 소리라 들을 수 없어 머리 숙여 입 가까이 귀를 갖다 대니 다시 한번 속삭이셨다.
“ 어서 가 “
그야말로 폐 속의 공기가 한숨으로 겨우 끄집어내어 입술에 부딪치며 나는 소리였다.
듣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 나를 감싸, 이어지는 나의 행동에 오류가 난 듯 멈칫하다가 어머니의 눈을 계속 주시하며 파리해져 모아쥔 두 손을 감싸 잡았다.
따스한 온기와 함께 미세한 움츠림이 있는 듯하다 이내 풀고 감싸 잡은 나의 두 손에 맡기고는 눈을 감으신다.
" 엄마 나 이제 교회에 가야 해 "
이 소리에 다시 눈을 뜨시시더니 단호하며 내려놓는 듯한 얼굴로
" 어서 가 " 하신다.
나를 배려해 힘든 한숨을 다시 내쉬신 것이다.
하지만 무언지 모르는 힘이 나의 발걸음을 잡는듯해 주저하고 있을 때
그를 본 여동생이 “ 오빠 이제 가도 돼요 예배에 늦겠어요, 엄마랑 인사하시고, 엄마 내일 또 올게 “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누워있는 어머니를 두 팔로 껴안은 후 뒤돌아서 그 방을 나왔다.
이것이 어머니와 나와의 생의 마지막 만남의 순간이었다.
방을 나오면서 직감으로 느꼈다.
어머니가 마지막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나에게 마지막 배웅을 해주셨구나.
국민학교시절 학교에 가려고 문을 나서면 엄마가 가방과 옷매무새를 챙겨주시고는 문 앞에 서서 내가 골목 끝에 다다를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다가 골목을 벗어날 즈음 뒤돌아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 어서 가 “ 하셨던 어머니.
대학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미국에 있는 색시에게 장가간다 하여 공항에 배웅 나온 가족들.
터미널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뒤돌아서서 손을 흔드는데 닫히는 자동문 사이로 어머니가 손수건을 접어 눈물을 훔치시다가 손을 들어 허공을 밀듯 흔들며 “ 어서 가 “ 하신다.
“ 어서 가 “ 는 어머니가 우리들을 배웅할 때, 이제는 가서 너희의 일을 하라는 뜻이 내포된 인사이다.
지체하지 말고 가서 너희에게 가르치고 베푼 모든 것들을 너희도 행하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부탁과 권고가 느껴진다.
사택에는 3 가구가 사는데 아이들만 7~8이 되었다.
그래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얼굴 붉히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하루는 나랑 동갑인 순희와 놀다가 싸움이 벌어졌는데 울고불고 시끄러워지니 두 집 엄마는 물론 옆집 큰오빠까지 나와 사리를 판단한다고 싸울 기세로 우는 우리 둘에게 무슨 일이냐고 재촉한다.
그때 엄마는 아무 말없이 나의 팔을 끌어 잡아당기더니 나의 궁둥이를 손바닥으로 몇 대 때리고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억울하고 분해서 더 큰소리를 지르며
“ 왜 나만 갖고 그러는 거야 “ 하며 계속 울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울분이 가라앉으니 엄마가 미숫가루를 타서 주며 “ 동선아! 지는 게 이기는 거야 “ 하신다.
그러고 있자니 문밖에서 “ 동선엄마 “ 하고 순희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있어 엄마가 나가서 한참 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환한 얼굴로 들어오셨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조용하시고 어찌 보면 새침하다고 할 정도로 대인관계성이 활발치 않으시다.
특히 험담을 원치 않으셔서 같은 연배 부인들과 친구가 많지 않으시다.
또한 시댁 올케와 사촌 올케까지 다섯이나 되었는 데 있을 법한 험담을 듣지 못했다.
올케 셋이 우리와 함께 살며 대학을 다녀서 더욱 그러하다.
아침새벽에 일어나 없는 반찬 도시락을 우리 것은 물론 고모것까지 6 ~7개를 싸야 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의 입에서 신세한탄이나 남을 비방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엄마 마음을 아는 큰 누나가 상황들을 대변해주곤 해서 알게 됐다.
작은 체구에 얌전하게 고우시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으시고 다하셨다.
구멍가게, 꽃집, 미장원 아버지가 박사학위를 위해 일본 유학 중이라 이를 보태며 가정을 꾸리고자 온 힘을 다하신 것이다.
교수시절 연말연시가 되면 특히 이 교수님 댁에 세배드리러 오면 먹을 것이 많다는 소문이 나서 매년초마다 비상체제로 들어서곤 했다.
이 모두를 어머니가 담당하신 것이다.
마치 우아한 백조의 자태 밑에 쉴 새 없이 헤엄질하는 오리발처럼.
우리 다섯 형제 모두가 결혼과 동시에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됐다.
65세에 정년퇴직을 하신 지 2년 만에 아버님을 보내시고 101세까지 사신 시어머님을 봉양하시다가 캐나다 막내딸네와 함께 지냈는데 약간의 치매끼와 거동이 어려워지니 92세의 년로의 어머니를 모시는데 한계에 다다라 토론토 주재 한인 양로병원으로 모시계됐다.
여동생이 어머니를 양로병원으로 모시기 전날 어머니의 반응을 전화를 통해 듣게 됐다.
짐을 싸고 어머니 옷을 챙기려 하니 눈치를 채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셔서 저녁 내내 눈 한번 안 맞추고 돌아누우셔서 아무 말도 없이 긴긴밤을 지새셨다 한다.
70 평생을 지아비와 시부모, 그리고 다섯 자녀를 위해 온 힘을 다 쓰셨는데 이제 와서 내침을 당하는 것 같아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분노로 표출되었고 또한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는 미지의 새로운 환경이 두려움으로 다가왔으리라 추측해 본다.
그 후로도 여동생이 주일마다 찾아뵈면 한참 동안 얼굴을 피하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끝까지 인내하셨다.
미국에서 둘째 아들이 온다 하여 기다리고 기다려 만난 몇 시간의 만남.
만나자마자 또 이렇게 떠난다 하니 붙잡지도, 섭섭하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 어서 가 “ 하며 묵언의 메세지를 보내신다.
너는 " 어서 가 " 네 주위 사람을 사랑하되 겉치레로 사랑한다 하지 말고 너의 마음과 희생을 지불하기 바란다.
너는 " 어서 가 " 인내하는 사람을 보면 말로만 칭찬하지 말고 그 사람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힘써라.
너는 " 어서 가 " 삶 속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살펴 후회 없는 삶을 살기 바란다.
너는 " 어서 가 " 너의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의식으로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기 바란다.
이제 당신이 떠나는 이 마당에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인사가 내 마음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