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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sunlee Nov 28. 2023

고향집

나를 포근하게 감싸는 나의 고향 남영동

나는 종종 잠 못 이루며 뒤척일 때면 어렸을 적 엄마 무릎을 베고 낮잠 자던 그때를 불러내어 잠을 청하곤 한다.

엄마는 옆집 순희 엄마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릎에 누워 잠을 청하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재운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물러가고 늦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뺨의 솜털을 스치며 지나갈 때   골목 저편에서  “고물 삽니다. 채권 삽니다.”   외치는 소리가 아련하게  나른한 자장가 되어 들려올 때면 나는 어느새 잠에 빠지곤 했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과  나를 포근하게 감싸는 나의 고향 남영동이다.

  좁은 골목을 앞마당 삼아 다닥다닥 붙어있고 허름한 미닫이 문을 열면 모든 세간살이가 훤히 다 들여다 보이고 벽하나를 두고 앞집 옆집으로 살아 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정이 흐르며  소소한 것들이 오가는 어린 시절  추억이 자라나던 곳이다.

    방과후면 책가방을 내던지고는 골목으로 달려 나가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둘 골목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불러 모은 아이들은  어떤 놀이를 할까   정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망치기 , 땅따먹기 다방구등 얼굴이 벌게지고 땀이 흥건해지도록 좁은 골목을 누비고 뛰어다니며 놀다 보면 어느덧  날이 저물어 저녁 먹으라고 엄마들이 부르러 나올 때까지  친구들과  놀던 곳이다.  

추운 겨울이 되면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손이 부릅트는 것도 마다하며 구슬치기, 딱지치기로 저마다 우열을 가리던 곳이기도 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웃들,  순희네, 우만이 형네, 원희네, 돼지네, 혜원이네,  성호네, 때로는 작은 일로 얼굴 붉히며 싸운 적도 있지만 날이 밝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내는 사촌과 같은 이웃들이 있는 곳이다.

우리 집은 골목 맨 끝집으로 일본식 이층 집이다.   미닫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컴컴한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전에는 사택 3세대가 이곳을 세면장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직사각형의 공동세면대가 있고 그 한편으로 부엌세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벽 밑으로 부뚜막과 아궁이기가 있어 전형적인 일본식에서 한국식으로 개량한 흔적이 확연하다.

  디딤돌로 올라서면 좁은 복도가 있는데 격자 형태의 유리창이 달린 미닫이 문이 양쪽으로 있어 그나마 낮이면 자연광이 깃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겨울이 되면 외풍이 쎄 집안에서도 두꺼운 털옷을 입어야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복도 왼쪽의 유리창이 달린 미닫이 문을 열면 안방인데  한국식 온돌로 개조해 다른 방과 달리 누런 장판에 잘 구워진 빵처럼 검게 그을린 아랫목이 있어 추운 겨울이 되면 시린발을 녹이고자 아랫목 이불밑으로 모여든다.  
 때로는 늦은 귀가로 저녁이 늦어진 아버지의 밥사발이 수건으로 돌돌 말아 아랫목에 뎃쳐있어 그것을 가슴에 껴안으면  따끈따끈한 온기가 온몸에 퍼져 그나마 외풍이 센 안방에서 보온기구 역할을 하곤 했다.

  이불장 역할을 하는 반 평가량의 오시래가 2층으로 되어있는데 문을 닫으면 조용하고 아늑해 때로는 그곳에서 혼자 놀다 잠이 들기도 해 엄마가 밥 먹으라고 오랫동안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이불을 햇빛에 논다고 다 빼어냈는데 저쪽 구석에 핑크색의 물거리는 것들이 있어 자세히 보니 갓 태어난 생쥐 대여섯 마리가 있음을 보고 엄마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일이 기억난다.    

  거실은 지하실이 밑에 있어 마루가 깔려 있고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 겨울이면 냉골이라며 머물기를 주저하던 방이다. 그곳은 유리장 책장이 있어 아버지가 보던 책으로 가득했고 그 시절 유행하던 엔싸이크로 피디아 사전 한 질이 있어 가끔 그림책 보듯 열어 보곤 했다.

  복도를  지나면 가파른 목재층계가  있는데 그곳은 나의 놀이터였다.

오를 때는 2칸씩 뛰어오르고 내려갈 때는 그냥 다리를 뻤치고 미끄럼 타듯 내려와 누보다도 빠르다고 자랑삼던 곳이기도 하다.

이층에 오르면 직사각형의 격자로 다다미가 깔린 내 방과 네 짝짜리 미닫이문을 가운데 두고 형 방이 있었다.   

내방은 넓은 유리창이 있고 높은 건물들이 별로 없어 동네는 물론 저 멀리 남산까지 훤히 보였고 특히 나라 경축일이 되어 남산에서 불꽃놀이를 하면 일등석 같은 호사도 누릴 수 있었다.


 날이 저물 즈음 창틀에 기대어 앉아 남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용산 미군부대의 국기 하강식 나팔소리를 들으며 저무는 해를 보내기도 한다.
땅거미 가져 어둑어둑해진 남산밑 해방촌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면 반짝이는 불빛과 함께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교회의 찬송가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래층 복도를 가운데 두고 한쪽은 변소 다른 한쪽은  목욕탕이 있는데 무쇠로 만든 큰 독 같이 생긴 목욕조가 있어 그 시절에도 목욕탕에 따로 갈 필요가 없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한 사건이 있다.    

 미국에서 오신 손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신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대접할 식사를 위해 시장을 보고 분주하게 만두를 빚고 온 식구가 청소를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모두가 어떤 미국 사람이 오나 궁금해하며 다음날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오신 미국 손님은 키가 크고 바닥에 앉는 게 습관이 되지 않아  밥상을 펼쳤는데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고 뻐정 하게 다리를 뻗고 앉으셔서 그 건너편에는 아무도 앉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정성스레 빚은 만두를 먹은 후 아버지가 집구경을 시키신다고 부엌으로 나가 부뚜막과 아궁이를 보여주며 한국인 지혜의 산물 온돌에 대해 자랑하듯  설명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텔레비전도 오락도 흔치 않던 그 시절 제일 기다려지던 흥미로운 시간은 다름 아닌 가정예배 시간이었다.
 안방에 모여 앉아  아버지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성경 이야기와 그와 더불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전병 과자.   평상시 별로 우스갯 소리나 농담은 안 하시지만 성경 이야기를 각색을 해서  들려주시는데 너무도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듣고 있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서는  다음시간에..... 하시며  다음 예배를 기다리게 하는 재치도 있으셨다.

겨울저녁  일찍 들어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데 아버지와 엄마가 어디를 다녀오시어 방문을 여시는데 입으셨던 코트에  한기를 느낄 정도로  아직 잠은 들어있지는 않지만  일어나면 예배 보자 할 것 같아 계속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는데 부스럭 과자봉지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 동선이는 자는구나 깨우지 말아라 우리끼리 이 과자를 먹어야겠다. “ 하시는 게 아닌가 그 말씀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눈을 떴더니 식구 모두가 바로 위에서 웃으며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머쓱한 채로 일어나 예배드리고 과자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기억나는 예배시간이 있다.   

그날은 소낙비가 퍼붓듯 쏟아지고  천둥과 우뢰가 우라쾅쾅 쳐 전기불도 나가 촛불을 켜고 예배를 보는데  아버지가 선택한 찬송가는 ' 빈 들에 마른풀같이 '를 불렀다.  

 가뭄과 비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움직이는 촛불로 인해 벽에 비친 그림자가 흔들리는 가운데  빗소리를 들으며 찬송을 부르니 극적으로 가사가 전달되었는지  마음에 촉촉한 단비를 경험했던 시간이었다.   

 이후로 이 찬송을 부르면 그날 그 시간 그  장소가 떠오르곤 했다.

앞마당은 좁지만 작은 꽃밭이 있어 나팔꽃, 맨드라미, 봉숭아꽃, 늦은 여름이 되면 여주도 주렁주렁 열리기도 하는 정감 있는 정원이었다.    빨간 봉숭아 꽃이 피면 할아버지 약방에서 백반을 가져다 누나와 동숙이가 손톱에 물들인다며   봉숭아 꽃잎을  손가락마다  실로 꽁꽁 싸매고 다섯 손가락을 뻗쳐 들고 물이 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겹게 남아있다.





저녁을 마치고 아버지가 산책을 나가자고 하신다.  그러면 온 식구가 아버지를 따라나서는데 좁은 골목을 벗어나 전차와 자동차가 다니는 큰 행길로  나와 가로수를 따라 걷기 시작하면  연초록 페인트로 덧칠한 중국집이 나오고 ,  우만형의 누나가 밤늦게 까지 일하는  약국을 지나간다.
  하루 일과를 마쳐 육중한 셨다로 문은 잠갔지만 사무실은 환히 불을 켜놓은  은행을  지나면  갑자기 환한 불빛으로 영화간판을 비추어 지나가는 행인을 눈길을 사로잡는 성남극장이 나타난다.   영화관 입구 옆 유리벽장에는  영화장면들을 찍은 흑백사진들이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붙어있어 그것을 보며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기도 한다.  때로는 명화가 상영되면 온 식구가 함께 관람도 하는 나의 훼이보릿 장소이다.

파출소를 보며 오른쪽 길로 돌아 나오면  김일 레슬링을 티브이로 볼 수 있는  만화방이 보이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내가 다니던 용산중앙교회를 지나온다  이 코스가 우리 가족 공식 산책로이다.  

때로는 엄마랑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흠잉으로 찬송가를 부르신다. 그러면  우리도 따라 부르곤 했다.   이 산책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에 평안이 깃든다.

남영동 시절 공무원 과장의 월급을 생각해 본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엄마는 그야말로 빠듯한 살림을 꾸리셔야만 했다.   아버지가 대가족의 장남이라  지속적으로  군식구가 끊임없이 있었다.   고모님들, 외사촌형, 도움이 언니, 과외선생, 등 수많은 친척들이 우리와 함께 이 남영동 집에서  함께 지내며 살았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 매일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대여섯 개씩 쌀 때가 너무 힘들었다고  

그동안  그들이 남이나 불편한 존재라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세월이 지난 후 엄마가 넋두리 하듯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무런 내색 없이 엄마는 우리 가족과 주위 관계를 꾸준히 지켜오셨다.   

   우리가 걱정 없이 놀고 즐길 그때  우리가 모를 부모님의 노고와 아픔이 있었던 것을 … 그때는 아버지가 지질연구소를 퇴직하시고  연세대학교 교수로 이직을 하셨고  이어 일본으로 박사과정을  하시는 동안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영등포 할아버지 건물에 자리를 얻어 조그마한 잡화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갈 때이다.   그래서 우리 또한 영등포에서 지내게 됐고 남영동집은 돈도 필요하고 해서 아래층만 세를 주고 있던 시절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어머니가 집에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남영동에서 지내신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아마도 가족 간에  조그마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남영동집으로 엄마를 보러 갔는데 며칠이 지난 그때인데도 불구하고 엄마의 얼굴이 조금 전까지도  울으셨던 얼굴처럼 눈이 퉁퉁 부어 있으셨다.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를 맞아주시며  "내가 우리 집인데 우리 마음대로 지나가지도 못해 " 하시며 세 준사람의 야박한 처사에 분노하고 계신 것이다.
어머니는 홀로  그 이층 다다미 방에서 눈물로써 아픔을 견디며   힘든 시간들을  보내는 피난처로 오신 것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미국에서 소식을 들었는데 집은 헐리고 터는 주차장으로 바뀌었다고 그 후 고국방문 시  다시 찾아갔는데 아직 골목의 형태는 그대로인데  예전의 주택가는 사라지고 식당과 고층건물로 바뀌어 이곳이 내가 뛰놀던 곳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마음의 섭섭함과 허무함이 있어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어른이 되어 골목을  걸어가니 비좁고 짧아  어떻게 여기서 백 미터 달리기 하듯 뛰었나 싶을 정도였다.    

많은 기대를 갖고 다시 찾은 방문이라서 그랬는지 모든 게 변했고 모든 게 낯설었다.

지금 글을 쓰며 생각해 본다.    고향은 집도 아니요 동네도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하지 않다.

그때 그곳에서 행한 마음과 사랑만이 남아있다.


    지금 그곳에는 남영동집은 없지만 아직 내 가슴,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생생한 형태로 , 모습으로 , 소리로 나를 반겨주곤 한다.   


 우리가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사랑의 경험이 있어야 고향을 느끼게 하고 고향의 추억이 간직되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고향을 맛볼 수없다.


왜냐하면 고향은 가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고향은 아득히 먼 기억 속에서도 사랑했던 자리에서  피어오른다.
따스한 햇살을 머금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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