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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드림 Oct 30. 2023

망할 것들이 스물스물 떠오르는 망할 기억력

#2. 망할 것들이 스물스물 떠오르는 망할 기억력



그러니까 나에게 기억이란 그런것이다. 


몇년이 지나도 특정 이슈의 날짜와 시간을 어렴풋이 때려맞출 수 있는 그런 것. 


그 날,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의 루트는 어떠했는지를 모조리 상기하고 있는 그런 것. 기억하고 싶은 날의 순간 순간이 사진처럼 찰칵 찰칵 찍혀서 백퍼센트 정확하진 않아도 거의 비슷하게는 뇌리에 남아있는 그런 것. 장소와 계절의 냄새를 맡으면 의도치 않아도 그 어느 날의 기억이 새록이 떠오르며 가끔 혼자 웃다가 또 가끔 혼자 울게되는 그런 것. 또한 무서우리만치 정확하기도 해서 상대방의 소름을 돋게 하는 그런 것. 


이를테면... 

19년도 6월 20일 정도, 12시쯤 출발하는 아시아나 a380 비행기를 타고 LA로 향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당시 시간적 여유가 있던 나는 친구들 보다 먼저 앞선 비행기를 타고 LA로 날아갔다. 함께한 절친들과 나중에 이를 두고 18년도인지 19년도인지 가볍게 언쟁하다가 체크인 어플을 켜고 19년도와 비행기 날짜, 시간까지 얼추 맞추고 나니 아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NN월 NN일, NN시에 우리 거기서 만났잖아. 그날 어느 식당에서 우리 이런 얘기 했었잖아."

"세상에 그날 우리 이런 옷도 입고 있었다!"


또 내 기억력이라는 것은 무섭게도 내게 유의미한 사건과 사고들을 어느 날 갑자기 모조리 쭉 소환한다. 1N년 전, 내가 맡았던 첫 한국영화 개봉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경쟁작까지 술술 읊어댄다던지 내가 맡은 영화의 큰 행사가 곂쳐서 사수이자 a.k.a 언니, 오빠인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을 못한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던지 말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기억이란 그런것이다. 






하물며 전남친들과의 기억은 어떻겠나.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고스란히 그때의 계절이 돌아오면, 이 날에는 뭘 하며 시간을 함께 보냈고, N년전 어느 날에는 어떤 대화를 했으며, 무엇을 먹었으며, 어디를 갔었는지 사진처럼 저장된 그 망할 기억들이 IPTV 다시 보기 하듯 플레이된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망할 기억력. 정말 사람 피곤하고 피말리게 하는 그런 기억력 말이다. 






헤어지자는 말을 2주의 공백을 두고 곧바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아프다고 죽과 약을 사들고 온 그 사람에게 나는 그저 감기 몸살이다 하며 괜찮은 척을 또 했다. 할 말을 잔뜩 싸가지고 온 사람은 다 죽어가는 나를 보며 차마 그 한마디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으니 말하라는 말도 나오질 않았었다. 


하필 또 촉은 기가막히게 좋아서... 오늘이 아니라면 너는 전화나 카톡으로 그 힘든 이야기를 해야하겠지 싶었다. 그런 이별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나를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그의 입을 열게 했다. 결국에는. 


서로 상처받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오피스텔 쇼파에 앉아서 그가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은 했어서 마음이 무너지진 않으리라 싶었는데 또 현실은 달랐다. 뭐 처음하는 이별도 아닌데 그날의 나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속으로는 무너지고 있었다. 티내지 말아야지. 아무렇지 않은척 해야지 했어도 나는 실전에 부딪히면 꼭 같은 실수를 되풀이 했다. 


'정신차리라고!'


내가 나에게 수 없이 소리 쳤는데, 사실 그런 외침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고 그를 회유하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한 남자는 돌아올 줄을 몰랐다. 일단 '다시 생각하자'며 어르고 달래서 집으로 보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또 그 밤을 멍하게 앉아서 보냈다. 나만 빼고 모두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내 시간만 멈춘 것처럼. 나는 돌덩이처럼 굳었다. 화석이 된 몸을 들끓는 마음이 이길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망가졌을까, 이렇게 정말 끝인건가 싶은 시간들이 흘렀다. 


'다음 주 토요일에 만나. 정리하자.'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그런 말들 뿐이었다. 회피하고 동굴에 들어간 남자가 기어나와서 고작 한다는 말이 헤어지자는 말인데도 한 줄의 화도 못내고 그냥 받아들여줘야 하는 미약하고 나약한 그런 존재가 나였다. 2주의 시간 동안 유튜브로 본 연애학은 실전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뇌는 정지했고 몸도 화석이 됐고 나는 거지 같은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망할 기억력은 그가 우리집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새차를 뽑고 그가 메뉴얼을 정독하며 이 기능, 저 기능을 알려주었을 때, 집에 보내는게 아쉬워서 차에 앉아 함께 라디오를 들었을 때, 헤어지면서 내가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주저리 주저리 마지막 말을 내뱉었을 때의 날들과 장소들을 사진처럼 품고 있는 거지같은 것이다. 처음 함께 밥을 먹은 곳, 나를 데리러 왔던 그날의 온도와 그가 입고 있던 옷과 내가 매고 있던 가방과 함께 걸었던 거리들이 타임코드가 찍힌 영상의 가편본처럼 내내 플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제발 좀 떨치라고 잊으라고 해도 망할 기억력은 꼭 그렇게 나를 옭아맸다. 억지로 나쁜 것만 기억하려고 해도 뇌리를 비집고 짜잔 하고 등장하는 추억들은 내 기억인데도 어찌할바를 모르겠는 그런 것이었다. 지 팔자 지가 꼰다는 말이 있지 않나. 어디에 일기처럼 써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그와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스스로 자학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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