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둘 다 독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주중에는 몰라도 주말에는 의식하지 않으면 마치 독일이 아닌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가볍게 외식하거나, 집에서 밥해먹고, 청소하고, 쉬다보면 여기가 독일인지 한국인지 의식할 만한 지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한번씩 '지극히 독일스러운 주말'을 보내야 할 기회가 오는데, 그게 바로 지난주였다.
우리나라에도 기업에 따라 정기 체육대회나 운동행사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독일이야말로 운동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다. 일상이 심심하고 유흥거리가 적은데다 병원도 가기 쉽지 않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때부터 운동을 죽기살기로 하는 경우가 많고(물론 체력단련이나 취미 목적도 있음), 이게 취업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규모가 큰 독일 회사에는 대부분 Betriebssportgemeinschaft(회사스포츠클럽, 줄여서 BSG)가 있는데, 우리 남편도 재직중인 회사 농구단에 소속되어 있다. 이 농구단은 회사 직원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매주 한 번씩 퇴근 후 함께 소규모 경기나 훈련을 한다. 꾸준히 나오는 고정멤버는 5-10명 남짓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재미로 취미로 하다가 보통 1년에 1-2회정도 꽤 큰 경기를 치른다.
지난 주말에 바로 그런 경기가 열렸다. 남편 회사를 비롯해서 같은 지역 소재 3개의 다른 회사(같은 산업군)에 대항하는, 나름 규모가 있는 경기였다.
체육관에 모이는 시각은 10시라고 고지했지만 막상 시간 맞춰 온 사람은 절반정도 밖에 안 됐다. 또한 여자친구, 남자친구, 아이들, 심지어 부모님과 함께 온 직원도 있었다. 이처럼 시간을 안지키고 가족들과 회사 행사에 함께 참여하는 모습이야말로 '지극히 독일스러운' 모습이다. 독일을 잘 아시는 분들은 동의하겠지만 미팅과 같이 시간이 매우 중요한 게 아니라면 독일인들은 그다지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일부러 그렇다기 보다 '굳이 내가 참여하지도 않는데 일찍 갈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경기 개회사를 누가하든 모든 사람이 들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개회식에 오지 않았다고 누구도 강요하거나 눈치를 주는 일도 없다.
운동경기 같은 행사에 가족을 데려오는 것 또한 매우 독일스러운 모습이다. 독일의 회사 행사는 가족/지인들을 데려와도 되는 행사와 안되는 행사로 나눠지며, 행사를 기획할 때 이를 명백하게 고지한다. 특히나 주말은 기본적으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기 때문에, 회사 행사를 주말에 한다면 십중팔구 가족이 가도 되는 행사일 확률이 매우 높다.
행사장에서 만난 남편 동료의 가족들은 매우 편한 차림과 모습이었다. 서로 농담을 주고 받고, 간식을 나눠먹고, 경기가 열리는 장소 옆에서 아이들이 공을 던지고 놀아도 제지하지 않았다. 남편 팀의 선수중에는 심지어 어느 직원의 딸도 있었다(남녀 혼성 팀이다). 여성 선수가 참여하는 건 이해하는데, 직원도 아닌 자녀가 참여해도 되냐고 묻자, 어차피 운동경기이고 편한 행사이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한다. 행사 주최 직원 2-3명이 먹거리를 준비했는데 달랑 물, 바나나, 브레첼 뿐이었다. 그또한 멋지게 어디 올려놓고 진열해 놓은 게 아니라, 알아서 가져다 먹으라고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아서 한쪽 구석에 놓았다. 이토록 투박하고 멋 없을수가. 박스 옆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투명 쓰레기 봉투가 민망하지 않은 구색이었다.
행사 어디에도 힘을 줬다거나, 맘먹고 예산을 들였다거나, 타 기업 팀이 작정하고 이기려고 덤비는 것도 없었고, 심지어 가족 중에 외적으로 꾸미고 온 사람조차 단 한 명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 아내 혹은 남편의 상사가 있을수도 있고, 처음보는 동료와 그 가족들까지 마주칠 수 있는 자리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저 다들 편하게 입고와서 편하게 경기를 보며 스몰톡을 나눴다. 그리고 가족의 경기가 끝나자마자 다른 가족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집에 가버렸다. 행사에 가기 전에 내심 심리적으로 신경을 썼던 나역시 막상 행사장에서는 경기에만 집중하고 밝은 분위기를 즐기다 온 것 같아서 맘이 편했다.
그렇다고 독일사람들이 모두 타인을 신경 안쓰고, 쿨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도 사람사는 곳인지라 서로를 평가하고 뒷말도 많이 (생각보다 더 많이) 오가는 곳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편한 성격의 회사 행사에서 만큼은 그런 것들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경기에 직접 참여한 남편 역시, 플레이중 다른 선수의 직급이나 위치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렇게 계급을 허물어뜨리고 친목을 다질 수 있는게 스포츠의 목적이자 매력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회사의 스포츠클럽은 꾸준히 독려하고 참여할만 한 프로그램이다. 독일+스포츠+주말+가족/친구+자율참여. 지극히 독일스러웠던 주말, 오랜만에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