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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당근 빌런은 어떨까

by 가을밤

한국에서 '중고거래'라고 하면 과거에는 중고나라, 현재는 당근을 많이들 떠올리신다.


독일에도 당근과 같은 플랫폼이 있으며 이름은 Kleinanzeigen(클라인안짜이겐: 작은광고)다. 사실 클라인안짜이겐의 역사는 한국의 당근마켓보다 더 오래됐다. 한국 당근이 2015년에 생긴 반면, 독일 당근은 2009년 이베이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니, 약 6년이나 먼저 생겼다. 처음에는 'ebay Kleinanzeigen(이베이 클라인안짜이겐)' 이란 이름을 쓰다가, Adevinta라는 회사로 넘어가며 이름에서 이베이가 사라졌다.


나는 독일 당근을 2014년에 처음 시작했고, 지금까지 약 500개의 물건을 팔았다. 독일 당근에는 온도와 같은 개념인 판매자 평가가 있는데, 모든 부분에서 최고등급인 TOP을 유지하고 있으니, 구매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나름 좋은 판매자로 활동중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중고거래에 등장하는 물건들 역시 한국 당근과 마찬가지로 종류를 초월한다. 남의 자전거에서 뜯어온 안장부터 집, 알바, 유기견 보호소, 그리고 평범한 물건인 옷, 핸드폰 등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다. 우리도 실제로 독일당근을 매우 잘 이용하고 있으며 거기서 찾은 업체를 통해 3번이나 이사를 했다(집도 구해봤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독일당근을 괴롭게 하는 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빌런'들이다. 그리고 이 빌런의 종류는 독자분들의 상상 그 이상이기도 하다. 아래 적은 에피소드는 전부 실제 내가 겪은 경험이며, 상대방의 국적에 대한 어떠한 편견이나 차별의 의도도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 엄마아빠가족친척 팔기

5유로짜리 드라이기를 사러 온 아랍인 구매자가 있었다. 분명 구매 전 5유로로 합의를 봤는데, 갑자기 2유로에 달라는 게 아닌가. 그는 부모님과 온갖 친척들 이름까지 들먹이며 할인을 요구했다. 나는 가격에 대해 현장에서 다른 소리를 하는 구매자에게 팔지 않는다. 여러번 경험이 쌓이다보니 그렇게 하는 게 가장 깔끔하다는 걸 알았다. 안팔겠다고하자, 그는 마지못해 5유로짜리 지폐를 던지고 갔다.


# 동전테러

12유로에 전기 발마사지기를 판매한 적이 있다. 구매자는 인도인이었다. 직거래 전 네고에 실패한 그는 뿔이 났는지 12유로를 모두 센트로 가져왔다. 우리나라로 치면 20000원을 모두 10원짜리로 가져온 격이다. 동전을 두 손에 한움큼 받은 내가 당황하는 사이, 그는 가버렸다. 집에와서 동전을 세보니 12유로가 되지 않았다.


# 내 시간은 금, 니 시간은 똥

이건 정말 자주 마주치는 유형인데, 분명 몇시까지 온다고 해놓고 나타나지 않는 구매자들이다. 심지어 7시'쯤' 과 같이 애매한 시간을 던져놓고 어디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사람 발을 묶어버린다. 물건 깨끗하게 닦아서 가방에 넣어서 추운날 하염없이 밖에서 기다린 게 한두번이 아니다. 자기 시간만 금이고 상대방 시간은 똥으로 아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경험하고 난 이후로 나는 상대방이 "도착했다"라는 문자를 보내기 전까지 나가지 않게 되었다.


# 다짜고짜 도둑취급

거의 사용하지 않은 중형 캐리어를 한화 20000원도 안되는 가격에 판 적이 있다. 구매하겠다고 온 사람은 50대쯤으로 보이는 독일 여성이었고, 남편과 번쩍거리는 벤츠 오픈카를 타고 왔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집주소를 안알려줘서 물건 훔쳐다 파는 사람인줄 알았잖아요. 호호호호." 나는 어이가 없어서 벙쪘다. 우리집이 안쪽이라 못찾는 구매자가 많고 안전상의 이유로 대로변에서 거래하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다니.


# 고장난거라도 팔면 끝

유학시절 나는 가구부터 가전, 식기에 이르기까지 중고물품을 굉장히 많이 썼다. 그 중 한 번은 독일인에게 세탁기를 구매했는데 멀쩡해보였던 세탁기가 집에 가져와서 보니 고장난 게 아닌가. 판매자에게 고장난 걸 팔면 어떡하냐고 하니, "그걸 모르고 산 니가 바보"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 이미 길가에 내놓은 세탁기를 어떻게 눈으로 보고 이상 없다는 걸 알 수 있을까?


# 다짜고짜 네고

이건 한국에서도 자주 보이는 유형인데, 밑도 끝도 없이 말도 안되는 금액을 부르는 사람들이다. 특히 '애플 제품'을 판매할 때 정말 많이 나타난다. 분명히 설명란에 네고불가라고 써놨지만 그들은 글을 읽을 마음이 없는 것 같다. 그 흔한 Hallo조차 없이 다짜고짜 50eur?? 이런식의 메시지는 오만 정을 떨어지게 만든다.


# 부탁하지 않은 충고

이건 빌런이라기보다 이상한(?) 사람들인데, 어떤 물건을 올리면 "그걸 왜 파냐"고 굳이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판매 가치가 없는 물건이다, 온라인에서 얼마인 거 알고 파는거냐 등 별의 별 소리를 다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백발백중 물건을 구매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 사돈에 팔촌까지 다 데려와

중고 핸드폰을 거래했을 때의 일이다. 구매자는 중동계였는데, 300유로짜리 핸드폰 보러 오면서 남편, 언니, 사돈에 팔촌까지 자동차가 꽉 차게 자기 가족들을 다 데려왔다. 온 가족들이 핸드폰을 만져보고, 눌러보고, 긴 토론 끝에야 구매를 했다. 누가 보면 고가 미술작품 사는 줄 알았을 것 같다.


# 한톨의 흠집도 용서할 수 없어

역시 중고 핸드폰 거래 에피소드다. 젊은 독일인이었는데, 햇빛이 쨍한 날에 야외에서 디스플레이를 직사광선 아래에 이리저리 비춰보고 점만한 흠집을 가리키며 가격을 사정없이 깎아댔다. 직거래 전 사진을 수 십장 보내줬음에도 이러는 건 작정하고 왔다는 뜻이다. 당시 급하게 팔아야 했기에 네고를 해줬지만, 지금이었다면 안팔테니 가라고 했을 유형이다.


# 직거래 사기

이건 큰 금전사기로 이어질 수 있는 유형이라 굉장히 조심해야한다. 약 1100유로짜리 핸드폰을 구매하기로 했는데 자기가 급하게 부모님 집에 가야한다며 어디다 맡기고 간다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말을 순진하게 믿었고, 거래장소에 가보니 당연하게도 물건은 없었다. 신분증까지 교환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설마설마 했지만 사기였고, 나는 이 사건으로 독일에서 첫번째 고소를 진행하게 된다. 변호사 상담을 하며 알게된 내용인데, 이런 식으로 클라인안짜이겐에서 수 만유로 이상 사기당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여기서 생략하기로 하자.




물론 빌런만 있는 건 아니다. 정말 쿨하게 직거래 하는 분도 있고, 내가 한국인인 걸 알고 한국에 관심을 보이는 분도 있고, 좋은 물건 팔아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분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머리 아프고 짜증나도 중고거래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불필요한 소비를 막고 버리기 아까운 물건을 소생시키기는데 사실 중고거래만 한 게 없으니, 안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독일의 클라인안짜이겐 그리고 한국의 당근, 분명 계륵과 같은 특징이 있지만 그래도 원리원칙만 지키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제목 사진출처: AI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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