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 사고 꽃도 받고 고기도 먹고
부부의 이름으로 가정을 꾸린 지 17년이 됐다. 지금 보면 까마득히 어리고 어린 스물여덟의 결혼이었는데, 웃긴 것은 그 당시 우리는 다 컸고 꽤 나이 들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뭣도 모르던 어린 부부는 동남아 신혼여행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결혼 10주년엔 하와이를 가자며 약속했던 것 같다. 그러나 10주년은 육아의 굴레에 시달리던 시기이기도 했거니와 어머님의 암 투병을 지켜보느라 마냥 우울했던 날들로 기억한다. 곧 다가올 20주년은 아마 고3 수험생의 뒷바라지를 하며 전전긍긍 노심초사할 어느 날이 되겠지. 그다음은 어찌어찌 살다가 30,40주년 즈음엔 크루즈 여행을 갈 수 있을까. 물론 우리 두 사람이 무탈히 건강히 그때까지 함께 행복해야겠지만.
아주 예전엔, 결혼 17주년쯤이면 중년으로서 뭔가 안정적이고 여유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살고 보니 17이란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 10주년이 지나 두 자릿수가 되고부터는 그다지 큰 의미는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한 해 한 해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와 압력에 깜짝깜짝 놀랄 따름이었다.
올해도 여느 해 기념일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나름 새로운 이벤트가 있었다. 17주년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새 차를 구입하는 시기와 맞물린 것이다. 느긋하고 품격 있는 중년의 이미지 하면 떠오르는 기본 모델들이 있겠지만, 우리 차는 그에 반하는 차였다. 캐스퍼 일렉트릭.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남편의 가성비 차를 찾고 찾다가 고른 차였다. 국산 중형 전기차는 물론이요, 테슬라를 비롯한 수입 전기차들을 다양하게 시승해 봤지만 돌고 돌아 결국은 우리 형편에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 생각했다.
새 차를 사는 동시에 헌 차 '모닝'을 처분했다. 신혼부부 두 사람의 벌이로 적금을 톡 털어 일시불로 구입했던 첫 차이자 첫 재산, 첫 출산을 하러 나서서 첫 아이를 태우고 첫 카시트를 달고 첫 여행을 떠났던, 결혼 한 뒤 대부분의 소중한 '처음'을 함께 한 차였다. 오랜 시간만큼 24만 km라는 장거리를 뛰었고, 조수석 창문도 한번 내리면 올라오지 않는 데다, 온도 조절 다이얼이 고장 나 냉난방도 번거로운 그 차가 나는 왜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정작 그 차를 매일 타던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어쨌든 13년 된 SUV 패밀리카도 잔고장이 많지만 20주년, 아니 25주년 즈음까진 부디 건재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또 하나, 17주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철이 들어 결혼 기념 선물을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생화를 좋아한다며 홀로 벽에 대고 떠든다 생각했는데 허투루 듣지 않고 꽃집에서 근사한 꽃다발을 사 온 중3 아들. 대면 공포증이 있나 싶을 만큼 키오스크가 익숙한 이 숙맥 같은 아이가 어떻게 꽃을 고르고 샀을까 마음이 간질거린다. 꽃다발을 사서 들고 오는 그 길이 너무나 창피해 사람 없는 길로 돌아왔다고 툴툴대는 그 츤데레함이 그간의 서운함을 대번에 날려버렸다. 바가지는 쓰지 않았는지 염려도 되지만 여자 친구에게 갖다 바치지 않았으니 됐다. 다이소에서 만원이나 결제해 씀씀이가 헤프다고 잔소리를 들었던 딸이 사실은 엄마아빠의 커플 머그잔을 사느라 그랬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말도 못 하고 꽤 억울했을 것이다.
이어진 소소한 결혼기념일의 일상. 초등학생의 막차 혜택을 누리기 위해 찾은 빕스에서 4인 샐러드 바를 주문하고, 입 떡 벌어지는 가격에 겨우 한 점씩만 맛봤던 스테이크. 그 아쉬움을 달래려 다음날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미국산 쇠고기 살치살 두 근을 사 와 순식간에 먹어 치운 뿌듯함과 만족함. 작더라도 실속 있는 새 차의 냄새를 만끽하며 늦은 저녁 인근 빵집으로 드라이브하고 오는 여유로움. 마감떨이로 운 좋게 받은 소시지빵 하나. 라디오에서 재생되는 음악의 제목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요즘 새 차의 스마트함. 소소한 즐거움과 기쁨이요, 결혼 17주년의 사치다.
나와 결혼 시기가 비슷한 중학교 동창이 있다. 동갑내기 부부에 아이들 나이도 똑같은 그 친구는 나보다는 '사는 형편'이 좋아서인지 이번에 뉴욕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대한항공 직항 4인 식구 티켓에 살벌한 뉴욕 물가까지 감안하면 여행 경비가 얼마일까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거의 우리 차 값 아냐?! 그러나, 뭐 어떠한가. 솔직히 신혼 때는 그 친구의 넓은 집과 큰 차를, 여유로운 씀씀이가 많이 부러웠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넘고 한해 한해 살아보니 각자 사는 모양은 제각각이며, 주어진 삶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 진짜 행복이고 지혜임을 깨달아 간다. 나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웃고 울어주며 함께 하는 친구의 존재 자체가 감사인 것을. 어리석게 틈틈이 비교하는 곁눈질보다 지금 내 앞의 삶과 형편에서 감사함을 찾는 번뜩이는 눈망울로 살아가련다.
여전히 사는 형편은 비슷하더라도, 마음의 형편은 점점 나아지고 좋아지고 넓어지고 있다는 것. 이런 것이 감사이고 행복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