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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신분세탁

본명과 필명의 거리

by 다독임

최근에 브런치 필명을 입 밖으로 꺼낼 일들이 있었다. 신경숙 작가님의 북토크에서 필명으로 사인을 받은 것도 그렇고, 송지영 작가님의 북토크에서 브런치 작가로 얼굴을 내민 것도 그렇다. 심지어 브런치 세계의 한 유명 작가님으로부터 무명작가인 나, '다독임'을 수신인으로 한 작은 손편지를 건네받은 일까지 있었다.


이렇게 필명으로 소통하다 보면 때로는 내 본모습을 가리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다독이는 너른 사람, 왠지 어엿하고 따뜻해 보이는 그런 사람말이다. 솔직히 내 실체를 감추고 사는 기분이 든다. 브런치 작가 다독임은 글에서만 존재하며, 혹시 글 뒤에 숨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속의 '다독임'과 현실의 나는 분명 동일 인물인데, 필명과의 거리감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글 속의 나와 현실의 나, 진짜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인 걸까.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하는 일상이나, 오랜 시간 이어온 관계에서 나는 '김OO'으로 살아간다. 나의 본명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성 씨에, 초중고를 거치며 같은 이름의 아이들을 매년 만났을 만큼 평범하고 흔하다. 아, 한자 뜻을 견주어보면 아이들은 대부분 '참 진(眞)'자를 썼는데 나는 '보배 진(珍)'을 쓴다는 차이가 있었다.


본명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했던 일은 8년 전쯤이다. 교회에서 엄마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상담사님의 질문이 그 시작이었다.

-도화지에 나를 그려보세요. 자매님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나요? 무슨 뜻을 가지고 있나요?

등으로 시작해 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기억. 그리고 이름 뒤에 덩그러니 서 있던 소심하고 주눅 든 아이를 만났다. 그날 나는,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들 앞에서 삐질삐질 울었다.

폭신한 잔디밭에 서 있는 작은 여자 아이(안락한 지지를 갈구하는 마음이 반영된)를 그렸던 것 같고,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셨으며, 이러이러한 뜻이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같은 이름의 친구들과 다른 한자를 쓰는 게 조금 좋았다고, 왠지 특별해 보였고, '보물, 보배'라는 의미가 소중한 느낌이었다고 말이다. 이름의 해석은 그럴듯 했으나, 사실 나는 나를 그렇게 여기지 못했다. 언제나 외롭고 혼자인 것 같았던 나는, 도무지 바람 잘 날 없던 가정 안에서 몸 사리느라 애썼던 나는, 집밖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명랑하고 밝은 사람으로 연기하며 살던 나는, 김OO이라는 이름처럼 그저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존재라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명에 큰 애정이 없던 나에게 드라마틱한 개명까진 아니더라도 새로운 이름을 지을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브런치 '필명' 짓기였다. 한창 독서에 빠져있던 시절이라 왠지 '다독(多讀)'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넣고 싶었는데, 두 글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다독이다'라는 동사가 떠오른 것이었다. 다독이는, 다독다독, 다독이다- 등 각종 변형 단어를 떠올렸다가 이름같은 세 글자 '다독임'을 하기로 했다. 이참에 글을 쓰며 나를 다독여보자 마음먹으면서.


별다른 고민 없이 충동적으로 지은 필명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필명을 잘 지었다는 얘기를 듣곤 했을 땐 살짝 뿌듯했지만, 가끔 생각지도 못하게 누군가 나를 '다독임을 건네는 따뜻한 사람'이라고 하거나 '다독여줘서' 고맙다, '다독여'주시는 것 같아요- 등 댓글의 반응을 마주할 때는 좀 민망했다. 남을 다독이기는커녕, 나 스스로를 제대로 다독이기도 힘든 사람이었으므로. 그래도 사람은 이름대로 따라간다는 통념 때문인지 필명과 동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다독임을 건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대외적 다독임은 이러했다면, 대내적 다독임은 김OO으로 살면서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마음껏 꺼내기 시작했다. 불특정 다수의 온라인 공간이었으니 굳이 잘 보일 필요도 없고, 그냥 내 생각과 마음을 꺼내도 상관없다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인데 어때, 자주 만나지 않을 텐데 뭐, 못 볼 사람들인데 어때하다가도, 혹시 날 아는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한 날도 많았다.


다독임으로 1년 여의 시간을 지내온 올해를 돌아보니, 왠지 신분 세탁에 성공한 기분이 든다. 신분의 고하와 귀천을 따지는 것과 다른 개념의 신분 세탁인데, 이것은 격차, 등급, 서열과는 무관한 오직 나 홀로만의 체감이다. 내면의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진,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로워진 그런 사람으로 세탁되어 한결 홀가분해졌달까. 폭신한 잔디밭에서 발을 디디고 싶었던 어린아이가 맨발로도 어디든 씩씩하게 서 있을 모습으로 그려진 것과 흡사할 것이다.


이제는 다독임 작가가 꺼내놓은 진짜 마음과 생각을 나의 실체 김OO과 견주며 살아나가고 싶다. 감추지 않고 숨기지 않고 동일 인물 현실 적용 그대로 살아가되, 진짜 이름과 나 자신을 아껴주고 다독여주리라. 필명이 지칭하는 그 다독임을, 온전히 자라지 못해 눈물 가득이던 어린아이의 김OO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따끔하게 현실을 깨우치겠다. 어린아이 운운하기엔 이제 40대 중반에서 꺾일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_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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