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이들이 어릴 때는 선배엄마들의 조언에 귀를 들이대고 따라 하기 바빴다.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치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적당히 분별할 때가 되었지만, 어느덧 아이들은 훌쩍 컸다. 이제는 나도 답할 짬이 되는 선배 엄마쯤 되었으니 한 마디 하고 싶다. 아이의 성적과 성취 유무를 떠나 그냥 엄마의 경험으로 순수하게 느끼는 바다.
이것만은 꼭 하세요.
글. 씨. 교. 정.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다시 강렬한 후회를 토해내는 사건이 있었다. 발단은, 중등 아들의 한자시험에 전전긍긍하던 엄마로부터 시작됐다.
지난 학기, 중2 아들은 처음으로 '한문'이라는 과목을 '기말고사'를 대비해 공부하니 꽤 막막해했다.
손으로 오밀조밀 쓰면서 꼼꼼히 정리하는 나와 달리, 눈으로 공부하는 특이한 INTJ 아들. 영어 단어도 클래스카드 같이 눈으로 외우는 요즘 아이들의 특성인 건가. 도무지 쓰지 않고 눈알만 굴려대며 외우는 모습이 영 탐탁지 않았지만 하려는 게 어딘가 싶어 내버려 두었다. 며칠 지켜보다 답답했던 나는 한 가지 해결책으로 한자를 카드모양으로 만들어 외워보자 했다. 공부를 돕는 척했지만, 사실 아이가 외운 것을 내 눈앞에서 확인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못난불안감이었다. 어쨌거나 그때 백점을 맞아봤으니 이번에는 어떻게 하나 두고 보는데, 한자 카드 만드는 것만 도와줄 수 있냐는 아들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들: 엄마, 한자 카드 만드는 것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아쉬울 땐 공손하게)
-나: (귀찮은 척하며) 그래? 이번만이야. (이런 기특한 놈이 있나)
지난번엔 한문 교과서를 보며 만들어 줬지만, 이번에는아들이 쓴 종이를 가지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글 프로그램을 열어 표를 만들고,소리에 맞는 한글 입력 후 한자 키를 눌러 맞는 한자를 찾으면 된다. 하다 보니 군데군데몇 글자가 눈에 거슬린다.
놀 왈? 저런 한자가 있었던가.
빠질 촐? 이건 또 뭐야.
더할 중? 씩씩할 랑? 이런 뜻의 한자도 없다.
-이리 와 봐! 이거 제대로 쓴 거 맞아?
아들의 눈으로 확인한 결과 한자의 정체는
빠질 졸, 놀 완, 더할 증, 씩씩할 장
-나: 말도 안 돼. 어떻게 이게 이 글자가 될 수 있어?
-아들: 나 원래 ㅈ 이렇게 쓰잖아. 나만 알아보면 돼.
-나: 너도 틀리게 읽었으면서 알아보긴 뭘 알아봐.
아들도 지가 보기에 너무 했다 싶은지 머쓱하게 넘어가기에 더 이상의 잔소리는 멈출 수 있었다.
이제 이것들을 코팅하고 오려서 연신 뒤집어가며 암기하는 것은 아들의 몫이다.
아들은 악필 중의 악필이다. 글씨가 날아다니다 못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악필. 문득 1학년 때 깍두기공책에연필을 꾹꾹 눌러쓰던 아들의 글자가 떠올랐다. 그렇게 반듯하고정갈했던 그 글씨를 왜 더 잘 써보라고, 크기를 맞춰 쓰라고 나는 타박을 했던 것인가. 무지했던 시절이여.
학년이 올라가며 키와 몸이 자라는 만큼 글씨도 엉망이 되어갔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좌)3학년 때는 또박또박 (우)5학년 때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맞춤법 실수는 현재진행형
악필도 교정이 될까. 손글씨 쓸 일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 되겠지만 글씨체는 그 사람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데.그래도 제삼자가 볼 때 쉬이 읽을 수 있는 글자면 좋겠다는 바람은 아직 버리지 못했다.
적어도 수행평가나 서술형 답안에는 정성을 다해 또박또박 쓰겠지? 네 글씨가 부끄러워지는 날이 되면 고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