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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May 05. 2024

작은 찻잔 속, 영혼이 울려 퍼지는 향기

#위로 #상처품은 목련꽃 #Risuona anima mia

인생을 흔드는 큰 이벤트는 언제나 예상치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등장한다. 강도 높은 시간을 보내며 삶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일상의 편성표가 대대적으로 개편되는 동안 봄이 지나갔다. 목련꽃 필 무렵, 벚꽃 필 무렵을 기약했던 약속들도 꽃잎들처럼 사라졌다.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백색소음 같은 라디오 채널 몇 군데가 잔잔한 배경음악이 되어 복잡한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가 한 곡의 노래를 몇 번 듣게 되었다. 첫 만남은 몸과 마음이 바쁜 채 뭔가를 부지런히 하고 있을 때 들려온 선율이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노래 검색을 하거나 라디오 프로그램의 선곡표를 찾아봤을 텐데 그럴 여유는 없던 때였다. 그저 들리는 순간 ‘참 좋다’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 멜로디가 또 들려왔다. 이번에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목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위로’의 정서가 많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단단하게 붙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어딘가에 기대고 싶던 차에 마음속까지 흘러들어온 소중한 곡이었건만 제목까지 알아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다가 세 번째 들려왔을 때에는 전주를 듣자마자 혹시 그 곡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오며 가며 우연히 마주친 낯선 누군가를 세 번째 만나면서 이제는 한눈에 알아보며 반가움마저 느껴지는 기분과 비슷했다. 


차분하게 앉아서 전곡을 다 들은 건 처음이었는데 아름답고 강력한 누군가가 들려주는 부드러운 메시지처럼 들렸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노래가 끝난 후에 곡에 대한 소개를 듣게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은 시에 영감을 받아서 플라시도 도밍고가 노래한 곡이었다. 빙고, 곡의 느낌과 보컬을 정확하게 맞췄다. 이탈리아어 뉘앙스의 제목이었는데 흘려들었다. 모든 정보가 손에 쥐어졌지만 선곡표까지 찾아볼 적극성은 아직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여유가 없다기보다는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우선순위가 바뀌었구나 싶었다. 좋은 노래가 귀에 감기면 바로 검색하던 나인데 이렇게 되다니. 그런데 가요나 팝도 아니고 클래식 채널에서 같은 곡을 한 달 사이 세 번이나 듣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이 곡을 제대로 마주할 때까지 계속 들려주려는 걸까 싶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하는 호기심에 슬며시 기대 보기로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k5Uz2HCYMo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면서 꽤 많은 에너지를 쓴 나머지 헛헛해진 마음을 채우는 데는 무엇이 좋을까. 여행을 다녀오면 좋지만 자리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 음악으로 충전하기로 했다. 전에 좋아하던 곡들도 찾아 듣고, 나중에 듣기로 미뤄두었던 곡들도 듣다가 1년 전 이맘때 방송했던 ‘팬텀싱어 4’에서 기억에 남는 곡들도 찾게 되었다. ‘진지맛집’이 부른 <Cose> 시절부터 나는 ‘리베란테’를 좋아했다. ‘원이네 진지맛집’이 부른 <Il coraggio delle idee>는 당시 프로듀서들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고 내게는 <O tu o ninguna>와 더불어 ‘팬텀싱어 4’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다.  


"굳이 무리한 계획을 세우고 길을 잃을 필요 없어요.

 당신은 알잖아요, 이겨낼 수 있다는 걸.

 당신은 상상의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Il coraggio delle idee>의 가사가 이런 거였나 싶었다. 망치를 든 사람은 세상이 모두 못으로 보인다는 표현이 여기게 맞을까. 나를 위한 노래로 들렸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채 지치고 약해진 마음속에 부드럽게 들어와 토닥여주는 노래라니 역시 우승팀을 잘 알아봤다. 


이어서 결승전의 곡들을 듣기 시작했다. 시즌 내내 즐겁게 보다가 막상 결승전을 치를 때에는 응원하는 마음, 즉 사심이 커지면서 덩달아 긴장한 나머지 어떤 곡을 불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찾아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이제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Altrove e qui>, <Fría como el viento>를 들으니 새롭기도 하고 작년보다 잘 들렸다. 그리고 다음 결승 2차전 첫 곡이 시작되는 순간,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우연히 세 번 마주쳤던 그 곡이 이번에는 나를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Risuona anima mia>. 제목마저도 나의 영혼이 울린다는 뜻이었다. 그 누군가가 이 곡을 내게 보내주려고 애쓰고 있는 걸까. 경연 라운드인데도 긴장하거나 과하게 힘주지 않고 노래하는 네 사람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곡의 느낌과 같았다. 하모니가 아름다웠다. 



https://www.youtube.com/watch?v=dy6T7T1SpRM



플라시도 도밍고의 원곡도 다시 들었다. 가사도 새겨서 봤다. 이 곡을 두 번째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느꼈던 아름답고 강력한 힘이 내 안에 울려 퍼지면서 동시에 주변을 감싸오는 느낌이었다. 마치 어떤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런 기운이 느껴지면서 따뜻하고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교황이 쓴 시를 곡으로 만들었다니 성가적인 정서가 있기도 하겠지만 그저 내가 느낀 건 큰 에너지였다. 메말랐던 마음에 듬뿍 물을 뿌려주면서 새로운 시작을 잉태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허전하고 지쳤던 마음에 봄기운을 채워주는 선물이 마침 도착했다. 해마다 목련꽃잎을 말린 꽃차를 보내주는 후배가 있다. 마당에 있는 목련꽃이 피기 시작하면 후배의 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한 잎 한 잎 따서 말리시는데 그 귀한 꽃차를 늘 잊지 않고 내게 보내주신다. 따뜻한 물 한 잔에 말린 꽃을 한 송이 띄우면 고운 목련이 피어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황홀한지 모른다. 단아한 생김새에 품은 깊은 향은 또 얼마나 농염한지 지구에서 손꼽히는 우아함이다. 그런데 올해는 만드는 과정에서 꽃이 상처를 입어서 예년보다 곱지 않다며 양해를 구해왔다. 


명인이 만든 어떤 명차에 이 목련꽃차를 비할까 싶다. 가족 간의 사랑과 정이 돈독한 후배의 홈 스위트홈 앞마당에서 자란 목련나무는 얼마나 건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을까. 어머님의 정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중에 선물로 간택되는 녀석들은 얼마나 특별할까. 유리병 뚜껑을 열고 가장 처음 만난 한 송이를 물에 띄웠다. 점점 꽃잎이 퍼지는데 후배의 말대로 전과는 조금 다르다. 아이보리빛으로 큼직하게 퍼지던 꽃잎과는 다른 모양이다. 활짝 펴지 못하고, 붉은빛도 감돈다. 코끝이 시큰해진다. 





목련꽃의 상흔에 괜스레 내 마음고생이 투영된다. 너도 나도 이번 봄에 같이 고생했구나. 그렇게 애쓰며 쉽지 않은 봄을 보낸 각자가 이렇게 만나다니 이 또한 인연이리라. 말린 상태에서는 그동안 받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물에 띄우자 그제서야 속사정이 드러나는 꽃차를 보니 겉보기에는 무탈해도 아픔 없고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싶다. 하지만 우아하고 높은 기상으로 자존심을 지키는 목련꽃처럼 나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하게 다져본다. 그러다가 약한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날이 오면 그 어떤 나의 모습을 보여도 허물이 되지 않는 친구가 생겼다. 그런 날에는 꽃차 한 송이를 물에 띄울 것이다. 


아픈 상처 가슴에 품고도 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목련꽃의 자태를 보며 내 영혼이 작은 찻잔 속에 깊게 울려 퍼진다. Risuona anima 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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