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35), 대약진 대실패(3)
중공은 농민을 기초로 혁명에 성공하여 대륙의 권력을 거머쥐었으나, 혁명 이후 국가 현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지속적으로 농민과 농촌의 희생을 요구해 왔다. 오늘날까지도 확대·심화되고 있는 농민공(農民工)과 ‘삼농(三農)’ 문제의 근원도 농민에 대한 수탈과 희생을 전제로 한 도농(城鄕) 이원 구조를 공업화와 부국강병 실현을 위한 정책 수단으로 채택·고수하고 있는 데에 있다.
마오는 농민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서 “소생산자는 매일 매시 자발적으로 자본주의를 생산한다”라고 하면서, “농민은 자유를 원하지만 우리는 사회주의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마오가 말한 "우리"를 대표하는 건 당이고 그 당을 영도하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마오가 원한다는 "사회주의"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왜,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을까?
마오는 스스로도 "사회주의 개조"가 농민의 저항에 마주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중국 농민은 세계의 다른 지역 농민과는 달리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레닌주의와 포퓰리즘 사이의 상호 모순적인 길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닌은 “농민의 자발성은 절대 믿어선 안 된다”라고 지적하면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농민에 대한 공산당의 인도와 농민의 자발적 경향과의 투쟁을 강조했다.
반면에, 마오는 농민의 천성적 사회주의(또는 사회주의로 전환할 수 있는) 경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마오는 “우리는 대중을 믿어야 하고 또 대중은 당(黨)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당’의 유일한 대표는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편, 마오는 객관적 형세 변화와 자신의 주관적 판단 사이에서 동요하는 모습도 보였다.
1955년 당내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 합작화 운동을 추진하고 농민의 사회주의적 적극성을 의도적으로 과장할 때, 그리고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를 추진하던 시기에는 “현재의 상황은 바로 대중운동이 지도부 앞에서 가고 있고 지도부가 운동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대기근 시대에 농민이 개체 경영을 요구한 때에는, “농민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되고 농민에 대한 당의 지도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말을 바꿨다.
마오의 의중과 속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자신과 중공이 농민을 대표하고 또 그만큼 농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는 끊임없이 농민을 이용만 했다. 마오는 이런 말도 했다.
"국가의 공업화를 실현하기 위해 농민의 이익을 희생해야 하며, 이는 ‘대인정’을 시행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농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다. 만약 농민의 이익이 일시적으로 침해되었다고 보채는 울음소리”를 내면, 이는 우리더러 중공업 건설을 하지 말라는 것이며, 실제로 미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후 마오가 통치하는 "사회주의 신중국"에서 “농민의 생활이 힘들다”라는 내용의 발언을 하려면, ‘미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반혁명분자’라는 모자까지 쓸 각오를 해야 했다. 실제로 1959년 7월, 장시성 루산(庐山)에서 펑더화이(彭德怀)가 대약진의 문제와 농민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서 지적하자 마오는 펑더화이를 "반혁명 집단의 수괴"와 "소련 첩자"로 몰아서 숙청했다.
당시의 저명한 철학자, 사상가이자 농촌운동 지도자였던 량수밍(梁漱溟, 1893~1988년)이 최고국무회의 석상의 마오 앞에서 “노동자는 노동조합(工會)이 있어서 권익을 보호해 주는데 농민에게는 농회(農會)가 없다”, “도시의 노동자는 구천 위 하늘에 있으나 농민은 구천 아래 땅에 있다”, “중국공산당도 농민을 버렸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마오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마오는 화난 어조로, “그가 우리 공산당보다 더 농민을 대표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건 황당하다. 마치 목수 앞에서 도끼질하는 격이다”라고 말했다.
발끈해서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마음속으론 당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량수밍은 이른바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에게 가택수색과 수모를 당했다. ‘문혁’ 시기에 량수밍 외에도 수많은 지식인들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렇다면 마오가 대표성을 강조한 중공과 중국 농민과의 실제 관계는 어땠을까? 마오는 대중의 불만 정서를 변혁 요구로 유도하고, 더 나아가 대중 역량을 동원하고 조종하는 방면에서 동물적 감각을 지닌 고수였다. 그가 말하는 대중정치 참여는 실제로는 조종과 공작을 통해 "대중적 계급투쟁" 모양새의 운동을 발동하고 최종적으로 모든 법제와 규범까지 짓밟는, "대중독재"라는 명분으로 자기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형식과 절차일 뿐이었다.
그는 중농(中農)을 상중농(上中農), 즉 부유 중농과 하중농(下中農)으로 나누고, “부유 중농의 뒤에는 지주와 부농이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요구하지만 하중농과 빈농은 사회주의 발전을 요구한다”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동물적 감각으로 갈라치기와 선동의 맥을 잡고 밀어 부쳤다.
그러나 실천 과정에서 검증되었듯이, 하중농이건 빈농이건 중국 농민들의 바람은 자신들도 상중농처럼 잘 사는 것이었고, 이것을 실현시켜주지 못한다면 ‘사회주의’이건 무엇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특히 토지 사유(私有)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그런데 "위대한 영도자"이고 "붉은 태양(红太阳)"인 마오주석께서는 “부유할수록 자본주의를 원하고 가난할수록 사회주의를 원한다”라고 말하니 농민들은 도대체 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농촌에서 자란 나이든 부녀자가 마을에 온 촌서기에게 이렇게 푸념했다고 한다.
“마오 주석은 어째서 늘 이렇게 소란만 피우고 우리가 편하게 먹고살게 놔두지를 않는 건가요?”
이 같은 상황에서 ‘사회주의 신중국’은 필연적으로 ‘가난한 사회주의’로 갈 수밖에 없었고, 중국의 농촌과 농민들은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비참하고 슬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황이 이 정도로까지 악화된 가장 큰 이유는, 필연적으로 권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는 공산당 통치체제가 만들어 낸 독재자가 주관적이고 공상적인 발상을 오만하고 야만적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계속)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사 #대약진운동 #슬픈 농촌 #슬픈농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