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뚱의 성격상 특징은 고집과 오기가 매우 강하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과오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고, 또한 복수심이 매우 강했다. 단, 자신의 권력 기반이 아직 튼튼하지 못하다고 느낄 경우에는 상당한 정도로 양보와 타협도 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을 틀어쥔 후에는 그 권력을 십분 활용해서 철저하게 상대를 모함하거나 기습하여 제거했다. 마오의 사상과 전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군중노선’과 ‘실사구시’는 그 같은 술수를 펴기 위한 기초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오의 이 같은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는 1959년 여름 장시성 루산(庐山)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1959.7.2∼8.1) 이후였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대약진에 대해 비판 의견을 제출한 펑더화이(彭德怀)를 "우파", "반혁명", "소련스파이" 등의 죄명과 모자를 씌우고 숙청했다. 그 이유와 동기는 대약진운동과 합작화, 인민공사 운동으로 인한 부작용과 그에 따른 경제정책 실패와 대기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가 어렵고, 자신의 당내 권위와 권력이 흔들리고 위협받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1959년 루산회의 개막초기, 신선회의
장시성 저우장(九江)시 관할 루산은 수려한 경치와 함께 여름철에도 시원하여 유명한 피서지이기도 하다. 중공이 대륙의 정권을 장악한 이후 이곳에서 중공 역사에 풍파를 일으킨 주요 사건이 두 차례 발생했다. 첫 번째는 1959년 7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7.2~8.1)와 8기8중전회(8.2~8.16) 두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 마오는 사전에 미리 린뱌오(林彪)를 포섭한 후 당시 국방부장으로서 대약진 시행 과정상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펑더화이를 ‘우파’로 몰아 “소련과 내통한 반혁명분자”라는 모자를 씌우고 숙청했다. 두 번째는 마오가 다시 린뱌오에 대해서도 토사구팽을 시작한 ‘1970년 루산회의’이다. 여기서는 우선 1959년 루산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해 보자.
‘1959년 루산회의’는 원래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만 개최할 계획이었고, 회의 개막 초기에는 참석자 대다수가 ‘신선(神仙) 회의’라고 불렀을 정도로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사전에 전달된 회의 주제는 주로 경제업무 중의 좌경 착오를 교정하는 것과 마오쩌동이 제출한 19개 의제에 대해서 토론하자는 것이었다. 즉 독서, 형세, 금년도 및 4년 임무, 선전, 종합 평형, 군중노선, 공업 관리, 체제, 협작 관계, 공공식당, 농촌초급시장 회복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당면 형세와 앞으로의 임무와 구체적 정책이 핵심이었다.
마오는 국내 형세를 3개 구절로 개괄했다.
"성적은 위대하고, 문제는 적지 않고, 전도는 밝다(成绩伟大, 问题不少, 前途光明)."
그리고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정책의 오류로 인한 부작용과 문제점을 “열 개의 손가락 중 아홉 개의 성과와 한 개의 착오”라는 말로 표현했다. 아무튼 그의 성격과 고집에 비추어볼 때 이 정도로나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것은 매우 드물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오는 당시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집체소유제와 전민소유제가 뒤섞이고 혼동된 상태에 대해 필히 이들 간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고, 실사구시적인 것과 맹목적인 것을 분별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상품과 화폐를 폐지하자는 일부 인사의 주장을 "좌경착오"라고 비판했고, 루산에 도착한 후에 일부 책임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번 회의의 주요 임무는 좌(左)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밝혔다.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 "우"가 아니고 "좌"라고 강조한 것이다. 단, 늘 그랬듯이 마오가 드러내고 밝히지 않은 전제와 범위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의 초기부터 마오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던 사람은 저우언라이뿐이었다. 7월 11일 밤, 마오가 루산의 자신의 숙소에서 당시 후난성(湖南省) 제1서기였고 직전에 마오쩌동의 비서도 지낸 바 있는 저우샤오저우(周小舟)와 저우후이(周惠), 리루이(李銳) 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대약진 기간 중에 기층 농촌 간부가 거짓 과장, 허풍보고 하고 있다는 실상에 대해 들었지만, 마오는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진행했다. 이후 저우샤오저우는 다른 회의 참석자들에게 마오와의 대화 내용과 분위기를 전하며 “마오 주석이 좌(左)에 반대하고 교정하려 한다”라는 의견을 퍼뜨리며 여론을 조성하려고 했다. 그러자 저우언라이가 그를 불러서 “다시는 그런 말을 퍼뜨리지 마라”라고 경고성 주의를 줬다. 저우는 마오와 오랜기간 생사고락을 같이한 경험과 중공의 정보계통을 지휘하며 습득한 감각을 통해서 마오의 낚시질과 뒤통수 치는 수법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 초기에는 회의 분위기가 그야말로 ‘신선회의’라 부를 만했다. 낮에는 회의하고 저녁에는 공연이나 영화를 보고 무도회와 시 짓기 활동 등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각 소조별 토론이 진행될수록 이견이 돌출되었다. 그중에서도 마오쩌동이 요약한 “성적은 위대하고, 문제는 적지 않고, 전도는 밝다”라는 3개 구절 중 “문제는 적지 않고”라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가 핵심 문제였다.
7월 3일부터 대지구별로 화북조(華北組), 동북조(东北組), 화동조(華東組), 중남조(中南組), 서남조, 서북조 6개 소조로 나누어 토론하는 방식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초기에는 참가자 대부분이 문제와 결점을 지적하기보다는 마오의 심중과 분위기 파악을 위해 눈치를 보면서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될수록 갈수록 빈번하게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제기했다.
저우샤오저우(周小舟),1959년 당시 중공 후난성 위원회 제1서기
후난성(湖南省) 위원회 제1서기 저우샤오저우(周小舟)는 형세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후난성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난해 식량 생산량이 225억 kg으로 전년 대비 두 배 증가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 식량 생산량은 165억 kg에 불과했고 생철 생산량도 767만 톤이라 보고했으나 실제는 60만 톤에 불과했다”라고 밝혔다.
제1기계공업부 부장 자오얼루(趙爾陸)는 “대약진 중 수많은 경험과 교훈을 총결해야 한다. 예를 들면, 허위·과장·공산풍 허풍 보고와 계획이 주도면밀하지 못했던 점, 비례 관계를 소홀히 한 점, 무계획적 업무 처리, 품질 경시 등이다”라는 요지의 의견을 발표했다.
발언하는 류샤오치(刘少奇), 1959년 루산회의
7월 4일에는 류사오치(刘少奇)가 중남조에서 “1958년 대약진은 1957년 저장분을 먹어버렸고, 1959년도분을 미리 지출하게 했다. 1958년 최대의 성과는 혼란을 통해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경제적 의의보다 크다. 전 당과 전 인민이 심각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으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혼란과 파괴가 발생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주더(周德)
주더(周德)는 중남조에서 “농민 사유제를 중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공공식당 운영은 생산에는 유리하나 소비 측면에서는 적자라고 했다.
“식당은 손익을 자신이 책임진다지만 국가는 총체적으로 적자다. 꾸려가기 힘든 걸 무리하게 추진해선 안 된다. 공공식당을 전반적으로 폐지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현재 농민 중에는 불안정 상태에서 도시로 들어가려고만 하고, 집도 안 짓고 가구도 사지 않고 돼지 기르기나 채소 재배도 이전보다 적게 하고 돈이 생기면 다 먹고 써버린다고 한다. 이건 좋지 않다. 우리는 농민들이 돈 벌고 부유해지려고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농민이 부유해지는 걸 무서워할 게 뭐가 있나? 농민들이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하고 각자 자기 집을 일으켜 세우게 해야 한다. 가정 제도를 공고하게 하고, 응당 집에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밥 먹고 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농민을 부유하게 하는 것을 ‘부농노선’이라 비판해선 안 된다. 결코 농민들을 가난하게 해서는 안 된다.”
주더는 또한 공업 분야의 강철 대제련(大煉鋼鐵) 추진 과정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펑더화이(彭德怀)
당시 국방부 부장이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한 펑더화이(彭德怀)는 마오쩌동이 개회식에서 제출한 19개 문제와 국내 문제에 대한 개괄을 듣고 회의에 대해 많은 기대와 희망을 가졌고 소조 회의 토론에도 매우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서북조 소조 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1957년 정풍운동과 반우파 투쟁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후 성공에 도취해 자만해진 면이 있다. 승리 후에는 두뇌가 과열되기 쉬워서 잘 아는 경험조차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무산계급 독재 이후에 관료주의를 범하기 쉽다. 왜냐? 당의 위신이 높아지고 행정명령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도 그렇듯이 승리하고 있을 때에는 그 이면의 사실들을 못 보거나 안 들으려는 일들이 발생하기 쉽다."
회의 참가자들 중 일부는 회의장 밖에서 더욱 준열한 관점을 밝힌 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마오쩌동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즉, 마오가 이미 오만해져서 다른 의견을 듣지 않고, 매우 임의적이고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쉽게 바꾸며, 또한 경제 관련 업무를 잘 모르고 필히 존중해야 할 사물 발전의 객관적 규율을 자주 망각한다는 점을 지적, 비판했다. 이러한 말과 정황 정보들은 대부분 마오쩌동에게 보고되었고, 이후 관련자들은 예외 없이 혹독한 질책과 탄압을 받았다.
마오쩌뚱은 7월 10일 저녁에 각 소조 조장을 소집해 회의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작년(1958년)의 일부 결점에 대해서 착오는 인정해야 한다. 계획 목표가 과도하게 높았고 계획 항목이 많았고 실제 식량 생산량이 많지 않아서 각 방면의 불만을 야기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개별 문제의 각도에서 보는 것이고 전체 국면에서 말하면 하나와 아홉, 또는 아무리 많아도 세 개 손가락과 일곱 개 손가락의 문제이다. 아무튼 성과가 더 크다."
당시 농촌에서 ‘비정상적 사망’, 즉 굶어 죽은 농민 수가 3000만 명을 넘었다. 이토록 엄중한 상황과 문제에 대해 ‘손가락 한 개, 세 개’식으로 말하는 마오의 태도에 대해 경제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 즉 류사오치, 덩샤오핑, 천윈 등은 매우 답답하고 또 분노했을 것이다. 그중 류사오치의 반응이 덩샤오핑보다 강하고 직설적이었다. 이것이 아마도 마오가 이른바 ‘문화대혁명’ 음모를 발동한 후에 류에게 덩샤오핑보다 더 심하고 잔인하게 보복한 동기이자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