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도에서 테니스를 치는 이유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하기 딱 한 달 전이었다. 나는 남자친구와 2년 동안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장거리 연애를 하던 중이었다. 우리 둘은 적당한 거리의 연애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다. 서로의 공백이 그리워질 때쯤 제주라는 낭만적인 장소에서 짧게 재회를 하고 여행 같은 일상으로 마법 같은 며칠을 함께하고 다시 돌아가 각자의 삶에 충실했다. 그러던 중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의 불안감과 우울증이 문제였던 걸까. 매일 수없이 전화를 걸던 남자친구가 변했다. 전화도 잘 오지 않았고 자기 전엔 서둘러 전화를 끊기 바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매일밤 여러 가지 망상들에 휩싸였다.
그렇다. 이건 분명히 권. 태. 기이다. 확실하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었다. 한 달 동안 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물증을 잡지 못한 채로 꾹 참아내었다.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 여기고 참아도 봤지만 앞 구르기 하고 옆 구르기 해서 봐도 권태기가 확실했다. 쉬는 날이 길게 생겨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비행기를 타서 제주공항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난 곧 실연할 여주인공처럼 제주길에 올랐다. 드디어 한 달 만에 만난 남자친구. 이게 웬걸? 그대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지. 날 차기 전에 더 잘해주는 건가. 난 더 비참하게 차이는 것인가.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드디어 의문이 풀렸다. 그가 빠진 상대는 테니스였다. 일하는 시간 자는 시간을 빼고는 테니스를 치거나 테니스 영상만 본다. 그동안 혼자 남몰래 맘고생하던 게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왜 이렇게 테니스에 미치는 걸까?
서울로 돌아와서 차근차근 제주도 이주를 준비하면서 제일 처음으로 도전할게 생겼다. 바로 테니스다. 테니스를 치지 않는 사람으로서 여자친구와의 연락을 소홀히 할 정도로 테니스에 미치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해보는 수밖에. 남자친구의 취미를 이해해 보겠다고 시작한 테니스가 내 삶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 몰랐다.
나에겐 한 달의 시간이 있었다. 테니스가 정말 그 정도로 미칠 수 있는 운동인지. 나랑 잘 맞는지 알아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10분 정도 체험을 하러 갔다. 고작 10분 동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어떻게 하면 이 공을 칠 수 있냐는 것뿐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바로 등록했다. 그 어떤 고민도 불안도 그 시간 동안은 내 것이 아니었다. 테니스를 시작한 나에게 남자친구는 신나게 테니스 영상을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는 테니스로 시작해서 테니스로 끝났다. 서로의 사진이 아닌 테니스 영상을 주고받기 바빴다. 무언가에 미칠 수 있는 게 운동이라는 건 참 건전하고 건강하다. 물론 테니스는 그 사실과는 별개로 참 열받는 운동이다. 그냥 공을 잘 받고 잘 주면 되는데 그게 참 어렵고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체력이 길러질 수는 있지만 생각보다 관절 부상도 많고 쉽게 잘 늘지 않아서 좋은 운동이 맞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오랫동안 하고 싶은 운동이다. 잘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제주의 삶을 채우고 싶다.
그래 10년 뒤에는 잘 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