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라앤글 Feb 14. 2024

남편이 마트에 가면 전화기에 불이 난다

"여보, 주방세제 OO브랜드가 세일하는데 이거 사 가도 돼?"

"돼 돼 돼 된다고! 제발 전화 좀 그만하고 아무거나 사와!"

마트에 간 남편으로부터 벌써 몇 번째 전화가 오는지 모르겠다. 계속된 질문에 심드렁하게 단답형 대답만 하다가 이내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상냥하고 친절한 아내의 삶을 지향하는 내가 헐크로 변하는 건 분명 남편 때문이다.





남편의 급여에서 생활비를 쓰기 때문에 모든 결제가 남편의 카드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 달의 수입과 지출을 남편이 관리하다 보니 나로서도 신경 쓸 부분이 줄어들어 생활비 고민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었다.

주말에 네 식구가 마트에 가서 각자 먹고 싶은 걸 카트에 담으며 이건 빼라, 다시 담아라 하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이 혼자 장을 보러 가겠다고 했다.

"당신 피곤한데 쉬고 있어, 내가 마트 다녀올게"

같이 일 하는 맞벌이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자격증 공부를 위해 주중에는 주경야독으로 자정이 다 되어 들어오는 남편의 배려였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살림과 육아를 오롯이 혼자서 몇 년째 감당해 내고 있다. 힘들기도 하지만 주중 살림은 내가, 주말 살림은 남편이 하는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좋은 팀워크를 갖춘 부부라고 생각해서 불만은 없다.


남편과 나는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사는 기준이 조금 다르다. 성분과 가격 그리고 브랜드의 이미지도 중요하게 고려하여 맛이나 성능에 대해서 검증이 된 제품을 구매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세일상품, 1+1 상품, 가격이 저렴한 것 위주로 제품을 구매한다.

같이 장을 보러 가서 주로 최종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남편이 가장 저렴한 제품을 카트에 담으면 이건 맛이 별로, 이건 세정력이 별로, 이건 내구성이 별로란 이유로 다시 제 자리로 보내고 내가 원하는 상품을 카트에 담는다. 상품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휴식을 준다는 이유로 마트에 혼자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편이 알아서 장을 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은 집에서 쉬고 있으라는 말이 무색하게 혼자 마트에 간 남편은 나를 쉬게 하지 않는다. 아니 나를 화나게 만든다.


남편에게 걸려오는 전화



"여보, 사과주스 사 갈까? 포도주스 사 갈까?"

"롯데 살까, 해태 살까?"

"작은 거 살까, 큰 거 살까?

"여보 지금 이거 세일 중인데 이거 사 갈까?

한 번에 물어봐도 될 질문이 연이어 생각이 나지 않는 건지 하나 물어보고 끊고, 또 전화해서 하나 물어보고 끊고 이런 난리도 없다.

사과주스, 롯데, 큰 거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다 계속되는 질문에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라 버럭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전화 좀 그만하고 알아서 사 와!"

"어, 알았어 미안~ 쉬고 있어"

헐크로 변한 아내를 눈치챘는지 남편은 순한 양이 되어 전화를 끊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했다 느낀 게 분명하다. 이 정도로 전화를 할 거면 같이 가자고 할 것이지...


이 남자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마트에 가서 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하는 것일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연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살며, 남편은 아내의 칭찬을 먹고 산다고 했다. 연애 2년, 결혼 14년 차. 2009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남편에게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사랑의 말을 요구해 본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편은 마흔 중반인 지금까지도 내가 너무 좋다고 나를 너무 사랑한고 수시로 고백하고 나와의 포옹과 뽀뽀를 좋아한다.

퇴근하고 온 야밤에도 쓰레기를 버리고 주말에는 가족을 위해 요리도 하고 화장실 청소까지 한다. 나는 남편의 모든 행동과 말에서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끼며 살고 있다. 오히려 남편으로부터 "당신은 나 사랑 안 해? 나만 사랑한다고 하는 거 같아"라는 불만 섞인 투정을 듣고 산다.


나는 이렇게 남편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느끼며 사는데 남편은 나에게 칭찬을 듣고 살고 있 생각해 본다. 칭찬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내에게 혼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오히려 다행이라 느끼며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는 남편의 말과 행동에 혼을 내고 지적을 하고 교정이 되길 원했다. 남편은 칭찬을 통해 아내에게 인정받는다고 느끼는데 나는 그걸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하는 모든 것을 남편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는 누구보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사랑한다, 잘한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데 유독 남편에게만은 칭찬에 인색한 아내였다.

뭐든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남편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 나를 위해 주말에 살림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오는 일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완벽해 보이지 않는 남편을 다그치고 혼내기 바빴다.

남편도 칭찬과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었을 텐데 나는  남편의 인정욕구를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엔 내가 문제였다. 무엇을 골라 왔든지 잘했다 칭찬을 하고 역시 나를 생각하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인정하고 칭찬을 했어야 했다.



남편이 마트에 가서 전화를 열 번을 하든지 스무 번을 하든지 다정하게 받아줘야겠다. 무겁게 장을 봐 오면 수고했다고 칭찬을 해 줘야겠다. 당신 덕분에 집에서 잘 쉬고 있었노라고 나를 생각해 주는 건 당신뿐이라고, 우리 가장 최고라고 인정을 해 줘야겠다. 살면서 연한 것은 없다는 나 스스로 인정하고 노력하며 살아야겠다. 불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심오한 깨달음을 얻는다.

역시 날 성장시키는 건 수 같은.... 아니 아니 사랑하는 남편의 공이 크다.


이쁘게 늙어 갑시다


여보 고마워, 당신이 최고야! 그래도 전화는 5번 이하로 부탁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