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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Apr 02. 2024

당신의 장바구니에는 무엇이 있나요?

토독토독

새벽비가 실외기에 요란하게 튕기는 소리에 이른 잠에서 깨어나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렸다. 화면이 켜지자 어제 주문하지 못하고 잠들었던 양말 상세페이지가 눈에 들어온다. 장바구니에 담기 버튼을 누르자 빈틈이 많이 생긴 냉동실도 떠오르고 작은 아이가 갖고 싶다던 동화책도 생각이 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뒤적거리는 것들을 담다 보니 어느새 장바구니는 차고 넘쳐 결제 예상 금액이 5백만 원을 훌쩍 넘겼다. 건조기는 왜 들어있는 거야. 헛된 욕망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구멍이 나 당장 급한 큰 아이의 양말만 15,900원 결제를 하고 나머지 욕망들은 차마 삭제하지 못한 채 장바구니에 두고 창을 닫았다.

SNS를 열어 밤 사이 올라온 것들을 구경했다. 늘 그랬듯 선물 받은 사진, 여행 다녀온 사진, 외식 사진, 자랑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각자의 행복을 뽐내느라 다들 바쁘다. 나도 뭐라도 올려볼까 갤러리를 뒤적거리다 의미 없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췄다. 이번에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서른 살이 되면 내 차도, 집도 있는 건 줄 알았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꿈은 소박해졌고 현실은 무거워졌다. 열심히 살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남은 게 있나 싶어 새벽부터 소주 생각이 나 몸을 일으켜 커피를 탔다. 소주를 즐기시는 아빠가 좋아하시던 믹스커피를 휘휘 저으며 우리 부모님은 어땠을지, 문득 아빠가 보고 싶어 졌다.


의식의 흐름대로 알고리즘을 따라 꾸준히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춘 곳은 남편이 사줬다는 샤넬백 사진도 가족들과 함께 갔다는 호텔 뷔페 사진도 아니었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90세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방송 사진이었다. 방송을 찾아 볼만큼의 성의는 부족해 뉴스기사와 블로그 검색을 했고 충분했다.

삼성은 알아도 애플은 처음 들었다던 90의 나이를 코 앞에 둔 할머니였다. 우연히 커다란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보고 애플 매장에 달려갔다. 가격을 흥정하고 값을 깎아주는 시장에 익숙했지만 컴퓨터를 키는 법 조차 모르는 할머니는 딸이랑 같이 오라는 말을 던지는 직원의 말에 민망해져 단돈 100원 조차 깎아주지 않는 비싼 기계를 사들고 왔다고 했다. 그냥 안 배우시면 안 되냐는 컴퓨터 강사의 말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무료하고 무기력한 삶이었기에 느리지만 성실한 꾸준함으로 그림을 배웠나 보다. 그저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sns에 본인의 그림을 하나씩 올렸다. 할머니는 거침없었고 망설이지 않았다.

당장 할머니의 계정을 찾아 팔로우하고 그림을 하나씩 살펴봤다. 감히 그림을 평가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하나마다 정성과 잔잔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화려한 글이나 효과로 그림을 치장한다거나 해시태그로 사용자들을 유인하지도 않았다. 댓글 하나하나에 마중 나간 ‘고마워요’라는 답장 너머로 어깨를 두들기고 안경을 고쳐 쓰며 그림을 그렸을 할머니를 상상해 봤다.


출처 : 할머니의 인스타그램 @yeoyujaesun


내가 지금 나이가 90을 바라보니까 이걸로 만족하지. 나이가 60대만 된다고 하면 세상에 막 뛰어들 것이여.”


할머니의 인터뷰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40대 중반을 달리는 지금. 언제 나이가 이렇게 먹었나 놀랐다. 뭔가 시작하기에 나이가 많이 걸린다고 생각했다. 평생 먹은 적 없던 영양제를 배부르게 챙겨 먹을 정도로 몸도 예전 같지 않았고, 보험을 정비하다 보면 뛰어오른 보험금에 놀랐다. 지금 뭔가 배우는 건 그저 돈만 버리는 건 아닐까, 배운다고 수익화시킬 수 있는 걸까 하며 나에게 선을 긋고 하지 않을 핑계를 만들어냈다.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가두었다.

할머니의 변화를 보며 반성했다. 분명 현실적으로 많이 부딪혔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함도 누구에게 보여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본인 스스로를 위함이었다. 지금의 나는 할머니 나이의 반 정도이다. 40대면 충분하다. 무언가 시작하기 좋을 나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야겠다.


장바구니를 비우고 노트북부터 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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