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영글 Mar 17. 2024

문창과를 나왔지만 글을 못씁니다.

이제 어디 가서 문창과 졸업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ㅋ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하고, 상상 속에서 지어낸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희뿌연 안갯속에 서있는 채로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더듬거리고 있는 것처럼 머리 속도 눈앞도 흐릿했다. 스무 살 즈음 무엇을 들었는지 어떤 것을 썼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그 시절이 존재하긴 했던 걸까. 어쩌면 망상이었을까.

대학 졸업만 하면 글로 먹고살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때의 호기로움은 현실에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빳빳한 대나무 같은 올곧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현실과 타협해 적당한 직업을 구하고 밥벌이를 하며 지냈다. 전공에 대한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 정도일 뿐이었고 책장 한편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두터운 전공책은 오르지 못할 산의 돌덩어리처럼, 배경처럼 그냥 그렇게 존재하기만 했다.  




결혼을 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오래된 것들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캐리어나 상자에 옷이나 가방 그리고 모아둔 책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기도 하고 한 때는 소중한 보물과 같았던 일기장이나 교복을 입고 있던 소녀들이 주고받은 편지 따위는 모아 한 번에 버렸다. 새 출발을 위해 흑역사나 미련 따위는 버리겠다는 마치 사춘기 그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때의 나는.

결혼 후 임신과 퇴사, 출산, 또 한 번의 출산을 겪는 중에 2번의 전세 만기를 경험했다.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두 아이들의 지분은 점점 늘었고 끝까지 끌어안고 가고 싶었던 책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들춰보지도 않고 소복하게 먼지만 쌓여갈 바에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래된 전공책들은 재활용 폐지함에 던져버리고 비교적 상태가 좋은 책들만 추려 동네에 나눔을 하거나 중고 서점에 가서 헐값에 팔아버렸다. 끝까지 짊어지고 가고 싶었던 미련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끝일 줄 알았다.

채 자라지도 못한 나무는 아무리 깊은 곳에 꾹꾹 눌러버려도 한 번씩 힘껏 고개를 쳐들며 존재감을 뿜어댔다. 잊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듯 뒤숭숭하게 꿈틀거렸다. 미련이고 집착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움직임을 계속 외면할 수가 없어 한껏 우울감에 빠져 허덕이던 날 문득 글을 써야겠다 생각했다.

분명 열심히 일기를 쓰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학교 다닐 때는 꾸역꾸역 독후감도 썼던 것 같은데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내세울만한 학교는 아니더라도 대학 시절 내내 글쓰기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고 쓰기를 반복했었는데 술자리의 안주처럼 취급하던 그 시절이 이제는 먹고 찌꺼기만 남은 그릇처럼 비어버린 나를 조롱했다.

이번에는 이렇게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오프라인으로 글쓰기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온라인으로 몇 가지를 검색해 봤다. 여러 가지 클래스들이 모여있는 앱에서는 웹소설 관련 강의가 주를 이루었고 가격 정도에 맞는 겉핥기 정도였기에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했다. 비교적 인기가 많은 다른 사이트의 강의들은 가격이 부담스러워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여전히 겁이 났다.


다행이다, 꿈은 아니었다.


함께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단톡방에서 누군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내며 대화의 흐름은 문창과 출신인 나를 향했다. 그들의 열정 앞에 부끄러웠다.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하나 싶어 졸업한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학번을 확인해 봤다. 상태란에 적혀있는 ‘졸업’이라는 글자에 망상은 아니었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숨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텅 비어버린 기억의 그릇에 덩그라니 서 있었다.

전공과 상관 없이 이미 책을 출간한 이도 있고 책을 쓰고 있는 이도 있다. 포털에 다수 노출이 된 이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꾸준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있는 그들이었다. 그 앞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등록금을 내주던 부모님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앉아있던 학과 동기들도 아닌 얼굴도 잘 모르는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단톡방을 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쩌면 글쓰기를 가장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대한 건 나였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노트북으로 짓는 밥. 주방에서 쓰는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