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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채 Mar 07. 2024

출산.까맣게 잊은 기억(2)

아이와 함께하기까지의 시간들.

45도로 침대를 세우고 누워서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전날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아 얼마나 당신이 불안했는지 얼마나 당신이 놀랬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걸 계속 듣고 있다. 침대에 딱 붙어 서서 이야기하는데 맞장구를 하지 않으면 잘 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통에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을 해준다. "아빠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큰딸까지 잃으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했다는 엄마의 말에 눈물이 나면서도 가시 돋은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참았다. "나를 걱정한 거야? 아니면 엄마를 걱정한 거야!" 분명 내가 입 밖으로 이 말을 꺼냈다면 엄마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화를 냈을게 분명했다. 신랑은 침대옆 의자에 앉아 계속 나와 엄마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엄마의 계속되는 이야기에 미간 사이가 좁아지려고 할 즈음 왼쪽 쇄골아래쪽으로 처음 느껴보는 통증이 느껴졌다. 앜!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와 신랑이 침대양옆으로 한 사람씩 나란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통증은 멈추지 않고 더 강도가 올라간다. 숨을 쉴 수도 악 하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다. 왼쪽쇄골아래쪽 누군가 풍선을 넣어두고 계속 바람을 넣고 있는 것 같다. 점점 더 풍선이 커져 피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통증이다. 신랑이 의료진을 호출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이 오셨다. 


숨을 아예 쉴 수가 없고 쇄골아래쪽에 위치해 있던 풍선이 옮겨가는 듯 통증 부위가 바뀐다.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다. 배추흰나비가 허물을 벗는 것처럼 상반신이 저절로 뒤틀어진다. 수술부위 통증으로 분명 배에 힘을 줄 수가 없음에도 상체가 움직여지고 의식이 희미해져 갈 즈음 산소호흡기가 콧구멍에 들어온다. 안정적인 호흡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병실이 고요해졌다. 다량의 수혈로 인한 폐부종.. 저산소증.. 일시적인 뼈마디에 가스가 차오른 것뿐이니 안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담당의사 선생님은 나가셨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폭풍 이 휘몰아친 거 같은 오전을 지나 오후시간이 되었다. 아직도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사진으로 밖에 접하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오고 아이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아이를 빨리 만나기 위해 걷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어 꼼짝없이 누운 채로 이틀날오후가 지나갔다. 내일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길 간절히 바라며...


신랑이 찍은 아이사진만을 보고 또 보며 밤이 되었다. 분명 따뜻한 병실인데 오한이 느껴진다. 간호사선생님이 열을 체크하더니 곧장 당직의사 선생님이 모셔왔다. 해열제를 수액으로 맞으며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고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번에는 배와 등으로 통증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수건을 물에 묻혀 몸을 닦아주려고 등에 대는 순간 극심한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수건만 몸에 대었을 뿐인데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비명이 나오다니. 어금니가 깨지도록 진통을 참으며 소리 한번 지르지 않는 나였다. 참는 거라면 일가견 있는 내가 지금껏 참아온 비명을 몰아서 내는 것 마냥 이틀연속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신랑은 며칠 새 야윈 얼굴이다. 출산 후 3일이 지났지만 나는 아이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날밤도 고열에 시달리며 힘든 밤을 보냈다. 담당의사 선생님은 불안해 집에 갈 수가 없다며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호출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시고는 며칠째 병원에 계셨다.


4일 차에 가스는 나왔지만 서서 걸을 수 있는 몸상태는 아니었다. 4일 차에는 참고 있던 모든 눈물이 쏟아져 나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해서 벌을 받고 있는 거 라면 이 벌은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졌다. 몇 달째 우리 가족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나에게 도 화가 났다. 규모가 큰 편의 산부인과였지만 담당의사 선생님이 면회시간이 아닌 시간에 아이얼굴은 볼 수 있게 해 주시겠다며 이동침대로 아이가 있는 곳에 가서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안을 수는 없지만 가까이서 볼 수는 있었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옆에 아이도 누워있다. 몸을 옆으로 움직일 수 없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지만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와의 첫 만남은 너무도 짧았다.눈물이 나와 아이 얼굴이 흐려지는데 눈물도 닦지 못할만큼 통증이 심한상황이었다.그래도 좋았다.잠시라도 한공간에 있었으니.아이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했으니.


분명 뱃속에서 아이는 나왔는데 배가 꺼지기는 커녕  점점 다시 불러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느낌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는데는 8일이나 걸렸다. 배는 출산 전만큼이나 부풀어 올라있었고 매일밤 고열에 시달리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8명의 의사가 나를 눕혀두고 회의를 진행했다. 이런저런 의견이 오고 가는 상황이 화가 났다. 이 병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발 누가 나 좀 멀쩡하게 만들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아이가 이병원에 있어서.. 폐부종은 어느 정도 호전되어 산소호흡기를 뺏지만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했다.


산부인과에서는 매일밤고열에 시달리는 원인을 찾을 수 없고 치료가 불가능할 것 같다며 대학병원에 전원을 요청했다. 퇴원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아이와 집에 가는 상상만으로 버텼던 날들이 다시 기약할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는 친정엄마에게 역시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갑자기 신생아를 안고 이천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아이와 산부인과에서 나와 우리 신혼집으로 가서 아기용품을 챙기고 아이를 돌보았다. 신랑은 나의 입원수속을 마치자마자 엄마와 희찬이를 이천 친정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밤이 되어서야 병원을 왔다.신랑은 그때 어떤마음으로 운전을 했을까. 

비어있는 입원실이 없기에 다인실 감염병동에 입원을 했다. 양옆으로는 폐렴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산후조리는커녕  맨다리에 환자용 치마를 입고 소변줄을 꽂고 병실에 누워 커튼을 닫고 매일 입을 막고 우는 날이 시작되었다.


MRI와 CT 촬영등 각종 검사를 진행하는데 배와 등의 통증으로 모든 것이 힘들었다. 혼자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남자 간호사선생님 두 분이서 나를 안고 이리저리 옮기시고 검사만으로도 지칠 대로 지친 일주일이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매일밤마다 고열은 지속되고 있었다. 눈치 없게도 눈물만큼이나 젖가슴에서는 초유가 흘렀다. 몸을 일으킬 수 없으니 간호사선생님이 유축기로 모유를 짜주셨고 모유에는 위험이라는 스티커가 붙인 채로 폐기물이 되었다. 모유수유를 꿈꿨지만 초유조차 먹이지 못했다.


검사결과는 장기감염이었다. 제왕절개수술 중 소독되지 않은 수술기구를 사용했거나 지혈되지 않아 개복된 상태로 오래 있었기에 생긴 감염으로 추측된다고 하셨다. 이미 시간이 수일 지난 상태라 배안은 온통 염증으로 둘러싸여 배와 등이 부어있었던 것이었다. 염증수치는 평균수치에 2만 배에 달 했다. 복부에 세 개의 구멍을 내고 호스를 꽂고 피고름을 빼는 치료가 시작되었다. 24시간을 병실에 누워 희찬이 사진만 보았다. 사진을 보는 내내 휴대폰희찬이를  만지며 눈물로 얼룩져 희미해지면 환자복으로 눈물을 훔치고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친정엄마에게 수시로 희찬이 사진과 동영상을 요구했다. 갑자기 신생아를 떠안게 된 엄마는 신생아를 보느라 바쁘다며 힘들어했다. 엄마가 힘들다며 전화로 짜증을 내면 나 역시 짜증 섞인 화를 냈다. 난 힘들어도 좋으니 제발 아이를 돌보고 싶었고 아이와 함께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이 세상에서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따른 벌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았고 충분히 받을 만큼 받았으니 제발 이현실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퇴원하고 출산한 산부인과를 가서 묻고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도 이런 생각을 했기에 내가 또 벌을 받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금세 그러지 않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입원한 지 한 달이 되었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검사받고 치료받는 시간 외에는 눈물 흘린 기억뿐이다. 간호사선생님들은 수시로 커튼을 열고 나의 자리에 찾아와 곧 퇴원할 거라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고 같이 눈물을 흘려준 선생님도 계셨다. 감염병동이라 보호자들의 면회가 오후에 1시간밖에 되지 않아 신랑을 보는 1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혼자 희찬이사진을 보며 울고 있는 나에게 매우 감사한 존재였다. 신랑과 헤어지는 매일 저녁 신랑은 눈시울을 붉히고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굽은 허리로 수액폴대를 끌고 병실로 돌아왔다. 


5주를 하루 앞두고 퇴원이 결정되었다. 너무 기뻐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이제 희찬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힘듬이 괜찮다고 느껴질 만큼 감사한 상황이었다. 겨울외투를 챙겨서 신랑이 퇴원시간에 맞춰서 왔고 바로 친정으로 갔다. 엄마와 아빠와 드디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시간. 희찬이를 안고 지금까지의 고통이 꿈같았다. 아니 그간의 힘들었던 시간들이 꿈속인지 지금이 꿈인지 헷갈릴 만큼 기쁜 순간이었다. 밤에 자다가 희찬이가 옆에 있는 지를 몇 차례나 확인을 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배에 힘을 줄 수가 없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을 가야하지만 괜찮았다. 조리원은 애초에 갈 생각이 없었고 친정에서 몸이 회복할 때까지 있을 계획이었다.



친정에 간지 2달이 흘렀을 무렵 희찬이는 곤히 낮잠을 자고 나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갑자기 예고 없이 큰 파도가 몰아치듯 등에 거센 통증이 오기시작하고 몸을 가눌 수가 없었고 소파에서 떨어졌다. 숨을 쉬기 어려웠고 엄마는 119를 불렀다. 제발 입원하는 일만 없게 해 달라며 하늘에 있는 아빠를 찾고 또 찾았다. 검사결과는 C형 간염이었다.

출산당시 수혈받은 12팩 중 1팩이 C형 간염이었을 거라고 한다. 잠복기가 있기에 헌혈자도 C형 간염인지 모르고 헌혈을 했다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당장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고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주일간의 입원치료를 마치고 퇴원을 했다. 교도소에서 나와 두부를 먹듯이 퇴원환자를 위한 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면 뭐라도 했을 것 같다. 희찬이를 데리고 서울의 신혼집으로 왔다.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달라진 것은 뱃속에 있던 아이가 내 품에 있다는 것만 달라졌을 뿐 집은 그대로였다. 6개월간의 힘들었던 여정이 진짜였나 싶을 만큼 우리 집은 평화로웠다.




까맣게 잊은 것 같은 출산의 기억들을 적다 보니 신랑의 건강염려증이 이해가 된다. 나 역시 폐기되었던 모유가 미안해, 영아기 이유식 영양소 분석공부를 이때부터 시작했다. 이유식만큼은 제일 좋은 이유식을 먹이기 위해 영아기 식단과 식품별 영양소에 관한 논문을 쌓아놓고 읽었다. 생후 4개월 된 아이를 앞에 두고 말이다. 모유를 먹이지 못해 건강하지 않으면 어쩌나 했던 염려와 달리 10살이 된 아이는 지금까지도 항생제를 먹을 일이 없었다. 출산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왜 그렇게 울었나 싶기도 하다. 신랑에게 이 글을 쓴다고 말을 했을 때 힘든 기억을 쓰는 게 괜찮냐고 물어왔다. 아마도 그렇게 되묻는 걸 보면 당시 나보다 신랑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눈물만 흘리며 눈물뒤에 숨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울었던 기억밖에 없으니 말이다. 한 번씩 힘든 일이 생겨도 출산 때 보다 더 눈물 흘릴 일이 일인가. 하고 생각을 하면 눈물이 쏙 들어가기도 한다. 현재를 감사할 수 있는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이 글을 쓰는 순간뿐 일지언정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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