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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채 Mar 14. 2024

소꿉놀이.

이상적인 딸이 될수 없음을 깨닫고.

9년 전.. 돌도 안된 아이를 데리고 이유식 매장을 오픈한다고 하니 주위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시어머님은 망조 가 보인다며 매장오픈을 반대하는 문자를 보내셨다.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건지. 대책은 있는지. 무턱대고 직장을 그만둔 것은 아닌지 아들을 타박하고 며느리를 질책했다. 매장 오픈을 하루 앞둔 날까지 당장 계약을 물리라는 말씀뿐이셨다. 경제활동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으신 어머님의 말씀이 우리 부부에게 들릴 리 만무했다. 장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아느냐며 쉽게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 아이가 조금만 더 크고 나서 오픈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 모든 이야기가 우리 부부를 위함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걱정보다는 응원과 격려가 듣고 싶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응원과 격려가 훨씬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몸소 배웠다.


매장오픈을 앞두고 사업자 등록증신청. 영업허가증 신청. 이유식품질검사. 매장인테리어등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신랑이 퇴사하기 전까지는 10개월 된 아이를 안고 혼자 뛰어다니기 벅차 결국 친정엄마에게 일주일간의 도움을 청했다. 2시간 정도 낮에 아이를 봐주면 그 시간에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다. 그때마다 고장 난 CD가 같은 구간만 반복하듯 친정엄마는 매장오픈을 다시 생각해 보라는 이야기를 했다.

손에 물 묻히는 일이 얼마나 고생스러운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화를 냈다. 내손에 물을 묻히는 일을 걱정하는 친정엄마의 말이 신랑에게는 가시방석일 것만 같았다. 시어머님의 망조가 보인다는 말보다 친정엄마의 손에 물 묻히는 일의 고생스러움을 듣는 게 더 고통이었다.


결국은 화를 내야 엄마의 걱정은 끝이 났고 그 지점은 늘 같은 구간이었다.

"유학까지 다녀와서... 그렇게 공부를 해놓고서... 왜 손에 물 묻히는 일을 한다고... 아휴...."


"그만 좀 해! 제발 그 얘기 좀 하지 마. 그런 말 할 거면 그냥 엄마 집에 가. 도와주지 마!"

 

나를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신랑의 불편한 감정이 나에게는 우선시되었다. 사위를 타박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의 말이 남편에게 기분 좋을 수는 없는 말들이었다. 신랑이 그 자리에 없었더라도 그 말은 충분히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 말속 깊은 곳에 딸을 고생시키는 사위를 비난하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고 내가 하려는 일을 비하하는 것만 같았다. 3남 1녀 중 큰딸로 집안에 걱정을 끼치기보다 든든한 큰딸이었다.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컸고 사춘기도 없이 착한 딸이라는 역할을 곧잘 연기했다. 나조차도 속은 걸 보면 꽤나 연기가 완벽했던 모양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빠의 자랑은 스스로 유학자금을 마련하고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한 착한 큰딸이었다. 취직하자마자 진급을 하고 최연소 교육팀장을 맡았다며 자랑을 하고 다니던 큰딸이 몇 년 만에 걱정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갑자기 변한 역할에 나조차도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내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뱉는 엄마의 얼굴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성공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부부의 선택이 옳았다고 틀리지 않았다고 쉽게 생각하고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작용했다.

삐딱한 마음도 들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겠노라.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겠노라. 울분과 설움이 섞인 독한 마음을 먹고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아침 6시 자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매장으로 나왔다. 유모차에서 자다가 깨면 신랑과 번갈아 가며 업고 일을 했다. 조리복을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흰색 조리모자를 쓰고 아기띠를 두른다. 등에 업혀있는 희찬이를 향해 돌아보며 이름을 불러주면 까르르 웃었다. 색색의 식재료들을 도마 위에 두고 칼질을 하는 게 재미있는지 희찬이는 심심해하지 않고 칭얼거림 없이 업혀있다. 등과 목이 아파 올즈음되면 신랑의 등으로 옮겨간다. 이곳이 우리 집 주방이었다면 훈훈한 모습이었을 텐데. 아이를 업고 주방에 있는 신랑의 뒷모습은 주책맞게 눈물샘을 자극하고 결국 한 방울씩 떨어지면 양파 탓을 했다. 9시가 되면 아이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신랑이 어린이집을 보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걸어 나가는 뒷모습 역시 나를 아프게 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일을 염두하고 걱정을 해주었던 지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


우리 부부의 진심이 통했는지 감사하게도 매장은 금세 자리를 잡아갔다. 어머님의 망조의 예상은 빗나갔다. 일손이 부족해 직원을 한 명씩 늘려나갔다. 더 이상 아이를 업고서는 할 수 없을 만큼 바빠졌고 아이를 케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결국 다시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부탁을 하는 입장이었지만 내심 자리 잡아가는 매장에 대한 뿌듯함으로 전화를 했다.


"엄마 우리 너무 바빠. 애기엄마들 입소문으로 매장이 너무 잘 돼서 주문을 다 소화하지도 못할 지경이야. 엄마가 와서 찬희좀 봐줘. 1년만 봐주면 그때는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부탁하는 입장치 고는 당당했다. 엄마도 기뻐할 줄 알았다. 전화기 너머의 1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 아휴.. 그렇게 바빠서 앞으로 애를 어떻게 키우려고! 맨날 나한테 도와달라고 그럴 거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휴우.. 일단 알았어! 다음 주에 올라갈게"


고마운데... 아니.. 물론 고맙다.. 하지만 섭섭했다. 누구보다 엄마가 기뻐해주길 바랐다. 엄마는 길에서 만난 동네이웃이 새로 산 신발을 보이며  편한데 저렴하기까지 하다고 말하면 "잘했네! 잘 샀네! 하며 소녀처럼 박수를 치고 호응을 하는 성향이다. 그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다. 그 이상도 아니었다.


엄마가 서울로 왔다. 희찬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 5시간이나 혼자 집에 있으려니 답답하다고 했다.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엄마가 갑자기 집에만 있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나도 도와줄 겸 아르바이트하는 기분으로 낮에 1시간씩 우리 주방에서 재료손질을 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엄마도 흔쾌히 수락했다. 엄마는 매장 주방에 들어와 조리복을 입고 조리모자와 앞치마를 했다.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 매장주방에서 일한 날이다.


"엄마. 애호박 껍질을 필러로 얆게 벗겨주면 돼."

"애호박 껍질 왤까? 이건 먹어도 되는 건데! "

"어른 먹는 건 나도 그냥 먹지! 애기들은 소화 안될까 봐 껍질도 벗기고 씨도 제거해야 돼.

"이 많은걸 언제 다 까고 있어 아휴 참나."

"그럼 그거 내가 할게! 엄마가 감자 해줘. 감자 새끼손톱 만한 크기로 썰어야 해. 이거 썰어줘."

"뭐 하러 힘들게 그렇게 작게 썰어! 익으면 부드럽게 으깨지는데."

"우리는 애기들 거라서 다 작게 해야 한다니까. 엄마 스타일대로 하면 안 돼! 이유식 매장이라고!"


결국 내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였고 표정 역시 좋을 리 없었다. 엄마의 표정은 나보다 더 일그러져있었다.


"도와주러 왔는데 너는 왜 짜증이야. 아휴 진짜! 애들 소꿉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렇게 작게 하는 거야 답답하네. 정말! 크게 해도 되겠구먼. 일을 아주 사서 해 진짜! 됐어."


엄마는 주방뒤 탈의실에서 모자를 벗어버리고 조리복과 앞치마도 벗었다. 휴대폰을 휙 하고 집어 들고는 문쪽으로 향했다. 1시간을 도와주기로 했는데 5분 만에 일어난 일이다. 엄마의 등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 그래 나도 됐어! 도와주지 마! "

엄마가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서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나의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한마디 라도 엄마에게 더 쏘아붙이고 싶어서 쫓아나갔다. 가슴에서 용암이 끓어올라 입으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주변상가 사람들에게 착한 가면을 쓴 모습만 보여주었지만 이제 들켜버릴 상황이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엄마에 대한 섭섭함만이 가득 차있어서 그 어떤 것도 내 감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엄마가 향한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로 멈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훔치며 엄마는 한걸음 걷고 멈추어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다시 두어 걸음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제야 주방에서 엄마의 불만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가까이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았는지. 아니면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주방에 들어온 적이 없으며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9년이 된 지금까지.

엄마가 우는 것을 보고 나는 발길을 돌려 매장으로 들어와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이상적인 딸이 되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웠다.


나의 몸 여기저기에서 이상신호를 보내올 때마다 엄마는 아직도 한숨을 쉰다. 한숨 안에 어떤 말이 숨겨져 있는지는 너무도 뻔하다. 그렇기에 나 역시 한결같이 대답한다.


"나는 어떤 일을 했어도 이래. 성격이 이래서 하물며 집에 있었어도 몸이 망가지도록 일하는 사람이라고!
엄마 한숨소리가  어디 아픈 것보다 더 싫어!"


엄마의 한숨은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소꿉놀이를 멈추는 그날까지 나는 이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다짐한다. 걱정보다는 응원과 격려를 해주는 엄마가 되자. 한숨은 절대 쉬지 말자. 희찬이가 이상적인 아들의 모습이 아니어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희찬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사랑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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