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출근했던, 작년 3월 첫 수업 날이 생각난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다음 날 아침 입을 옷까지 다 꺼내 미리 다림질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었다는데 우리가 대한민국, 서울, oo중학교에서 만난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비장하게 수업을 시작했다. 교실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질문하고 수업하면서 교탁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오잉? 오른발이 공중에 떠다닌다. 슬리퍼는 교실 바닥에 그대로 딱 붙어있고. 결혼 후 여러 번 이사하는 와중에도 신발장 한 구석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던 통굽 검정 슬리퍼. '언젠가 또 신을 날이 오겠지' 하며 버리지 않고 이사 가는 곳마다 챙겨 다녔다. 세월의 흐름은 이 슬리퍼도 비껴갈 수 없었던 것일까. 투명하고 탱탱했던 내 피부가 탄력을 잃은 10년 동안 인조 가죽 슬리퍼도 이젠 삭아서 발등을 고이 감싸주던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어머머머, 어떡하지. 교무실에 휴게실 알지? 정수기 옆에 거기 의자 아래 선생님 구두 있는데 누가 좀 가져다줄래?” 덜렁거리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교탁 앞으로 이동한 뒤, 누가 좀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 신발 좀 가져다 달라며 부탁하던 모양 빠지던 첫 수업. 저 선생님 좀 허당이네. 덕분에 아이들 긴장도 좀 풀렸을까. 그럼 됐다.
3월이면 새 학기 증후군을 겪는다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이유 없이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무기력함에 학교 가는 발걸음이 무겁고 아침이 오는 게 두렵다. 초등학생이라면 체험학습 신청하고 쉬게라도 하겠지만, 입시를 코앞에 둔 중고생에게는 결석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누군가는 이럴 때 한방소화제가 효과 좋다며 한의원 진료를 권유하기도 한다.
지난 주말, 공룡수목원과 산수유 축제에서 신나게 걷고 놀고 난 후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딸아이가 자기 전 드림렌즈 낀다고 의자에 앉았는데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아, 이 의자 그대로 내일 아침에 교실로 뚝 순간이동 했으면 좋겠어." 우리 딸이 왜 그러지? FM 소녀로 작년까지만 해도 학교 가는 게 제일 즐겁다는 딸이었다. 오늘 너무 힘들게 돌아다녔나? 찻길도 안 건너고 5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라 학교 가는 길이 힘든 건 아닐 텐데. 5학년이 되어 교실이 5층에 있는데 5층까지 올라가는 게 벅찬가? 그게 아니었다. 학교 오고 가는 길이 어색하고 외롭다는 거다. 아직 휴대폰이 없는 우리 아이는 등굣길 어쩌다 친구를 만나면 휴대폰만 보고 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오도카니 있다가 자기는 그냥 먼저 가버린다고.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누구는 이제 인사도 안 하고 간다고.
어제는 저녁 먹으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같은 반에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어서 말을 걸었는데 자기가 뭐 물어보면 대답을 안 한다고. 집도 같은 방향이라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다른 길로 먼저 휙 가버렸다고 한다. 낯 가리고 수줍음 많은 친구여서 그런 거 아니냐고 물으니 다른 친구들하고는 엄청 활발하게 잘 논단다. "그 친구가 우리 딸을 아직 잘 몰라서 그래. 친구들 이야기 잘 들어주고, 배려심 많고, 뭐든 열심히 하는 연아 모습 보고 친구들이 다 좋아했었잖아. 올해 처음 보는 친구인데 걔는 왜 그런데? 혹시 우리 딸 질투하는 거 아니야? 친구가 옆에 와서 이야기하는데 무시하는 거 진짜 별로다. 걔 인성이 말이야. 그런 아이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마. 엄마가 이야기했었지? 1:2:7 법칙말이야. 네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이유 없이 너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 그건 네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머지 9명을 네 편으로 만들면 돼. 친구들 말에 항상 귀 잘 기울이고, 잘 도와주고, 성실하고, 착하게. 알겠지?" 아이를 위로하려 했는데 내가 겪은 것처럼 막 흥분하여 다다다 내뱉는다.
새 학기 증후군의 대부분은 친구 관계 때문 일 것이다. 나와 맞는 친구는 누굴지. 나를 괴롭히는 친구는 없을지. 요리조리 눈알 굴리며 탐색전을 벌인다. 나의 선택이 아닌 외부의 선택으로 한 자리에 모인 같은 반 친구들. 마음 맞는 친구들하고만 함께 할 수 없음이, 나와는 다르고 싫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친구와도 함께 1년을 보내야 함이 힘든거겠지. 먼저 미워하지는 말자. 네 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친구들 아껴주고 도와주며 지내는 모습 보이면 그 아이도 너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거야. 그 아이가 정말 질투심에 그런 거라면 그건 네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냥 잊어버려. Forget about it! 너를 믿고 인정해 줄 친구들은 분명 있을 테니까.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거 알지?
올해도 출근한다. 학교 예산이 줄어 작년 보다 시수가 줄긴 했지만 단장하고 나갈 곳이 있으니 감사하다. 첫 수업 시간부터 배 아프다고 수업 참여도 제대로 안 하던 학생이 그 다음 주에는 내내 잔다. 슬쩍 다가가 물었다. "어젯밤에 뭐 했니? - 엄마랑 얘기하다 늦게 잤어요." "무슨 얘기했는데? - 폭력사건이 있어서요." "응? 네가 때린 거야, 아님 맞은 거야? - 제가 때렸는데요." 어.. 어... 때리면 안 되지. 왜 그랬어~~~!!!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당황해서 급히 수업을 재개했다. 수업하기 싫은 티 팍팍 내지만 묻는 말에는 툭툭 잘 대답해 주는 그 아이.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다. 새 학기 증후군이 아니라 사춘기 증후군을 겪고 있는 듯한 학생. 그동안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거니? 선생님이 너의 친구가 되어줄게. 올해 선생님의 관심 1호다.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