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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06. 2024

전지적 사서 시점

만화책으로 열리는 독서의 문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학년별 학급이 추가되어, 학생과 교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졌다. 도서실의 문턱을 낮추고 이용자들에게 친밀한 공간이 되기를 바라 왔던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선생님, 학부모 운영위원회를 도서실에서 해도 될까요?”

“그럼요, 몇 분 정도인지 말씀해 주시면 미리 자리 만들어 놓을게요.”

“인성부 회의를 도서실에서 해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언제쯤 오실 건가요?”

“학생들 창체 동아리 모임을 도서실에서 하면 너무 시끄러울까요?”

“미리 일정 알려주시면, 공지해놓을게요. 아이들도 이해할 거예요.”

다른 일정과 겹치지만 않는다면 무조건 오케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도서 대출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서실 문을 열면, 3학년 선배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문제집을 풀고 있다. 숨통을 트기 위해 도서실을 찾은 아이들은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용기 내어, 도서실에 들어온 학생들은 눈치껏 발소리를 조심하고, 내게 던지던 시시한 농담도 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더 이상 도서실에서 편하게 책을 읽거나 조용히 수다를 떨 수 없음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정독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자연스레 도서실을 정독실 삼아 이용하기 시작했다.




3학년 선배들의 근엄함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대책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웹툰 도서 전시’를 기획했다. 다른 학교 사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통해 인기 웹툰을 조사하고, 약 60권 정도의 웹툰 도서를 구매했다. 개인적으로 만화책 구매를 지양하는 편이었다.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비교적 만화는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많았기에, 나까지 힘을 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선생님, 전지적 독자 시점 PART2 3권 반납 예정일이 언제예요?”

“OO까진데, 혹시 다 읽었는지 한번 물어볼게.”

“PART3 4권 누가 빌려 갔어요? 왜 이렇게 빨리 안 읽는 거예요?” 

“빌려 간 지 이틀 밖에 안됐어. 이번 주까지는 기다려보자.”



웹툰 도서 전시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고, 심지어 그중에는 도서실을 처음 이용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진작에 만화책을 더 많이 구입했어야 했나? 꼰대 같은 내 모습이 도서관 문턱을 높였구나.’ 아이들을 위한다며 생각했던 것이 자기만족이자 아집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학생들이 도서실을 찾게 하고, 독서 습관을 기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복잡한 고민이 있었지만, 어쨌든 당장 급한 불은 껐다.




웹툰 도서 전시의 꽃은 『전지적 독자 시점』이었다. 이 책은 2018년 1월부터 연재되어 2020년 2월까지 551화로 완결된 인기 웹 소설이다. 이후 지금까지 웹툰으로 각색되어 연재되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 ‘김독자’는 자신이 10년 넘게 즐겨 읽던 소설이 어느 날 현실이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고, 그가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원하는 결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전독시’라는 말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의 어떤 매력이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사실 이 책은 웹툰이 아닌 ‘그림 한 점 없는 줄글 책’으로 구매했다. PART1 8권, PART2·3 6권, PART4·5 6권으로 총20권을 만화책으로 사려니 손이 떨려서 결국 줄글로 된 책을 샀던 것인데, 웹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책이 반납되자마자 대출이 되어서 거의 서가에 꽂혀있지 못할 정도였다.



300페이지만 넘어가도 읽기를 포기하는 학생들에게 20권의 장편소설을 읽어내는 힘이 있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당황스럽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만화책을 지양하려던 내 아집을 크게 반성한 후인지라, 현재 작가들이 잘파세대의 흥미나 관심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건 아닌가 하는 우려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걸 하루 만에 다 읽었다고? 무슨 내용인지 다 파악한 거야?”

“그럼요. 이미 웹툰으로 봤던 이야기라, 어렵지 않았어요.”

‘유레카!’ 웹툰을 접했던 경험이 긴 글을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아이들을 책 읽는 즐거움으로 유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자꾸 새어나오는 미소를 애써 숨겨가며 『달빛 조각사』와 『나 혼자만 레벨업』을 수서 목록에 추가했다.  




“선생님도 꼭 읽어보세요. 캐릭터도 반전도 최고예요!”

흥분된 아이들의 목소리가 도서실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 호들갑을 떨며 책을 추천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기대하며 1권을 집어 들었다. 아이들이 말했던 대로 다양한 에피소드가 조합되어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었고, 이는 없던 집중력도 생기게 했다. 각 회당 분량도 많지 않은 편이어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었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흥미진진한 전개는 ‘스낵컬처(스낵처럼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 등 짧은 시간에 간편하게 문화생활을 즐기는 트렌드)’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수년 동안 끊임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삶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감시간과 마감일을 지키며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키고,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의 시간을 가졌을까. 이야기의 흐름을 유지하고, 캐릭터를 개발하며, 신선한 반전을 선사하기 위한 노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 더욱이 독자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피드백을 수용하여 스토리를 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다짐해 본다. 나 또한 끊임없이 스낵컬처를 쓰는 사람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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