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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Apr 27. 2024

벽을 만드는 힘도 허무는 힘도 우리 안에 있다.

벽을 넘어서는 두려움과 호기심의 그 사이에서 

‘이 작가의 글은 계속 읽고 싶어.’

내 영혼에 말을 걸어주는 글을 만날 때면 망설임 없이 ‘구독’ 버튼을 누른다. 그녀는 내 구독 작가 중 한 명이다. 세상에! 알고 보니 그녀는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그림책에 더 푹 빠져 있는 듯한 그녀는 최근 그림책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오늘의 그림책은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빨간 벽』이라는 책이다. 

“사랑아, 곧 시작해. 오늘은 엄마가 진짜 좋아하는 『빨간 벽』이라는 책이래.” 

“엄마는 진짜 좋아하는 책이 도대체 몇 개야?”

딸아이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옆자리에 앉는다.


『빨간 벽』은 빨간색 벽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살고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이다. 그 벽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어디까지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빨간 벽은 당연한 듯 그들의 삶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작은 생쥐는 벽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다른 동물들이 벽 넘어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생쥐는 벽 너머를 향한 호기심을 접지 않는다. 어느 날 생쥐는 벽 너머 세상에서 온 파랑새를 만났고, 파랑새와 함께 벽 너머의 세상을 보게 된다. 상상도 못했던 아름다운 색깔들이 있는 세상이다. 생쥐는 빨간 벽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친구들에게 알린다. 동물들은 함께 빨간 벽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다. 


빨간 벽 너머를 궁금해하는 생쥐에게 동물들은 말한다.

“벽은 우리를 지켜줘. 저 바깥쪽은 위험해.”

겁 많은 고양이가 말했다.

“저 벽은 오래전부터 있었단다. 이제 내 삶의 일부야.”

삶에 순응하는 할아버지 곰이 말했다.

“넌 질문이 너무 많아.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러면 나처럼 행복해질 테니까.”

현재가 만족스러운 여우가 말했다.

“벽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냥 커다랗고 시커먼 없음이 있지.”

으르렁 소리마저 잃어버린 무기력한 사자가 말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양이, 곰, 여우,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보냈던 시간이 있을 것이다. 내 태도와 행동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나 또한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동물들의 표정을 보면서 다양한 얼굴이 떠올랐다. 한때는 그들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각자 자신만의 이유와 사정으로 동물들처럼 변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만의 삶이 다가오니, 가슴 한켠이 아렸다. 그들에게 생쥐와 같은 존재가 되어 주고 싶다. 먼저 내 삶에서 주저하고 있는 빨간 벽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벽 너머에 있는 놀라운 가능성에 대해서도 많이 상상해야겠다.      


생쥐만 파랑새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동물들도 파랑새가 벽 너머에서 날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말도 안 된다며 믿지 않았다. 생쥐는 용기 있게 말한다.

“파랑새야, 날 벽 너머로 데려가 줄 수 있니?”

이 한마디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생쥐라고 해서 벽 너머의 세상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동물들이라고 해서 벽 너머의 세상이 궁금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두려움과 호기심은 늘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당긴다. 어쩌면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도전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벽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된 생쥐는 놀랍게도, 처음부터 빨간 벽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빨간 벽은 우리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현실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동물들이 벽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벽을 통과해서 벽 너머의 세계로 가는 것으로 표현했다. 때로는 우리가 진실로 여기는 것이 항상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생각과 신념은 우리가 주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벽을 만드는 힘도 벽을 허무는 힘도 우리 안에 있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경험을 환영한다면 우리 안의 빨간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림책을 읽는 내내 유독 아픈 손가락이 있었는데, 바로 사자이다. 다른 동물들이 모두 생쥐를 따라 벽 너머의 세상으로 넘어왔지만, 사자는 홀로 벽 안에 남아 있었다.

“엄마, 이 사자, 우울증 아니야?”

사자의 무기력한 표정과 태도는 졸지에 우울증 환자로 만들었다. 무엇이 사자를 으르렁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태로 이끌어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여러 상황들로 짐작할 수 있었다. 


무기력한 사자를 보면서 사람들의 손에 의해 길들여지는 코끼리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코끼리를 훈련시킬 때, 붙잡은 아기 코끼리를 작은 나무를 기둥 삼아, 발목에 가느다란 줄을 묶어 놓고 훈련을 시킨다고 한다. 작고 약한 아기 코끼리는 도망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커다란 어른 코끼리가 되어도, 줄을 끊고 도망가지 않는다. 충분히 밧줄을 끊고 도망갈 힘이 생겼는데도 말이다. 줄은 코끼리의 발이 아니라 마음을 묶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묶여서 으르렁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사자는 혼자 힘으로 나올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림책의 마지막은 사자가 벽을 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마도 다른 동물들이 끊임없이 사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나를 늘 응원해 주는 남편의 따뜻한 미소가 떠오른다. 시험을 앞두고 도서실에서 함께 공부한 것들을 나누는 학생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독박육아를 걱정하며 반찬을 챙겨다 주는 고마운 손길의 따스함이 전해진다.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하는 글 벗들의 지지에 힘이 난다. 연대는 우리를 더 용기 있게 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벽들을 만들어 갈 것이다. 벽들은 외부에도 내부에도 있다. 일시적으로는 그 벽 안에서 안정감을 찾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벽은 그냥 두면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고, 언젠가는 넘어야만 한다. 우리 모두에게 고양이, 곰, 여우, 사자와 같은 모습이 있는 것처럼, 생쥐와 파랑새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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