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저녁, 퇴근 후 딸아이를 데리고 부랴부랴 교회로 향한다. 저녁 성경 공부를 시작한 지 세 달째다. 흔들리는 차 뒷좌석에서 김밥을 욱여넣고 있는 딸아이에게 미안해서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고통스럽다. 말씀과 내 삶의 거리감 때문이다. 뒷받침되지 못하는 내 삶이 부끄러워 달아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 어떤 말씀은 머리까지는 도달하지만, 가슴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나의 결점이 스포트라이트 받는 순간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오늘도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주 과제는 유언장을 써 오는 것입니다.”
산 넘어 산이다. 괜히 시작했나 싶지만, 딸아이가 지켜보고 있으니 포기할 수도 없다. 남길 재산은 없으니,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진부한 말만 끄적인다. 펜이 획을 그을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반 페이지를 겨우 채우고 펜을 놓은 뒤, 소파에 몸을 누인다. 피로와 감정의 무게에 눈이 감기고, 소파의 폭신함에 피로가 녹아내린다. 한숨은 곧 편안한 숨결로 변했다.
내쉬는 숨결을 따라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가 마음을 스친다.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
마종하 시인 덕분에 유언장의 남은 페이지를 채웠다.
시인은 딸에게 ‘관찰하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관찰은 ‘보다(觀)와 살피다(察)’가 결합된 말이다.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오랜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찰하는 사람’에 대한 그림책이 있다.
『하루 거리』는 김휘훈 작가가 4년 동안 구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하루 거리는 말라리아의 일종으로 ‘학질’을 부르던 옛말이다. 6.25전쟁 전후로도 성행했었는데, 굶주리거나 위생이 나쁠수록 많이 걸렸다고 한다. 하루는 아프고 하루는 괜찮기를 반복해서 ‘하루 거리’라고 불렀다.
그림은 수묵화로 그려져 있어, 할머니 세대의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책 표지에는 잔뜩 헝클어진 더벅머리 소녀 ‘순자’와 단발머리 소녀 ‘분이’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둘 다 썩 반가운 표정은 아니다. 심지어 더벅머리 소녀 순자는 당황한 듯한 표정이다. 면지를 한 장 넘기면 표지를 줌 아웃 한 듯한 장면이 나온다. 분이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반면, 순자는 혼자 있다.
“엄마, 이 언니는 지저분하고 가난해서 친구들이 없는 거야?”
더벅머리에 헤진 검정치마를 입고 있는 순자를 보며 딸아이가 말했다.
“글쎄. 옷은 그렇다 쳐도 더벅머리인 걸 봐서는 자기를 잘 돌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
분이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순자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이 언니는 놀면서도 계속 순자 언니를 쳐다봐. 순자 언니가 마음이 쓰이나 봐.”
분이는 순자와 말 한마디도 나눈 적 없지만, 계속해서 순자를 관찰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간접적으로 순자의 삶을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경험은 순자의 삶의 처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순자가 외롭지 않을 리 없다.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는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부모님이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만 같아 비참하다. 자신에게만 찾아오는 듯한 불행에 화가 난다. 분이는 순자를 관찰하면서 그녀의 삶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를 함께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순자가 우물 속을 뚫어지게 쳐다본다든지, 달구지 위에 맥없이 누워 있다든지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분이는 이러한 순자의 행동에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동안 관찰했던 순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책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대신 처음에는 분이 혼자 순자를 쳐다보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친구들까지 함께 순자를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한 명으로 시작된 순자에 대한 관심이 친구들에게로 확산되었다.
한 사람의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가져온 사례는 많다.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시위와 열정적인 연설은 사람들의 인종 갈등에 대한 태도와 인권 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스웨덴의 기후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은 사람들의 환경 보호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소비 패턴과 정책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싸웠던 ‘넬슨 만델라’의 노력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 체제의 붕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친구들은 순자가 하루거리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도우려 한다. 힘없이 멍하니 누워 있는 순자를 관찰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순자의 큰아버지가 나타나, 호통을 친다.
“숨어서 빈둥거리고 앉았어? 가서 물이라도 길어오지 못해!”
짐작만 했던 순자의 삶을 실제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친구들은 순자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인지하게 되고, 이후로는 ‘관찰자’에서 순자의 삶에 직접 관여하는 ‘참여자’가 된다. 수동적인 사람에서 능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한 사람의 관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 친구들은 순자의 고통에 직접 들어가,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삶 속에서 관찰자와 참여자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관찰자와 참여자의 역할을 조절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거나, 타인의 삶을 존중해야 할 때, 또는 개인적 휴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또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자 할 때는 참여자로서의 태도가 필요하다. 자기 돌봄의 관점에서도, 타인과의 소통적인 관점에서도,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되돌아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삶이 다양한 상황과 변화무쌍한 순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