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 관찰
분이는 순자와 함께 약수터에 가고, 거기서 물 한 바가지를 떠 놓고 소원을 빈다. 순자의 하루거리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데, 순자는 옆에서 죽게 해달라고 빈다. 분이는 순자가 너무 아파서 죽고 싶어 한다며,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친구들은 걸레를 던지거나, 냄비를 시끄럽게 두드리거나, 더러운 화장실에서 달걀을 먹게 하는 등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순자의 하루거리 병이 나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순자를 돕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순자 사이에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쌓인다. 친구들의 기상천외한 방법은 순자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었고, 순자는 친구들이 자신을 돕기 위해 마음과 시간을 쏟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꼈을 것이다. 순자는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발견한 듯 안도감을 느낀다. 그렇게 순자와 친구들은 서로 연결되어 갔다.
하지만 친구들의 노력에도 순자의 병은 낫지를 않는다. 친구들이 포기할 즈음, 분이는 순자에게 묻는다.
“순자야, 너 참말로 죽고 싶으니?”
분이는 순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해한다. 그러고는 친구들과 함께 가짜 약을 만들어 순자에게 주며, 진짜 죽는 약이라고 말한다.
“엄마, 거짓말이라고 해도, 죽는 약을 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9살 딸아이가 생각하기에도 죽음은 가짜 약을 만들어 낼 만큼 가벼운 단어가 아니었나 보다.
“그러게. 왜 가짜 약을 만들어서 건네었을까?”
순자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고 있음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수도 있고, 순자가 자기 삶의 소중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또한 순자가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수도 있다. 명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순자가 진짜 죽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으며, 어떻게든 순자에게 희망과 새로운 시작을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가짜 약에는 순자를 향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담겨 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빈 약봉지를 옆에 두고 곱게 누워 있는 순자의 모습이 나온다. 아무런 말도 없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겨우 쌓이고 있는데, 친구들이 죽는 약을 건넸다. 약을 먹을지 말지 고뇌하는 고통의 시간을 얼마나 가졌을까? 스스로 자신의 삶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절망감의 무게는 어느 정도였을까? 친구들의 의도를 알 리 없는 순자는 또다시 버림받은 것 같다. 더 큰 혼란과 외로움과 고립에 빠졌을 것이다. 어린 소녀가 짊어지기에는 너무 버겁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흔히 ‘죽을 용기로 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그들의 고통의 무게에 비하면 너무나 가볍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를 자책하게 한다. 그것은 ‘관찰자’로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순자의 친구들처럼 ‘참여자’로서의 태도가 필요하다. 공감을 넘어 ‘행동’하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내 시간’을 내주어야 한다. 그들의 말에 경청하고 함께 울고 함께 걸으며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엄마, 순자 언니가 정말로 약을 먹은 거야? 언니는 진짜로 죽고 싶었나 봐. 죽을 만큼 힘들었나 봐.”
딸아이의 두 볼이 붉게 달아오르고 목소리가 떨렸다. 커다란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상상도 못했던 전개에 많이 놀란 듯했다. 내심 순자가 약을 먹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죽고 싶다는 말을 그저 많이 힘들다는 표현으로만 받아들였거나, 순자가 약을 먹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이튿날 순자는 약을 먹었는데도 안 죽었다며 친구들에게 다가왔다.
“야야. 너희들이 준 약 먹었는데... 안 죽어.”
너무 순수해서 아프게 다가오는 이 말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순자는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표현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동안 순자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었다. 친구들의 노력은 순자가 마음을 열고 소통할 수 있게 했다.
“다행이지 뭐야. 너 죽었으면 우린 어쩔 뻔했니?”
친구들은 가짜 약이었다고 말하는 대신, 네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네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시켜준다.
그날, 순자는 친구들과 처음으로 해가 저물도록 놀았다. 그리고 다음날 순자는 하루 거리가 별똥처럼 뚝 떨어졌다. 순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으로 하루거리 병에서 벗어난다. 외적 환경은 바뀌지 않겠지만, 고립과 외로움의 내적 환경이 바뀌었다.
나태주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가 있다. 제목은 『풀꽃』이다. 그냥 보기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풀꽃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사랑스러움과 예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나는 자세히 보고 오래 보고 있는가? 오늘의 삶의 속도가 너무 빨라, 오로지 나에게만 몰두해서 정신없이 달려야 하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깊이 경청하거나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고 가볍게 듣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흐르는 물에 우리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삶의 속도에 쫓겨 분주할 때, 본질적인 것을 놓치기 쉽다.
그림책의 마지막 뒤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오늘은 어떻게 보냈어. 별일 없는 거지? 이따 갈게. 우리 또 같이 놀자.”
주위에 순자처럼 다리를 절름거리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웅크리고 있거나 맥없이 누워 있는 사람은 없는지 ‘관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