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엄마, 책 그만 보고 나랑 놀면 안 돼?”
“여태 사랑이랑 놀았는데, 또 놀고 싶은 게 있어?”
딸아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푸른 하늘이나 할까?”
그저 노래에 맞춰 손뼉을 치는 간단한 놀이였다.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누려도 될 법한데, 딸아이는 여전히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눈치다. 결국 책을 덮고 나면, 딸아이는 딱히 나와 놀지도 않고 자기 방에 들어가 만들기 놀이를 시작한다. ‘이럴 거면서 굳이 책 읽는 시간을 방해해야 했을까?’ 지친 일상 속 유일한 위로가 되는 소중한 시간인데, 그 시간마저 빼앗기고 나면 딸아이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을 그린 그림책이 있다. 『곰씨의 의자』는 곰씨와 토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곰씨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그러나 토끼 가족이 점점 늘어나면서, 곰씨의 조용한 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불편한 마음이 든다. 곰씨는 직접 불편함을 표현하지 못한 채,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의자에 똥을 싸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지만, 결국 비가 내려 실패로 끝난다. 그러다 곰씨는 몸살로 쓰러지고, 토끼 가족은 그를 정성껏 돌본다. 정신을 차린 곰씨는 마침내 토끼 가족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앞표지는 푸르스름한 회색 배경 위에 하얀 곰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곰은 편안히 앉아 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도 어딘가 약간 언짢아 보인다. 활기찬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진 토끼들의 모습은 하얀 곰의 고요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그는 책을 들고 있지만, 어딘가 불편한 듯하다.
면지를 넘기면 곰이 걸어가는 모습이 있다. 한쪽 어깨에는 가방을 메고, 한쪽 손에는 곱게 접은 담요를, 다른 한쪽 손에는 작은 가방을 들고 있다. 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단정한 모습이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인 듯하다. 발걸음마저 차분해 보이는 곰씨는 정적이고 규칙적인 삶을 지향하는 듯하다.
햇살 좋은 날, 곰씨는 기다란 벤치 한쪽에 앉아 시집을 안고 햇살을 즐기고 있다. 다른 한쪽 끝에는 곰씨의 소지품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벤치 앞에는 하얀 꽃 한 송이가 핀 화분이 자리 잡고 있다. 곰씨는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때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때, 세계를 여행하는 탐험가 토끼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지나간다.
“몹시 지쳐 보이는군요. 누추하지만 제 의자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곰씨와 탐험가는 함께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곰씨는 토끼가 겪은 모험담에 흠뻑 빠져든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곰씨는 자신의 물건을 자기 쪽으로 챙겨 간다. 화분과 찻잔 등의 소지품은 곰씨 쪽으로 정리되어 있고, 토끼 쪽에는 토끼의 물건만 있다. 작가는 곰씨 쪽을 하얗게, 토끼 쪽을 빨갛게 표현하여 더 대조적으로 보이게 한다. 토끼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었지만, 곰씨는 여전히 자신의 영역과 토끼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곰씨는 자신의 공간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곳에서 개인적인 안정을 찾았다. 외부의 간섭 없이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회복하고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인 것 같다. 특히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시간은 곰씨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내면의 성장을 도모하는 중요한 시간인 듯하다.
이어서 조용한 마을에 살던 무용가 토끼가 슬픔에 잠긴 채 지나간다. 사뿐사뿐 춰야 할 춤을 깡충깡충 추었다고 마을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탐험가 토끼와 무용가 토끼는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숲속에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곰씨는 진심으로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얼마 후, 토끼 부부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났다.
“안녕, 아가야!”
곰씨는 반갑게 인사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또 태어나자, 곰씨는 차를 즐기기 힘들어졌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게 존재했던 곰씨의 영역을 침범하며 곰씨의 차를 쏟기도 한다. 곰씨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의자 반대쪽의 토끼들은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다. 아이들이 더 늘어나면서 곰씨는 음악을 감상하기도 어려워졌다. 빨간 토끼들은 그림책 페이지 곳곳을 누비며 활기를 뿜어냈다. 곰씨의 공간은 점점 사라져갔고, 곰씨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곰씨의 어두운 표정을 따라 화분의 하얀 꽃잎도 축 처진다. 그림책을 자세히 보면, 화분의 하얀 꽃은 곰씨의 기분에 따라 활짝 피었다가, 축 처졌다가, 잎이 오므라들기도 한다. 이 꽃은 마치 곰씨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곰씨가 화분을 왜 소중하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 화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위로받는다. 자신의 감정에 공감하는 존재인 화분과 깊이 연결된 곰씨는 화분에 깊은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다. 화분 속 하얀 꽃은 그가 느끼는 감정의 동반자인 것이다.
“곰씨가 좀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토끼들은 눈치를 못 챈 것 같지?”
곰씨의 입장을 통해, 엄마인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딸아이에게 물었다.
“곰씨가 우울해 보여서, 토끼들이 곁에 있어 주려고 한 것일지도 몰라. 나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친구가 있으면 같이 놀자고 하거든.”
딸아이는 곰씨가 우울해 보이는 것을 보고 토끼 가족이 그의 곁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대로, 토끼 가족은 곰씨를 즐겁게 해준다고 생각하고, 곰씨가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다. 또는, 토끼들은 과거 곰씨가 친절하게 자신들을 맞아준 경험이 있어서, 곰씨가 자신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긴다고 오해했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다 보니, 곰씨의 실제 마음을 깊이 관찰하지 못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곰씨는 토끼들의 관심보다는 자신의 공간과 개인적인 시간을 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곰씨의 기대와 달랐다.
“잠시만요, 저 .... 자리가... 그게 아니고 책이...”
곰씨는 늘 앉아있던 의자에서 맨 끝자리로 밀려, 겨우 의자 끝에 걸치고 앉을 수 있었다. 나머지 자리는 모두 토끼네 가족이 차지하고 있다. 곰씨는 얼굴이 찡그러졌지만, 이런 곰씨의 표정을 무시한 듯, 토끼들은 여전히 매일 곰씨를 찾아와 함께 즐긴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가운데 곰씨만은 전혀 즐겁지 않은 모습이다. 하얀 꽃도 곰씨와 함께 움츠러들었다.
“저 정도면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딸아이는 곰씨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곰씨의 이런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사랑이도 싫다거나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지?”
“있지. 같이 놀고 싶지 않은 친구가 놀자고 하거나, 더워서 나가기 싫은데 밖에서 놀자고 할 때.”
“그럴 때 사랑이는 어떻게 해?”
“웬만하면 같이 하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 것 같을 때는 싫다고 말해.”
딸아이의 솔직함과 용기가 부러웠다. 어른이 되면서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압박에 무뎌져, 'No'를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할 말을 다 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자기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도 적다. 업무적인 팀워크를 위한 모임이나 불편한 사람들과의 약속들이 많지만,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박으로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바쁜 일상 속에서 때로는 가족 모임도 부담이 될 때가 있지만, 상처를 주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대화의 기술, 직장 생활에서 관계를 잘 맺는 법, 건강한 인간관계에 대한 책과 강의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솔직함과 용기가 때로는 자신을 더 잘 지키는 힘임을 마음 깊이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