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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운명이 되는 곳

by 이음

“한 번 만나면 우연, 두 번 만나면 인연, 세 번 만나면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 운명이란 특별하고 드문 일인 줄 알았는데, 여기선 운명이 그저 일상이다. “거제에선 한두 명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섬이라서 그런지,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촘촘히 얽혀 있다. 마트, 학교, 동네 카페, 병원, 미용실. 어디를 가나 아는 얼굴을 자주 마주친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두 명 건너면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다들 촘촘한 관계망 속에 엉겨 있다.

공연을 보러 가면 아는 사람 20명쯤은 쉽게 눈에 띄고, 예매를 따로 했는데도 앞뒤 좌석에서 만나기도 한다. 목욕탕에서 지인과 마주치는 건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딸아이 친구 생일파티에서도, 예고도 없이 아는 얼굴을 만난다. 자주 가던 카페 주인의 딸을 학교 도서부에서 만난 적도 있고, 독서 모임 회원을 모집하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워터파크에서 학교 남학생 무리와 맞닥뜨린 뒤로는 아예 워터파크를 끊어버렸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우연이 인연이 되고, 그 인연이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진다.


“얼마 전에 네일 받으러 갔는데, 거기서 눈썹 반영구도 하더라. 다음엔 한꺼번에 하려고.”

“가게 이름 뭔데? H 아니가? 거기 유림이 엄마가 하거든.”

“맞다, H! 거기 유림이 엄마가 하는 데가? 다온이랑 같은 반 유림이?”

“어, 맞다. 유림이 엄마가 반영구하고, 시누이가 네일한다. 시누이랑 동창이라던데?”

“시누이랑 동창이었다고? 친한 갑다. 가게도 같이 하는 거 보면. 그나저나 거제가 진짜 좁긴 좁네.”

“언니야, 나는 결혼하려고 보니까, 엄마랑 시어머니가 절친이더라!”

‘대박!’ 거제에선 특히 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려 해도, 언제나 ‘누군가’와 마주칠 준비를 해야 했다. 누군가가 내 뒤를 지키는 듯한 기분이 불편했다. 가끔은 친절한 인사나 가벼운 대화도 피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좁은 관계망 속에선, 작은 일도 삽시간에 퍼지고, 사소한 행동도 금세 이야깃거리가 된다. 나중엔 내게까지 돌아올 테지. 말에 더 신중해야 했고, 특히 개인적인 문제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할 때는 더 조심스러웠다. 덕분에 속이야기는 점점 더 입 밖에 내기 힘들어졌다. ‘일단, 편 가르기에 휘말리지 않아야 해.’ 사람들 사이에서 피곤한 감정을 피하려, 자연스레 슬며시 적당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당한 거리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딸아이, 이번에 학교 들어가죠? 근데, 엄마 학교 출근이 좀 이르지 않아요?”

‘학교에서 일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궁금하지 않았다. 답이 뻔하니, 새로운 것도 없었다.

“아, 네, 그래서 휴직하기로 했어요.”

“아이고, 뭐 하러 그래요? 우리 큰애랑 아침에 같이 가면 되는데. 8시 20쯤에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가면 돼요.”

그녀의 배려에, ‘내 직장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찰나의 찜찜함은 일순간에 날아갔다. 그런 배려가 아직 편하지 않아, 거절했지만, 불편했던 관심과 부담이 고마움과 든든함으로 변했다. 어쩌면 이 작은 손길들이 나를 이곳에 머물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을 예의로 여기고 살았다. 너무 가까워도 불편하고, 지나친 관심과 간섭도 피차 부담이 된다. 서로 알더라도 모른 척하는 게 더 편할 때가 많다.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니, 예기치 않게 갑자기 훅 들어오는 손길이나 요청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몇몇 사람들의 성향 때문일까, 아니면 이곳 분위기 탓일까, 헷갈리기도 했다. 분명한 건, 이 모든 게 개인적인 성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만의 특유의 분위기가 한몫하고 있다.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돕는 분위기가 생겼다. 비슷한 생활환경과 경험을 공유하다 보니, 마음의 거리도 금세 가까워진다. 촘촘히 얽힌 관계망 속에서 사람들은 의존하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독감이나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면, 병원에서 해열제가 부족해도, 집에 남아 있는 약을 나눠 쓰며 서로를 챙긴다. 도시에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여기선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주말에 일하는 아빠들이 많다 보니. 엄마들은 공동육아로 힘을 모은다. 기러기 아빠들은 주말이나 저녁 시간에 모여, 그리움을 나누며 힘을 얻는다. 서로의 빈 곳을 조금씩 채우며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살아간다.


독박육아 워킹맘으로 살면서, 이웃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누군가의 도움을 거절하는 건 사치였다. 내가 도움을 청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부탁을 어려워하는 걸 알았던 듯.

“이번 주말에 그림책 강의 있댔제? 다온이 내가 봐줄게. 강의 잘하고 온나.”

“요즘 기본 4시간 대기다. 언니 퇴근하고 가면 늦으니까, 내가 다온이 데리고 병원 갔다 올게. 톡으로 생년월일 보내라.”

“다온이 열난다며? 일단 이걸로 교차 복용 하면서 버텨봐라. 내일 아침에 일찍 병원 가고.”

이웃들이 보여준 배려와 친절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고비마다 나를 구해준 동아줄이었다. 특히 딸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절실할 땐, 언젠간 이 고마움을 보답하리라 수없이 다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더 촘촘히 얽혀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지금 옆에 스쳐 가는 인연이 운명이 될지도. 내가 누군가의 운명이 될 수 있다 생각 하니, 삶을 더 정성껏 가꾸고 싶어진다. 운명 같은 만남이 쌓여가는 이곳. 낯설지만, 싫지만은 않다. 어쩌면 이곳에 오게 된 것도,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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