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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발목 잡히지 않고

by 이음

“눈 딱 감고, 팔자! 어차피 거기로 다시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

눈을 질끈 감아야만 팔 수 있는 집이었다. 10년은 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곳. 첫 신혼집이자, 초등학교가 세 군데나 있는, 아이 키우기 딱 좋은 곳이었다. 집 앞에 공원도 있고, 카페거리까지 갖춰진 입지 좋은 아파트였다. 매일 쓸고 닦아도 피곤치 않았다.


거제로 이사 오면서도 도저히 그 집을 팔 수가 없었다. 결국 전세를 주고 나왔다. 세입자는 늘 그 집을 사고 싶다고 했지만, “나중에 다시 부산으로 갈 거예요!”라며 매번 거절했다. 사실 이미 남편과 딸아이와 함께하는 거제 생활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지만, 왠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인정한다는 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었으니까.


그즈음이었다. 세입자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거제에 계속 계실 거면, 이 집 우리한테 파세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진짜 팔아야 하는 건가?’ 마음이 복잡했지만, 여전히 그 집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타시던 차는 결국 폐차가 됐다. 당시, 아버지는 차 없이는 출퇴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랑이 좀 더 크면, 큰 차로 바꾸려고 했잖아. 우리 차, 아버님 드리는 게 어떻노?”

봐 둔 새 차라도 있었던 걸까.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뭐, 몰래 모아둔 돈이라도 있나?”

뼛속까지 경상도인 여자는, 아빠의 형편을 생각해 준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마음으로는 벌써 벤츠 S클래스로 뽑아드렸지만, 현실은 머리를 쥐어짜며 돈이 나올 구멍을 찾아야 했다. 새 차를 구매할 자금이 만만치 않았다. 역시, 돈 나올 구멍은커녕, 두통만 얻었다.


이쯤 되니, 모든 상황이 ‘이제 그 집 놔줘라!’ 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계속 끌어안고 있어봤자, 부산으로 가고 싶은 미련만 남지 뭐.’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렇게 합리화해야, 미련을 끊을 수 있었으니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팔자!’ 100%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로 거제에서의 삶에 발을 완전히 담그게 되었다.


아뿔싸! ‘내가 팔면 오른다’라는 진리는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집을 팔자마자 부동산 투기 과열 제한구역이 풀리더니, 그 집값이 쭉쭉 오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곧이어 부산 전체의 집값이 폭등했다. 팔았던 아파트는 두 배가 넘게 치솟았다. 그 집은 이제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전국에 부동산 열풍이 불어닥치는 동안, 거제 집값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시댁에 갈 때마다 그 집을 지나치는 게 곤욕스러웠다.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인데도, 누군가에게 크게 당한 것처럼 기가 막히고 억울했다. ‘딱 3개월만 더 버텼더라면...’ 후회했다.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였던가!’ 자책했다. ‘어쩜 이렇게 운도 없냐?’ 하늘을 원망했다. 벽을 치고 싶은 심정이 딱 맞았으리라.


거제를 비롯해 집값이 떨어지는 곳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언론은 온통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이야기뿐이었다. 편파적인 보도라는 걸 알면서도, 나만 대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초조했다. 여전히 그 집에 매여 있었다. 어느새 집이란 의미는 ‘보금자리’가 아닌 ‘투자’가 되어버렸다. 남편과 새로운 시작을 꿈꿨던 추억은 진작에 사라졌다. 머릿속엔 숫자만 둥둥 떠다녔다. ‘이러다 진짜 평생 내 집 없이 살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조선소 경기가 좋아질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거제 집값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숫자들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더 오를 것만 같았고, 우물쭈물하다가는 남들 다 올라탄 기회를 놓칠 것 같았다. ‘거제에 집을 사자!’ 불안과 조급함에 떠밀려, 결심한 지 3일도 안 되어 집을 계약하고 말았다.


‘오, 하나님!’ 집을 사고 넉 달쯤 지나자, 거제 집값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일 년쯤 지나서는 전세가보다 매매가가 더 떨어지는 상황이 됐다. ‘하나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나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탓하는 것 외에는.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인데 어쩌겠노. 어쩔 수 없는 일에, 너무 목매지 마라.”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어떻게 신경을 안 쓰노? 그때 좀 말리지.”

원망의 화살은 이제 남편으로 향했다. 그의 덤덤한 말이 내 속을 더 부글부글 끓게 했다. ‘이 남자는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역시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탓이다.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니, 공감 능력도 제로다.


이불을 덮어쓰고, 무심한 남편을 탓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내뱉는 현실감 없는 말들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속을 태워도 집값이 오를 리는 없었다. ‘바꿀 수 없는 일에 집착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 앞에 놓인 삶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아버지께 차를 드릴 수 있었고, 덕분에 이곳에서의 삶에 더 몰입하게 됐다. 무엇보다, 매일 뉴스에 귀 기울이며 집값에 따라 내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일도 없어졌다.


물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속이 쓰리다. 거제에 억지로 ‘격리’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난 일에 매달려 있을 순 없다. 그러다가는 내 남은 시간까지 놓치게 될 테니까. 숫자 대신, 지금의 일상과 내 앞에 놓인 삶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조금씩 그때의 선택을 받아들이며, 다시 현재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그 숫자들이 내 삶의 본질을 바꾸진 않았다. 다른 지역의 집값이 치솟아도, 실제로 내 삶이 가난해진 건 아니었다. 어쩌면 진정한 부유함이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그 소유 안에서 얼마나 많은 기쁨과 만족을 누렸느냐에 달려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과의 따뜻한 교감, 소소한 일상의 기쁨, 자연을 만끽하는 여유. 그 속에서 부를 찾는다면, 나는 이미 꽤나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조선소 경기가 나빠지면서 남편들은 타지로 떠나고, 집은 팔리지 않아 혼자 거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 속이 타들어 가겠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현재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진 것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기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숫자에 내 삶을 묶어두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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