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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여행하듯 만나요

by 이음

토요일 아침 9시. 침대에 눌어붙은 몸을 억지로 떼어내며, 오늘도 어김없이 외출 준비에 나선다. 가족 중, 나를 뺀 두 사람은, 주말이면 반드시 집을 비워야 한다는 원칙을 몇 년째 성실히 지키고 있다.

“엄마, 텀블러랑 돗자리 챙겼어?”

“다온아, 아빠가 다 챙겼어. 엄마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엘리베이터 눌러!”

“엄마, 내가 요 앞 커피숍에서 커피 사줄게!”

현관문을 열기 직전까지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잘 아는 듯, 두 사람은 내 비위를 맞추느라 바쁘다. 이렇게까지 나를 끌고 가야 하나 싶지만, ‘엄마도 함께 가야 행복이 세 배가 된다.’라는 딸아이의 성화에, 결국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 외할아버지 차다!”

“무슨 소리고? 외할아버지 차가 여기 왜 있노?”

웬걸. 2시간 반 거리인, 양산에 있어야 할 아빠 차가, 정말로 우리 동 앞에 주차돼 있었다.

“아빠,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왔으면 집에 들어오지 않고, 왜 여기 계신대?”

“방금 도착했다. 볼일 있어서, 오는 김에 잠깐 들렀지.”

나는 알았다. 아빠가 나를 보러 왔다는 걸. 그리고 주차장에서 한참을 머물렀다는 걸. 딸이 보고 싶어 집 앞까지 달려왔지만, 시집간 딸에게 주말 아침에 전화를 거는 게, 그리 쉽지 않았을 거다. 딸의 삶에 불쑥 끼어드는 게 아닌지, 혹시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지, 걱정했겠지. 딸이 보고 싶다는 당연하고 소박한 바람 앞에서도 한참을 고민하다, 끝내 연락하지 못한 채, 차 안에서 기다리셨다. 그저 딸이 먼저 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


“장인어른, 저희 지금 나가려던 참인데,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그렇게, 우리 네 사람의 갑작스러운 만남이 시작됐다. 샌드위치와 커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해안거님길을 따라 걸었다. 소동천에서 소노캄까지 이어지는 구간. 이 길은 주말에도 사람이 붐비지 않아 자주 찾는 코스다. 특별히, 아빠에게 점심으로 좋아하는 회를 사드릴 생각으로 이 길을 택했다.


잔잔한 바다 위로 이어진 데크길을 걷다 보면, 산이 부드럽게 바다를 두르고, 작은 마을들이 소박하게 자리 잡은 풍경이 끝없이 펼쳐진다. 굽어진 길을 돌 때마다 바뀌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아빠의 시선은 오로지 손녀딸에게 가 있다. 손을 당기며 깔깔대는 다온이의 웃음에, 아빠의 주름진 눈가도 덩달아 일렁인다. 어릴 적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그 모습처럼. 그랬다. 그때도 아빠는 내가 넘어질까 봐 손을 꽉 잡고 걸었고, 내가 웃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따라 웃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내가 그의 걸음을 맞추며 걷고 있다는 것, 그와 내 그림자의 길이가 비슷해졌다는 것.


두 시간 정도 산책을 마친 후, 근처 아빠가 좋아하는 물회 집으로 갔다. 산책을 한 터라 배가 고프셨는지, 물회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셨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단 말이 이런 거구나.’ 흐뭇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는 그를 보며 훈훈했던 것도 잠시. 차가운 물음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더 그와 함께 물회를 먹을 수 있을까?’ 지난번보다 더 굽은 듯한 그의 어깨에, 가슴 저린 서글픔이 앉았다.

“우와! 할아버지, 많이 드셨네!”

어린 손녀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나 보다.


시간은 아직 오후 2시. 예정에 없던 산책 덕에 벌써부터 몸이 녹초다. 거제 바다도 보여드리고 운동도 시켜드릴 겸 산책을 했는데, 어느새 그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다. 아침 일찍부터 운전해서 오셨으니 그럴 만도 하다. 더는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10분 거리의 옥화 마을로 가서 차를 한잔하기로 했다. 옥화 마을은 해안거님길과 남파랑길 코스에 포함된 곳이라 자주 들렀던 곳이다. 익숙한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아버님, 좀 더 계시다가 저녁 같이 드시고 가시죠.”

“이만 가야지. 차도 막힐 것 같고.”

피곤해 보이는 아빠를 더 붙잡아 둘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너희 차에 자리 좀 있나?”

아빠 차 트렁크에는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와 거봉이 가득 든 상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묵직한 상자를 꺼내는 작아진 그의 어깨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얼른 삼켰다.

“아빠, 살이 더 빠지신 것 같노. 이런 거 사 오지 말고, 잘 좀 챙겨 드셔.”

K 장녀의 애정 표현은 아직도 이렇게 서툴다. 딸아이의 매서운 눈초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제일 탐스러운 걸 고르느라 얼마나 고민했을까, 트렁크에 싣고 달려오는 동안 내 얼굴을 몇 번이나 떠올렸을까. 딸을 만날 생각에, 먼 길도 피곤치 않았겠지. 부모가 되어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자식의 작은 기쁨을 위해서, 어떤 헌신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사람. 계산 따위 없는 순수하고 비효율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 그게 부모란걸. 거제로 이사 온 뒤,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자꾸만 발길을 미뤘던 모습이 죄송스러웠다.


부모에게 자식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새로운 설렘을 품고 떠나는 여행이다. 어제와 똑같은 자식은 없으니까. 내가 아니었다면, 아마 오지 않았을 이 길도, 그런 여행이 되기를. 해안선을 따라 흐르는 바람과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의 울림이, 그의 삶에 소중한 기억으로 차곡차곡 쌓이기를. 오는 길은 설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추억으로 채워지는 그런 여정이 되기를.


운전석 차 문을 열고 손을 흔드는 아빠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빠, 자주 와! 딸도 보고, 관광도 하고, 얼마나 좋노!”

차의 엔진 소리가 희미해지자, 차올랐던 감정이 한 줄기로 흘렀다. 부모와 자식은 평생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멀어져가는 차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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