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저녁이었다. 1년에 딱 한 번인 송구영신예배 3시간 전. 남편은 설거지를 하고, 딸아이는 그림을 그렸다. 여느 저녁처럼 익숙하고 편안했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내 옆으로, 설거지를 마친 남편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고양이 발걸음이라니, 불길하다. 이 남자,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걸까.
“여보, 내가 오래 고민한 건데, 자기가 반대하면 절대 안 할 거다. 진짜다.”
순하디 순한 이 남자가 밑밥을 이토록 길게 깐다는 건, 주님이 내게 묵직한 기도 제목을 주시려는 것이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가.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큰 배 타고 항해하는 게 꿈이었거든. 해사고나 해양대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해서 못 갔지.”
결혼 전 그의 연애사까지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잠시 멍했다. 그런데 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왜 지금 와서 꺼내는 걸까?
“더 늦기 전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그의 신중한 말투와 조심스러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내게 도전적으로 들렸다.
“뭐? 항해! ‘해방’되서 평생 혼자 살아볼래?”
‘해방’이라는 끝말잇기 농담으로 이 상황을 어물쩍 넘기려 했다. 피하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 살아야 유대감이 더 깊어진다고 믿었기에, 기꺼이 이전의 삶을 정리했다. 이제 겨우 적응하려는데 뜬금없이 이직이라니!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데, 예전에 접어 뒀던 꿈을 이제 와서 꼭 펼쳐야 할까? 우리 셋의 웃음과 헌신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남자. 가족과 떨어질 각오를 할 만큼, 그토록 그 꿈이 간절한 걸까? 과연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의 지친 하루를 온기로 감싸줄 수 있을까? 짧은 순간에 원망, 혼란, 불안, 두려움이 거미줄처럼 뒤엉켰다. 그날 밤, 송구영신예배는 침대 위에서 홀로 드렸다. 무릎까지 꿇고.
혼자 머리를 굴려봤지만,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믿을 만한 몇몇에게 비밀스레 SOS를 보냈다.
“아니, 남편 너무 자기만 생각하는 거 아니가? 니는 뭐 어쩌라고?”
“내조의 여왕이 따로 없네. 이걸 왜 고민하노? 당연히 안되지.”
“남편 보내고 나면 니 우울증 올지도 모른다. 조심해라.”
가시 돋친 말, 무심한 말, 걱정 섞인 말들이 돌아왔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말들에 흔들리지는 않았다. 지난 8년간 사랑하는 동반자이자 헌신적인 아빠로서 살아온 그의 모습이, 나를 붙들어주었다.
그가 어찌 자기 꿈만 쫓겠다고, 내 피 같은 딸과 내 살 같은 아내를 두고 망망대해로 떠나고 싶겠는가. ‘더 늦기 전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말’ 속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이 담겨 있다. 내 벌이가 좀 더 나았더라면, 그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웠을까? 바다를 항해하는 게 오랜 꿈이었다고만 말하는 그가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며칠 밤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었다. 꺼이꺼이 꺽꺽.
그의 입 밖으로 다시 그 이야기가 튀어나올까, 가슴이 조여왔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을 때마다, 몸이 저절로 움찔하며 등을 돌렸다.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피하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마음을 다잡았다. 폭탄을 품고 평생을 살아갈 순 없으니까.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한 뒤, 마침내 입을 떼었다.
“설마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제? 올해는 베트남 가려고 돈도 좀 모았고... 기부도 하고 있잖아. 더 욕심낼 필요 없다.”
“돈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하고. 근데 자기가 혼자 다온이 키우느라, 힘들까 봐. 그게 걱정이지.”
“아무리 큰 배라도 바다에서는 장난감 아니가? 태풍 같은 거 만나면 안 휩쓸리나?”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안전상 문제가 없다니, 더 이상 딴지를 걸 말이 없었다.
그렇게 남편의 직장을 따라, 아무 연고 없는 이곳으로 이사 온 나는, 졸지에 ‘독박육 워킹맘’이 되었다. 이곳저곳 체력과 감정을 쪼개 써야 하는 독박육아 워킹맘. 여전히 그 삶은 고달프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특히 아이가 아프거나 내가 아프면 그 버거움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설움은 백 배가 된다.
남편 없는 이곳은 더 외딴섬이 되었다. 남편이 옆에 있을 때도 외롭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가 떠난 뒤, 외로움은 훨씬 자주, 더 거대한 모습으로 나를 덮쳤다. 나만 자꾸 파도에 휩쓸려, 점점 멀어지는 기분.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막막함.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줄 이 없는 외로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섬처럼 떠도는 삶. 밀어낼 수만은 없기에, 차라리 그 안에 잠시 머물러 보기로 했다. 그것이 나를 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속에 녹아들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덜 외롭다. 자신과 친구가 되어가는 기분이랄까. 그 어떤 관계보다 더 깊고 단단한 신뢰가 쌓여가는 느낌. 꽤 든든하고 만족스럽다.
다 남편 덕분이야. 고. 마. 워. 남.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