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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담 Mar 28. 2024

섬 같았던 우산 속에서

안미린의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나에게 우산은 남다른 키워드였다. 초등학생 때는 친구들을 불러 창문을 넘나들면서 우산으로 칼싸움을 했다. 그리고 중학생 때는 우산 위로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포근하고 정겹게 들렸다. 마지막으로 고등학생 때는 우산 그 조그만 공간이 어쩐지 내 유일한 숨구멍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다. 아, 생각해 보니까 초등학생 때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우산 몇 개와 돗자리를 챙겨 앞마당에 나가 작은 오두막을 지은 적이 있다. 그  당시 아주 큰 소나무가 있으니까 그 밑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잘 막아주겠지 하고 지었다. 그런데 웬걸, 손끝이 점점 파래지고 몸은 오들오들 떨렸다. 그때 어렴풋이 우산이 영원한 것은 아니구나 깨달았다.


그렇지만 우산 속에 머무른 추억은 내게 행복이었다. 그래서 대학생 때 우산이란 시를 써서 시낭송도 하고 시화전도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쓴 시를 오랜만에 읽어봤는데 되게 학창 시절 소녀가 서로 사랑했지만 더는 사랑하게 되지 않은 시 같다. 은근 전개가 되게 단조롭다고 느꼈다. 그리고 시 속의 소녀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그 사이의 나이 같다. 근데 다시 마지막 행을 보니까 '양말을 가지런히 모은 섬은/ 추억이 되어 우산꽂이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영원한 이별을 암시하나 아니면 그때는 그랬지란 의미를 뜻하는 것일까. 내가 쓴 시에서 나온 단어는 '양말' '도서관' '오렌지 맛 사탕' '솥뚜껑' '즉흥 연주곡' 이런 단어들이 나와서 더 어리게 느껴진다. 어쩐지 동시에 더 가까운 서술이 아닐런가 모르겠다.


사실 저 우산이란 키워드를 생각했을 때 나는 한 개인의 우울하고 즐거운 내면을 쓰고 싶었다. 내게 비가 온다는 것은 우중충한 구름이 하늘을 덮이고, 양말이 축축해지는 시간이지만 그 속에서 빗소리에 설레기도 하고 내 몸에 딱 맞는 우산 속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근데 막상 쓴 것은 '어린 소녀의 우정' 같은 달달한 얘기가 되어버렸다. 내가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이란 시집에서 발견한 <우산의 안>에는 '샴쌍둥이'가 나온다. 그 시를 읽자 내가 지난날 말하고 싶었던 우산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 같아서 골라보았다.



우산의 안


                안미린


깨끗하게 잘린 샴쌍둥이가 가볍게 다툰 후

거울을 반으로 가른다

다른 나라와 틀린 나라 사이로

눈이나 새가 내린다


왼쪽의 아이가 팔을 박박 긁으면

오른쪽의 아이가 잃은 팔에 놀라 알약을 토해 낸다

흔한 종교들은 여름에만 믿고

왼쪽의 아이가 좀 더 건강해진다


일기장은 어쩌지?

오른쪽을 잘라 내며 오른쪽의 아이가


~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해

등을 넓게 계산한 스웨터를 뭉치면

둥근 무기들이 감춰질 거야

멀리 피가 묻은 건?

삭제될 거야, 서로의 소매에서 한 명처럼 기도한다면

지도 같은 소금을 겹쳐 미지근한 차원을 만든다면

우리가 악수한다면?

지도 같은 소금을 겹쳐 무른 미로를 만든다면?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끼워 맞추고 깔깔 웃는 왼쪽


우리는 올 풀리는 시간과

리본을 묶어 주는 기계

녹스는 손톱들을 조심해야 해

겉과 끝의 우산살들

아이의 오른쪽이 시험 삼은 우산을 착 접으면서


(출처 안미린 시인의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민음사 2016)



나는 안미린 시집의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뭔가 내가 모르는 시인의 시를 고르고 싶은 마음에서 무작정 동네 도서관에 찾아갔다. 이 시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민음사가 출판사란 점이다. 나는 시집은 문학과 지성사 혹은 민음사가 좋은 것 같다. 문학과 지성사는 알차게 구성이 되어있는 것 같고, 민음사는 예쁘고 가지런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색이랑 디자인에 취약한 사람이라서 시집을 고를 때 표지가 민트색이라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도 있다. 그래서 파스텔 톤 연보라색 표지도 내 눈에 띄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다음은 제목이었다. 어떤 시는 밤이라는 감성적인 단어가 들어가서 그게 처음에는 끌렸다. 그러나 안미린 시인의 빛이 아닌 결론을 짖는, 은 확 와닿는 문구는 아니지만 모호하면서 뭘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시집을 꺼냈을 때 제목이 일자로 쭉 정렬된 게 아니라 2줄로 나뉘었다는 점도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래서 이 시집을 고르게 되었고 집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를 고르기 위해 열어보았다.


안미린 시인의 시는 단어도 간결하고,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곳곳에 있고, 전체적인 느낌도 나쁘지 않았는데 묘하게 어느 순간 거리감이 느껴졌다. 읽다 보니까 이미지는 있지만 막 쉽게 이해되는 시는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제목의 행을 장/롱 이렇게 띄어 쓴 시도 있고, 컬러풀이란 시는 중간마다 ; 기호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니까 딱 김경주 시인이 떠올랐다. 되게 형이상학적이고 기존의 시의 형태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뭔가 비슷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집에 있는 김경주 시인의 기담이란 시집을 열어봤다. 형태는 기존의 틀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비슷할지 몰라도, 내용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으로는 김경주 시인의 시가 조금 더 산문적이고 따뜻하며 그림 그리듯이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말하면 안미린 시인의 시는 잘 잘라진 케이크 조각이나 아니면 어떤 반짝이는 도형 같다. 나는 분명 대충 눈으로 읽었을 때 '우산의 속'이란 시가 너무 마음에 들었으니까 할 얘기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시를 직접 타이핑하면서 느꼈다.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게 맞을까, 의외로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3초면 되지만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를 두루두루 읽어보고 처음으로 책 뒷장으로 넘어가 조강석 문학평론가의 글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안미린 시인의 시가 아예 모르겠다기보다는 내가 느낀 것을 문학평론가가 어떻게 풀어서 설명할지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조강석 문학평론가가 안미린 시인의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에서 '신' '기계' '뼈' 등이 자주 등장하는 시어라고 했다. 정말 나는 시에서 기계라는 단어가 등장하니까 좀 이질감도 느끼고 내적 친밀감을 쌓기도 힘든 어떤 벽을 느꼈다. 내가 문학평론가의 글을 읽고 이해한 것은 딱 두 줄이다. 하나는 안미린 시인의 시는 이미지가 하나의 체험으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유한 세계의 양감과 질감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타자에 의해 스스로를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존재한다는 시 해석이 공감도 되면서, 내가 읽고 좋아한 '우산의 안'이란 시와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의 제목인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 역시 빛이나 신이란 절대자가 아닌 스스로 결론을 찢는 인간의 주체성을 얘기하는 꽤 심오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이지 내가 타이핑하면서도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가 참 어렵다. 한때 시가 좋아서 들떴을 때는 엄마가 '시는 참 어려워. 뭔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어.'라는 말에 공감을 못했는데 지금은 좀 알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시의 제목은 우산의 안이다. 우산이란 게 어떤 열매라고 생각한다면 그 안에 손잡이를 잡은 사람은 씨앗이 되지 않을까. 아무튼 왜 제목이 우산의 안 일까 아직은 짐작되는 바가 없다.


깨끗하게 잘린 샴쌍둥이가 가볍게 다툰 후

거울을 반으로 가른다

다른 나라와 틀린 나라 사이로

눈이나 새가 내린다


샴쌍둥이는 두 명의 사람이 한 몸을 공유하는 경우로 보통은 몸은 두 개이고 몸의 일부만 붙어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까 샴쌍둥이 분리 수술 성공 혹은 샴쌍둥이 자매의 연애란 글이 보인다. 그리고 영화 복숭아나무 거기서도 조덕환 배우와 조승우 배우가 샴쌍둥이로 나와 연기를 한 것을 본 적도 있다. 그래서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이름인 샴쌍둥이가 시에 처음 등장한다. 난 1연에서 되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시인이 일상적이지 않은 일을 아주 평이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깨끗하게 잘린' '거울의 반을 가른다' '틀린 나라' '새가 내린다' 등은 평범하고 친숙한 상황은 아니다. 어쩐지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동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난 1연을 계속 보고 있는데, 도대체 저 상황은 어떤 상황일지 짐작도 안 간다. 그냥 저 단어 자체로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하나였던 샴쌍둥이가 둘이 되어 자신의 독립적이 공간을 차지했고, 한 거울에 두 명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거울을 반으로 가른 것 같다. 그리고 다르다와 틀리다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흔히 혼동하는 맞춤법 중 하나인데 그런 나라는 이름부터 불안전할 것 같다. 그런 데다가 눈이 내리며 새도 내린다는 것은 내게 점입가경이며 불길한 징조처럼 여겨진다.


왼쪽의 아이가 팔을 박박 긁으면

오른쪽의 아이가 잃은 팔에 놀라 알약을 토해 낸다

흔한 종교들은 여름에만 믿고

왼쪽의 아이가 좀 더 건강해진다


샴쌍둥이가 한 몸을 공유하고 있기에 저 상황이 이해가 된다. 왼쪽 아이가 가령 오른팔을 써서 자기의 왼쪽 몸을 긁는다면, 오른쪽 아이는 갑자기 잃어버린 팔에 놀라 알약을 토해 낼 수 있다. 사실 우산의 안이란 시를 어렴풋이 읽을 때는 우산을 쓸 때 왼쪽과 오른쪽으로 사람이 갈라지고 그래서 왼쪽 자아와 오른쪽 자아가 있다는 어떤 개인의 내면을 담은 시가 아닐까 싶었다. 근데 찬찬히 시의 행을 뜯어보니 그게 맞을까 싶다. 그다음 행은 '흔한 종교들은 여름에만 믿고/ 왼쪽의 아이가 좀 더 건강해진다'인데 정말 이 2행의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다. 처음 나온 행은 흔한 종교들은 여름에만 믿는다, 이것은 종교란 특정 시기에만 모이고 믿는다는 인간의 믿음에 대한 불완전성을 얘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행은 하필 왼쪽의 아이가 좀 더 건강해진다고 했다. 위에서 보면 왼쪽의 아이가 팔을 박박 긁는다고 했다. 방금 깨달은 것이 왼쪽 아이가 피부병으로 팔을 박박 긁는 현상과 오른쪽 아이가 피부병으로 알약을 먹는 행위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보통은 피부병이 발생하면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알약을 먹는 것이 순서인데, 샴쌍둥이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이들은 서로의 속사정을 낯낯이 알고 있는 것이다. 여름이라는 푸릇푸릇한 계절과 건강해진다는 단어의 조합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까 쓴 타인을 통해 자신 스스로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이 1연의 1행과 2행을 통해 드러나고 있지 않나 싶다.



일기장은 어쩌지?

오른쪽을 잘라 내며 오른쪽의 아이가


일기장은 어쩌지 하며 원래 한 몸이었던 샴쌍둥이가 고민을 시작한다. 오른쪽 아이가 오른쪽에 쓰인 일기장을 잘라내고, 이들은 아까 거울을 반으로 쪼갠 것처럼 각자의 영역을 분리시키며 구축시켜 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일기장이라고 하면 자신의 속내까지 다 드러내는 은밀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3연을 읽으면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를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해

등을 넓게 계산한 스웨터를 뭉치면

둥근 무기들이 감춰질 거야

멀리 피가 묻은 건?

삭제될 거야, 서로의 소매에서 한 명처럼 기도한다면

지도 같은 소금을 겹쳐 미지근한 차원을 만든다면

우리가 악수한다면?

지도 같은 소금을 겹쳐 무른 미로를 만든다면?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끼워 맞추고 깔깔 웃는 왼쪽


의외로 시에서 글자는 많이 봤는데 저렇게 ~ 기호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척일까. 그다음 행은 '등을 넓게 계산한 스웨터를 뭉치면/ 둥근 무기들이 감춰질 거야'이다. 등을 넓게 계산했다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마음이려나, 그것을 돌돌 뭉쳐서 둥근 무기로 만들면 자신의 못난 점도 감춰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멀리 피가 묻은 건?/ 삭제될 거야'에서 멀리 피가 묻을 만한 사건은 도대체 무엇이고, 그게 삭제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정황을 읽을 수는 없지만 이 상황에서 진실되거나 긍정적인 상황은 1도 없다는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서로의 소매에서 한 명처럼 기도한다면/ 지도 같은 소금을 겹쳐 미지근한 차원을 만든다면/ 우리가 악수한다면?/ 지도 같은 소금을 겹쳐 무른 미로를 만든다면?' 같은 상황뿐이다.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끼워 맞추고 깔깔 웃는 왼쪽은 결코 선해 보이지 않고 악당처럼 보인다.


서로의 소매에서 한 명처럼 기도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리고 지도 같은 소금으로 미지근한 차원 혹은 무른 미로를 만드는 것도, 왼쪽과 오른쪽의 아이가 악수하는 것도 희망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지도 같은 소금은 어떤 명확한 선과 진리 같고 미지근한 차원이나 무른 미로는 불명확한 세계 같다. 왼쪽과 오른쪽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인지 불투명해지는 그런 세상이어야만 시에서 나오는 화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왼쪽 뇌는 이성을 오른쪽 뇌는 감성을 담당한다. 그래서 오른쪽 아이는 일기장을 사수하려고 하고, 왼쪽 아이는 자신이 살기 위해 직접적으로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읽혔다. 그냥 막 읽을 때는 마냥 편하고 좋은 시가 찬찬히 뜯어보려니까 덜 익은 갈비 대처럼 잘 안 뜯어진다.



우리는 올 풀리는 시간과

리본을 묶어 주는 기계

녹스는 손톱들을 조심해야 해

겉과 끝의 우산살들

아이의 오른쪽이 시험 삼은 우산을 착 접으면서


우리는 '올이 풀리는 시간'과 '리본을 묶어 주는 기계' 그리고 '녹스는 손톱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시는 말하고 있다. 올이 풀리는 시간은 견고한 짜임새를 잃고 정체성을 잃는 시간이고, 리본을 묶어 주는 기계는 단순한 일을 사람 대신 기계가 대체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시간이고, 녹스는 손톱들은 손톱이 낡거나 무디어져 제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은 시간이 올이 풀리고 손톱이 녹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사물 또는 기계가 침입한 현장 같다. 그것을 보니 문득 웹툰작가 하일권의 3단 합체 김창남이 떠오른다. 로봇이지만 사람의 감정을 갖고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를 담은 그 웹툰이 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계속 읽다 보니까 어조가 딱딱하지 않고 경쾌한데 말의 의미는 무겁다. 그런 이중적인 분위기에 처음 '우산의 안'을 읽을 때 매료된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사랑이 이해하고 빠지는 것은 아니니까.


산 넘어 산을 이 시를 이해하려고 하면서 느꼈다. 겉은 안과 밖이라는 3차원적 공간의 특징이고, 끝은 시작과 끝의 2차원적 선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겉은 종렬 세로선이고, 끝은 횡렬 가로선인데 어떻게 저렇게 상이하게 다른 개념을 한 줄 안에 넣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산 살을 연상해 보면 우산을 든 사람으로부터 생각하면 '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산이라는 존재 자체의 '끝'이기도 하다. 우산과 우산을 든 사람 사이에 시작점도 있다면 끝도 어느 지점에 존재할 것이다. 한 아이의 오른쪽이 시험 삼아 우산을 착 접으며, 드디어 시가 끝난다. 그리고 도대체 오른쪽 아이는 왜 시험 삼아 우산을 접었는지 하는 의문점을 또 남기며 시는 끝나버렸다. 여기서 등장한 '시험 삼아'라는 문장은 맨 앞에서 등장한 '가볍게 다툰 후'처럼 되게 심플하며 가벼운 어조를 띄고 있다. 과연 오른쪽 아이와 왼쪽 아이에게 우산은 어떤 의미며, 이들이 우산을 접는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들의 방패막 혹은 그들의 겉 표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을까.


다시 제목 '우산의 안'으로 돌아간다면 우산 안에 한 몸의 두 아이가 존재한다. 우산을 접는다는 것은 더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뉠 수 없고, 시 맨 처음에 나온 '깨끗하게 잘린'이란 표현을 뜻할지도 모른다. 우산 안에서 샴쌍둥이들은 서로의 영역을 구축하고, 각자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다. 나는 이 '우산의 안'이란 시를 읽으며 최종적으로 떠오른 감상은 사회 밖에 내처진 어린 도둑 두 소녀란 생각이 들었다. 악한 것 같지만 악하다고 욕할 수 없는 두 소녀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또 느낀 것은 시가 해석하기 어렵고 난해하니까 내 사설이 이렇게 길어지는구나였다. 어떤 시는 명료하게 혹은 확 와닿는데 이 시는 돌고 도는 미로에 빠져 출구를 잃어버린 기분을 내내 느꼈다. 이게 만약 대학교 과제로 내일 발표해야 한다면 난 무조건 절망했을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시를 읽고 쓰면서 내 시 성향을 조금 알게 되었다. 나는 개인의 내면 혹은 자아를 탐구하는 시에 더 매료되고 반하는구나 싶었다. 사실 안미린 시인의 우산의 안도 그런 시로 잘못 이해해서 반한 것이었다. 차라리 '김지녀 시인의 선'이라는 시가 더 이 시랑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학교를 다닐 때 김지녀 시인을 좋아해서 무작정 손 들고 그 선이라는 시를 선점해서 발표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저 제목을 찾기 힘들었다. '주차장' '선' '피아노 건반'이란 단어들은 떠오르나 어떤 시인인지 어떤 제목인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네이버 메일을 뒤져서 겨우 찾아낸 한글 파일 명은 학과 학번 이름이다. 우연히 찍었는데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히 발견했다. 내가 이 시를 떠올린 이유는 김지녀 시인의 시에서 2차원 적인 선이란 개념을 선과 악이라는 정신적 개념으로 잘 섞어서 냈기 때문이다. 나는 '우산의 안'이란 시에서도 흑과 백 혹은 선과 악이란 개념을 떠올렸기 때문에 김지녀 시인의 선이 떠올랐다.


그리고 김지녀 시인의 선이란 시 마지막 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이들이 선과 선 사이를 뛰어다닌다/ 건반들처럼 선들이 차가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 아이들은 지금 주차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뛰어노는 것을 전 연에서 보여줬다. 이것이 주차장이란 공간에서 아이들이 서늘하기도 하고 바닥이 매끄러워서 인라인이나 자전거를 타고 실제로 자주 놀기도 한다. 그렇지만 차를 주차하기 위한 공간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차가운 음악'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그런 실제적인 이야기도 있고 또 이념적인 이야기도 담겨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란 원래 어른들이 만든 선이란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잘 넘나 든다. 그렇지만 그런 아이들의 행동이 따뜻한 음악이 될 수 없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진 시선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내게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는 솔직하게 '우산의 안'이란 시에 대해 내 감상을 적으면 적을수록 이 시를 더 잘 모르겠다. 운전대는 잡았는데 이 길이 맞나 싶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까 조강석 문학평론가의 시 해설은 시보다 더 어렵고 철학적인 용어들로 시를 해석하고 있었다. 처음 해설을 보고 기겁을 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철학적 사고가 담긴 시에는 그런 철학적인 해설이 더 맞는 방법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우산의 안'이란 시를 한 줄로 말하자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뒤섞여 사는 너와 나' 같다. 난 이게 실제로 한 몸의 두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신적으로 한 몸에 두 인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산'이란 단어가 쏘아 올린 공이 이렇게나 부풀었다는 것이 정말로 신기하다. 어떻게든 잘라서 먹고 소화시켜 보려 했지만 어쩐지 실패한 것만 같다. 그래도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런 생각도 해보고, 저런 생각도 찾아보며 나름 행복했다. 다음에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될 시는 조금은 친절한 시이기를 빌어본다. 물론 저런 팜므파탈 같은 시도 좋았지만 두 번 했다가는 두개골이 골절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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