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담 Mar 26. 2024

그땐 떠올랐고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

시소의 감정, 절판된 시집

시소의 감정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질서
                                 ―브레히트

     김지녀


  시소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우리가 일제히 언니, 하고 불렀을 때
  비인칭 주어처럼
  길어서 다 부를 수 없는 이름처럼
  언니는 해석될 필요 없이 거기에 앉아 있다

  등을 돌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탕! 탕! 날아가는 날들을 향해
  돌을 던진다

  언니의 하늘은 올리브색에 가깝다
  오래됐군, 페인트 벗겨진 하늘을 팔레트 나이프로 긁어낸다
  가루가 되어 쌓이는 오늘의 날씨
  조금씩 갈라진 감정의 흰 뼈들

  낙천적이거나 비관적인 저녁 쪽으로
  우리는 두껍게 하늘을 덧칠한다
  차가운 동상(銅像)으로 언니를 기념한다

  언니는 과묵하고 무심하고 작기도 한데
  모랫바닥을 글자들로 구겨 놓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우리는 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까


 

시집 『시소의 감정』(민음사, 2009) 중에서


출처(네이버 블로그 시인 웹진광장 https://m.blog.naver.com/)
  


이 책은 표지가 연두색이다. 황인찬 시인의 희지의 세계란 시집은 민트색이다. 민음사 시집 표지 디자인이 깔끔하면서도 감각적인 것 같다. 우연히 시집을 모아놓은 책장을 보다가 내가 대학생 때 좋아했던 김지녀 시인의 시소의 감정이란 시집을 집에서 찾기 시작했다. 근데 없길래 내 친구에게 "혹시 내가 너한테 시집도 생일선물로 줬어? 김지녀 시인의 시소의 감정?" 하고 물었다. 첫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고 시인과 시집 제목을 언급하니 줬지만 어디에 박혀 있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까 절판이다. 2009년 시집을 난 2012~2016년 사이에 마주친 것이다. 절판 됐다고 하니까 뭔가 친구에게 준 게 조금 아쉬워진다.


아무튼 내가 대학생 때 저 시집을 꽤 내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었다. 카페 가는 게 유일한 낙이던 시절 시집을 들고 가면 가볍기도 하고 짧기도 해서 효율성이 좋았다. 서너 페이지만 읽어도 배부르게 읽은 그런 기분이랄까. 그래서 지금도 기억나는 제목은 기린과 나, 칙칙과 폭폭 그리고 망상, 시소의 감정 딱 셋이다. 찾아보니까 그 외에도 A 그리고 a, 이석, 최후주의자 B 같은 제목이 눈에 낯익다. 시소의 감정을 내가 꼼꼼히 구석구석 읽었구나 싶다.


그 당시 유준재 작가의 균형이란 그림책도 좋아했다. 그래서 시소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좋은데 거기에 감정이란 말랑말랑한 단어까지 더해지니까 되게 감각적이게 느껴졌다. 시소는 양쪽의 무게를 가늠해서 더 무거운 쪽으로 기울어지는 저울의 기능이 있지만 아이들의 오락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것에도 감정이 있다면 누가 더 무겁고 더 가벼운지 심판하는 시소의 마음 아닐까. 결과를 내리기까지의 과정 속에 어떤 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담겨있을 수 있다.


사실 지금 떠올려보면 난 <칙칙과 폭폭 그리고 망상> 그 시를 되게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봐도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다. 다만 내 친구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시에는 관심도 없는 친구라 그 생일선물을 읽으며 이런 감정을 느꼈겠구나 역지사지의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한때 열렬하게 좋아한다는 기분을 되새김하며 네이버 블로그 시인 웹진광장에서 김지녀를 검색했다. 그리고 눈에 익은 제목을 눌러보거나 아니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을 무작정 눌렀다. 그랬더니 사이사이 내가 좋아하는 그 순간이 보였다 안 보였다. 그러면서 내가 왜 김지녀 시인의 시소의 감정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시는 되게 가지런하면서 따뜻한 색채의 단어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 단어들의 배열은 나의 마음속에 어떤 색을 지닌 이미지로 떠올리게 한다. 난 시에서 너무 뚝뚝 끊어지는 배열이나 그림을 떠올릴 수 없는 서술하는 표현하는 시는 내가 그 맛을 느끼질 못한다. 김지녀 시인의 시소의 감정에서 어떤 건 되게 마음에 들고, 어떤 건 왜 제목이 이럴까 짐작조차 안 가는 수학문제 같았다. 이런 구체적이면서도 애매모호한 그림 같은 시라 그 당시 내가 열렬히 좋아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 그렇게까지 좋아하고 탐구하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브레히트의 말부터 감동적이다.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질서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으면 무질서. 있어야 할 바리에 사람이 없으면 꽤 큰 혼란이 생긴다. 가령 매일 아침 타고 가는 시내버스 운전기사님, 환절기에 파업하는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 폭우가 쏟아져서 정전이 된 아파트.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무질서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은 질서란 말은 내게 그렇게 해석되었다. 내가 원하는 자리는 상사의 시선을 참아가며 앉아서 일하는 회사가 아니라 따뜻한 이불 덮고 누운 방구석일 것이다. 대학생은 2월 말 봄기운이 느껴지는 미풍에서도 속이 어지럽다고 한다는데 그 이유는 개강의 악몽 때문이다. 직장인은 일요일 오후부터 우울해진다는 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인 방구석에 내일부터 눕지 못한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이다.


무질서와 질서라는 단어가 시소와 아주 찰떡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의무이고, 원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방임이다. 인간은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선택하고 인내해야 하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시소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중간을 찾는 과정 같다.



시소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시소를 타기 전에 보면 항상 한쪽으로 기울어져있다. 마지막으로 시소를 탄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결정된 채 다음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고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시소의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이 시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왜곡된 역사를 시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를 찬찬히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일제히 언니, 하고 불렀을 때
비인칭 주어처럼
길어서 다 부를 수 없는 이름처럼
언니는 해석될 필요 없이 거기에 앉아 있다


비인칭 주어는 가리키는 대상이 없을 때 사용하는 주어를 말한다. 주로 날씨, 시각, 요일, 거리, 명암을 나타날 때 쓴다고 네이버에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 그렇듯 우리 주의에 있는 듯 없는 듯 애매한 정체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비인칭 주어는 가짜 주어로도 사용되어서 이름이 너무 길면 생략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여기서 '언니'는 누구나 될 수 있으나 그 대상이 누구인지 불명확하다. 나만해도 우리 집에서 막내가 언니라고 부르면 그 언니를 지칭하는 사람이 3명이나 돼서 헷갈린다. 


그리고 언니라고 한다면 대표적으로 몽실언니가 떠오른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초등학교 때 필수 독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동생을 들처업고 있는 몽실언니 그림이 떠오른다. 그 책은 작가가 20세기 한국의 슬픈 역사적 현실 속에서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한 여자 아이의 일상적 삶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을 그렸다고 한다. 1984년 초판 된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그리고 동시에 떠올린 이미지는 소녀상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소녀상이 내가 사는 동네 남부시장에도 존재한다. 사실 이 시를 다 읽으면 소녀상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조금 시를 읽을 때 자유로운 상상을 해치게 되고, 시가 너무 뻔하게 읽혀서 내가 이 시를 그렇게 좋아하지 못한다. 소녀상이 2009년에는 2곳 세워져 있고, 우리 동네에 세워진 소녀상은 2015년도이다. 그러니까 대학생 때는 떠올리지 못했으나 지금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금 떠올려보니까 시소의 감정이란 시집에서 정말 내가 시소의 감정이란 시를 제일 좋아했나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난 이 시의 구절과 진행이 조금 낯서니까. 단순히 시집과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드니까 그 이름이 같은 시까지 좋아했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런 와중에 다시 시를 보면 비인칭 주어처럼 어디에든 있지만 정체가 불투명한 언니이다. 그리고 이름이 다 길어서 부를 수 없다는 말은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아서 다 헤아릴 수 없다는 뜻과 동시에 그 무게가 가볍지 안혹 무겁다는 의미 같다. 언니는 언니 자체로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따로 해석할 필요 없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타인이 언니에 대해 이런저런 말과 해석이 불필요하게 많다는 것 아니면 언니 자체가 증거이기 때문에 다른 미사여구가 필요 없다는 뜻 같다. 보면 볼수록 위안부 피해자였던 할머니들을 떠올리게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나 북한 탈주민에 대해 나는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내가 이 시를 너무 뻔하게 읽힌다고 싫어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한번 소녀상으로 읽으니까 일제히라는 단어조차도 일제강점기를 연상시킨다. 



등을 돌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탕! 탕! 날아가는 날들을 향해
돌을 던진다


화자는 왜 등을 돌렸을까. 보기 힘들어서일까. 앉았다가 일어섰다는 앉았다 일어서는 것을 반복한다는 말일까 아님 앉아있다가 일어서게 되는 상황을 말할까. 나는 전자로 읽혔다. 뭔가 화자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탕! 탕! 날아가는 날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화풀이하는 상황이다. 탕! 탕! 이란 글자에서 뭔가 사냥꾼이 날아가는 새를 맞추는 소리 같다. 화자는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이 미운 것일까. 등을 돌렸다는 것은 삐졌다는 표시인가. 김지녀의 시는 상황이 구체적이기보다 모호하면서 불명확하지만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언니의 하늘은 올리브색에 가깝다
오래됐군, 페인트 벗겨진 하늘을 팔레트 나이프로 긁어낸다
가루가 되어 쌓이는 오늘의 날씨
조금씩 갈라진 감정의 흰 뼈들

나는 언니의 하늘은 올리브색에 가깝다는 저 표현이 마음에 든다. 올리브색, 카키, 짙고 어두운 초록. 뭐랄까. 시에서 올리브색이란 단어만 봤을 때는 올리브색이 주는 그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근데 네이버에 저 단어를 검색하고 뜬 이미지 속 색을 보니까 군인들의 군복이 떠올랐다. 그리고 속으로 욕지거리가 나온다. 단순히 읽으면 피폐하고 어둑한 언니의 고단한 하늘을 올리브색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원인에 군인이란 간접적인 묘사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잔잔한 단어 뒤에 잘 벼린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됐군, 페인트 벗겨진 하늘을 팔레트 나이프로 긁어낸다. 확실히 화자의 말처럼 오래된 문제이다. 팔레트 나이프로 페인트 벗겨진 하늘색을 긁어낸다. 이 말은 화자가 언니들의 고된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렸다. 가루가 되어 쌓이는 오늘의 날씨. 비인칭주어인 언니들이 삭아서 가루가 되어 오늘의 날씨로 다시 표현되는 것 같다. 아까 비인칭주어에 나왔던 날씨가 이곳에 사용되어 있는 것을 보며 시인이 간결해 보이지만 얼마나 촘촘하게 시의 구조를 짜는지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갈라지는 감정의 흰 뼈들. 동상이 조금씩 낡아서 갈라지는 것과 그 언니들의 하얀 뼈가 낡아서 갈라지는 이미지 두 개가 오버랩된다. 감정의 흰 뼈들이란 글을 보며 얼마나 사무치고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낙천적이거나 비관적인 저녁 쪽으로
우리는 두껍게 하늘을 덧칠한다
차가운 동상(銅像)으로 언니를 기념한다


시소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위아래, 가볍거나 무겁거나, 낙천적이거나 비관적인 것처럼 서로 상반되어 있다. 저녁이라는 비교적 덜 추상적인 시간 개념 앞에 낙천적이거나 비관적이라는 추상적인 가치관이 나오니까 되게 오히려 저녁이란 단어가 더 구체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고 두껍게 유화처럼 하늘을 덧칠한다고 표현했다. 어쩌면 저것은 수많은 세월의 흐름에 덮여서 잊힌 아픈 역사를 되새김질하는 표현처럼 느껴졌다. 동상(銅像)이란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만든 기념물로 주로 구리로 만든다고 한다. 동상이 금속이니 당연히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시인은 차갑다는 말을 한 번 더 덧붙임으로써 강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에 언니를 기념한다에서 기념한다라는 말이 마냥 좋게 들리지 않는다.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다는 말이다. 분명 좋은 의미이지만 앞에 차가운이란 형용사가 들어감으로써 마치 여행지에 가서 우표나 엽서를 사 와서 기념한다는 의미로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같은 단어인데도 시인이 어떤 뉘앙스로 그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낙천적일 수도 있고 비관적일 수도 있다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구절 같았다. 


출처 (네이버 사전 https://dict.naver.com)


이 시를 이렇게 천천히 뜯어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뼈에 붙은 갈빗살처럼 한 번 화르륵 끓여서 먹으면 잘 뜯어지지 않는 것이 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마치 은근한 불에 오래 끓여야 비로소 뼈에서 완전히 살점이 뜯어지는 갈비뼈 같은 것이 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처럼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 그 말이 절로 생각난다. 



언니는 과묵하고 무심하고 작기도 한데
모랫바닥을 글자들로 구겨 놓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언니는 과묵하고 무심하고 작기도 한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언니는 동상이라서 말이 없고 무심한 게 당연하며, 언니 동상은 그 옛날 어린 소녀에서 시간이 멈춰버렸기 때문에 작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시인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당연한 사실을 마치 언니가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런 표현을 보고 있으니까 위안부 소녀가 만삭인 채로 흑백사진에서 무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크나큰 아픔 속에서 말을 잃고 감정을 읽은 채로 쪼그라든 그녀들의 지지리 한 삶이 이렇게 시를 한 글자 한 글자씩 씹어보니까 느껴진다. 


나는 여기서 되게 궁금했던 것이 있다. 분명 동상 아래는 시멘트 바닥일 것인데 왜 저기서는 모랫바닥이라고 적혀있을까. 수학문제 수식을 열심히 쓰다가 어느 중간에서 막힌 기분이 들었다. 왜 모랫바닥이었을까. 불확실하고 쉽게 무너지고 부서지는 가엾은 삶이라서 그랬을까. 글자들을 구겨 놓고 그녀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라는 표현 속에서 이름 석자 적어놓고 그녀들의 인생을 짧은 몇 줄로 써놓고 그녀들은 머나먼 죽음으로 떠나고 있는 것을 표현한 것 같았다. 여기서 나는 글자들로 구겨 놓고에서 글자가 이름일 수도 있고 그녀들의 고단한 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상이라는 하나의 동상 안에 가득 욱여넣은 그녀들의 삶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소녀상 동상이 더는 무생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화자는 그녀들이 어디로 가고 있을까라고 말하는 것이 마치 먼 여행이라도 떠난 것처럼 나는 그 구절이 소녀 감성처럼 느껴졌다. 이 시는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기도 한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것 같다. 

우리는 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 불특정 다수이며 대중을 가리키는 말일까. 우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의 편협적인 시선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바라보는 소녀상의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하니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프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나와 깊은 연관이 없는 지나간 달력 속 숫자들처럼 느껴졌다. 나는 차라리 공감되는 구절이 '우리는 하늘을 두껍게 덧칠한다'이지 '우리는 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까'가 아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지금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저기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의 좋고 나쁨이나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안다 모른다였다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우리에 깊은 공감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아프다와 아프지 않다 중에 아프지 않다라면 그 또한 나의 이야기가 된다. 


돌이켜보면 이 시가 가장 좋은 점이 절제된 언어로 감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시소도 철이고 동상도 마찬가지로 금속이다. 시의 제목이 시소의 감정인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덤덤해 보이는 시소가 알고 보면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속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시인이 소녀상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다. 시인은 짧고 간결한 단어 속에 몰래 어떤 이야기를 숨겨놓은 것이 마치 나는 주인이 장난감 속에 몰래 숨겨 놓은 간식을 찾아먹는 개가 된 것 같았다. 꽤나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던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자기가 있을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무질서
아무것도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 이것은 질서


이 구절 다시 보니까 멋지긴 한데 너무 부조리한 것 같고 엄격한 것 같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으면 무질서라고 하고,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없는 것을 질서라고 한다. 마치 한 인간의 주체성과 감정을 깡그리 무시한 것 같은 그런 문구처럼 들린다. 생각해 보면 한 인간으로 살다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무르다가 동상이 되어 무생물이 되어가는 지난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게 시소의 감정이란 시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마지막으로 들었다. 


이래서 뭐든 곱씹어보고 다시 보아야 하는구나,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다시 곱씹으니까 내가 왜 김지녀 시인을 대학생 때 열렬하게 좋아했는지 다시금 떠올랐다. 그때도 떠올랐고 지금도 떠오르는 시인이다. 무감각한 척하는 감각적인 시 같다. 시가 주는 글자 맛을 알려줘서 김지녀 시인에게 너무 감사한 그런 기분이다. 


그리고 나의 제목이 그때는 떠올랐고 지금은 안 떠오른다지만 바꿔야겠다. 그때도 떠올랐고 지금도 떠오르는 혹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었던으로. 그때 당시 나는 시소의 감정이란 시가 시적 표현으로 아름답다고만 느꼈지 이런 식으로 해석할 생각을 떠올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한 해석이 완전히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왜냐하면 내 해석이지 시인의 생각은 아니니까. 그래도 한 편의 게임을 클리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뿌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말없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