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담 Jun 13. 2024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 송종규 시인

들꽃처럼 아름다운 그의 세계

송종규 시인의 시집은 처음 접해봤다. 공중을 들어 올리는 방식이라니 이차방정식처럼 어떤 무겁고 진중한 느낌과 공중이라는 가볍고 보이지 않는 개념이 합해져서 기묘한 무게를 이루고 있는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을 대략 훑어봤을 때 받은 인상은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우며 쉽게 전달되는 좋은 시라는 점이었다. 쉽게 전달되면 감동이 덜하거나 단순해질 수 있는데 송종규 시인의 시는 작고 귀엽지만 어떤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 있다.


그의 시는 거침없거나 무뚝뚝하기보다 다정하고 섬세하며 아름다웠다. 그런 의미에서 밤 열 시는 헤어진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으로 잔잔하게 서술되는 것이 더 서글퍼지게 느껴지는 좋은 시였다. '엄마처럼 어둑해진다'와 '밤 열 시처럼 태연하게'라는 서술은 굉장히 감각적이고 멋진 표현이다. 시를 전공할 때 교수님이 시 전체에 그럴싸한 표현을 다 넣으면 그 말맛이 살지 않는다고 했다. 그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송종규 시인은 언제 힘을 줘야 하는지 잘 아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지만 연애의 감정보다는 개인의 고독 또는 혼란에 더 깊이 몰입한다. 나라는 인간으로 태어나 다른 사람과 사귀어보고 관계를 맺어갈수록 힘들고 더 고독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반응하고 힘들어하는가 늘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시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고 방황하며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시는 꼭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내가 고른 시는 트럼펫이다.



트럼펫



                       송종규

 


벽장이 열리자 호수가 나왔다 호수가 열리자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가 열리자 소복한 햇살이 나왔다 햇살이 열리자 애드벌룬이 나왔다 그것은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은 최상의 포즈로 솟구쳤다 그것은 불현듯 사뿐히, 내려앉기도 했다


이 공원에서 나는 나를 오래 오독했고 번번이 발을 헛디뎠다 내가 나를 나무랄 틈도 없이 생은 자주 빗나갔다


방이 열리자 벽장이 나왔다 벽장이 열리자 소복한 시간이 나왔다 시간을 열자 햇살과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를 열자 아주 두꺼운 문장이 나왔다 나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경이로운 소리들이 땅 아래 뿌리와, 공중에 뜬 초록 잎사귀들 사이를 오르내렸다 빛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방문을 닫아건다 나는 이제 안전하다

푸른, 빛들로 가득한 방



<출처, 공중을 들어 올리는 방식_ 송종규 시인, 민음사 2015>


-

벽장이 열리자 호수가 나왔다 호수가 열리자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가 열리자 소복한 햇살이 나왔다 햇살이 열리자 애드벌룬이 나왔다 그것은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은 최상의 포즈로 솟구쳤다 그것은 불현듯 사뿐히, 내려앉기도 했다 


벽장이 열린다니 마치 영화 어바웃 타임이나 나니아 연대기가 떠오른다. 어릴 적 나도 옷장에 많이 숨어봤다. 옷장 속 옷을 다시 집어넣는 것은 엄마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벽장을 열었더니 뜬금없이 호수가 나타났다. 이것은 드라마 도깨비가 문을 열었더니 캐나다가 나타난 것과 같은 이치다. 신비롭고 이색적인 경험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경험을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나온다.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로쉬카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벽장 속에서 호수가, 호수에서 느티나무가, 느티나무에서 소복한 햇살이, 햇살 속에서 애드벌룬이, 마지막으로 최상의 포즈까지. 전개가 낯선 듯하면서도 개연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서 점점 상승하는 이미지가 시간을 역행한다는 이미지도 주고 있다. 그런 와중에 마지막 구절은 아주 잔잔하게 내 마음에 다가왔다. 솟구치기도 하다고 불현듯 사뿐히 내려앉는다는 말이 좋았다. 마치 감정이 기뻐 하늘 높이 오르다가도 불현듯 깨닫고 사뿐히 내려앉을 줄 아는 어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이 어른의 감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자신이 만족스러운지 아니면 그냥 깨닫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늙은 자신이 한탄스러울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다만 내가 보기에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믿고 의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원에서 나는 나를 오래 오독했고 번번이 발을 헛디뎠다 내가 나를 나무랄 틈도 없이 생은 자주 빗나갔다


시 속 화자는 지금 호수가 있는 호수가 있는 공원에서 자신만의 사고에 빠져있나 보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에 너무 공감했다. '나는 오래 오독했고 번번이 발을 헛디뎠다'라는 구절을 보며 내가 떠올랐다. 나는 내가 경리 사무직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너도 나도 하길래. 그리고 그림이 좋아 배운 디자인은 실용을 추구하지 감성을 추구하진 않았다. 그래서 번번이 도전은 했지만 실패를 했다. '내가 나무랄 틈도 없이 생은 자주 빗나갔다'라는 구절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내가 나를 질책하기도 전에 이미 고용주가 나를 질책하고 자르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를 오독하고 내가 엉뚱한 답안지를 내서 0점을 맞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그들이 내게 겨운 칼날은 내 안에 깊게 새겨져 있고 나는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모르는 나무가 되어버렸다. 어제 김영하 소설가의 강연을 보았는데 지금 읽는 글이 공감이 된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진짜로 나는 오랫동안 방황해 왔고 오랫동안 아파했다. 나를 모른 채로.


방이 열리자 벽장이 나왔다 벽장이 열리자 소복한 시간이 나왔다 시간을 열자 햇살과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왔다 느티나무를 열자 아주 두꺼운 문장이 나왔다 나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경이로운 소리들이 땅 아래 뿌리와, 공중에 뜬 초록 잎사귀들 사이를 오르내렸다 빛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아까는 벽장에서 출발했는데 이제는 그 벽장이 등장인물로 바뀌었다. 나는 송종규 시인이 쓰는 화법이 되게 마음에 든다. 마치 예측할 수 없는 마술쇼 같다고 할까나. 또다시 러시아 인형 마트로쉬카 게임이 시작되었다. 벽장 속에 소복한 시간이, 시간 속에 거대한 햇살과 느티나무가, 느티나무를 속에 아주 두꺼운 문장이. 그리고 나는 그 문장 속으로 걸어갔다는 표현이 너무나도 멋졌다. 송종규 시인이 세상을 관찰하다가 시를 쓰는 길로 접어든 것을 이리 표현한 것 같다. 앞에서는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형체가 없는 시간과 문장이라 이렇게 대조되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경이로운 소리들이 땅 아래 뿌리와 공중에 뜬 초록 잎사귀 사이를 오르내렸단 표현 역시 멋지다. 경이로운 소리는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공간을 아우른다. 그래서 경이로운 것 아닐까. 우리는 소리를 흔히 지나치지만 시인은 소리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지 아는 것이다. 가령 아기가 옹알이를 하다가 언어를 뱉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빛들이 후두둑 떨어졌다는 것은 정말 이루어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빛이 마치 한 여름의 석류 알처럼 후두둑 우리의 곁에 떨어지는 것이다. 송종규 시인은 흔히 볼 법한 풍경을 아름답게 포장할 줄 아는 포장 예술가다.


방문을 닫아건다 나는 이제 안전하다

푸른, 빛들로 가득한 방


그렇게 시 속 화자는 한바탕의 여행을 마치고 방문을 닫아건다. 사실 여행은 다채롭고 구경할 것도 많고 행복하지만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안전하고 고요한 방 안에서 시인은 그동안 여행하며 건져 올린 풍경과 생각들을 건져 올린다. 마치 그것은 푸르고 동시에 빛들로 가득한 방이다. 정말이지 마지막 구절까지 완벽하다.


나는 시를 쓴다면 송종규 시인처럼 쓰고 싶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언어 속에서 새로운 순간을 폭죽처럼 터뜨릴 수 있는 그런 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