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5 : 절터와 수도원터, 사슴, 동그란 탑, 외국에서 온 불교 승려(자이나교 사원이 있는), 외국에서 온 신자) (사진 : 다메크 스투파, 한국 절 기도 – 석모도 보문사)
바라나시에서 아침을 먹고 자동차로 불교 4대 성지의 하나인 사르나트(녹야원)를 향해 갔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북동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해마다 인도 사람은 100만 명 정도가, 외국인은 40만 명 정도가 방문한다. 하루에 4천 명 정도가 이곳을 찾는 셈이다.
사람마다 장소에 따른 기억이 다르다. 내가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옛 절터의 규모가 매우 컸다. 위의 건물들은 사라졌지만 낮게 남아 있는 돌로 된 벽들과 바닥에 놀랐다. 한참을 걸어 다녀야 했다.
붓다 이전에는 3,000년 전 중앙아시아와 펀자브를 거쳐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주해 온 아리아인들이 브라만교를 믿고 있었다. 유목민이 농경민이 된 것이다. 당시 선주민인 피부가 까맣고 코가 뭉툭하며 얼굴 모양도 아리아인과 다른 드라비다족이 있었다. 아리아인은 태양, 번개, 불, 물 등 자연현상을 신으로 여겨 이들에게 소망을 빌고, 이들을 찬미하는 노래를 지었다. 이것을 모은 것이 베다이다. 철기 문명의 아리아인은 청동기 문명의 드라비다족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들이 믿는 브라만교는 문제가 많았다. 그중의 하나가 제사다. 유목민 출신인 이들은 제사를 지낼 때 수많은 소를 희생시켰다. 농경수단인 소를 뺏긴 선주민들은 불만이 많았다. 또 다른 문제는 아리아인이 카스트 제도를 들여와 선주민을 인종 차별한 것이다.
이 무렵 2,500년 전 붓다(부처)가 나타났다. 그는 이것들을 비판하면서 불살생과 인간 평등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해탈한 이후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설법을 베풀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붓다(부처)가 열반한 지 200년 뒤 북부 인도를 통일한 강력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이 이곳을 신성하게 여겨 대규모의 승원을 짓도록 했다.
이후 불교는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불교가 들어왔고, 이것은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
두 번째는 뜬금없는 사슴들이었다. 사슴은 한국이나 좀 더 서늘한 곳에서 살지 않나? 그런데 더운 나라의 옛 절터에 웬 사슴? 사르나트의 뜻은 ‘사슴의 제왕’으로 불교의 설화와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녹야원(鹿野苑)이라고 하는 사르나트는 영어로 ‘deer park’가 된다. 나트는 ‘높임’의 뜻을 가진 말로 힌두교, 불교 등의 사원에 붙여 쓴다고 네팔 가이드가 말해 준 바 있다.
세 번째는 유명하다는 탑이 동그란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둥근 탑의 이름은 다메크 스투파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이 기원전 249년에 붓다의 사리를 이 탑에 봉안하였다. 붓다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이후 최초로 이곳으로 옮겨와서 설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몇 여성들이 온몸과 온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맨발인 채 서서, 또 엎드려서 이들은 무엇을 빌고 있는 것일까? 스투파(stupa)는 중국, 한국, 일본에서 탑이라는 말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다보탑, 석가탑은 다보 스투파, 석가 스투파의 변용인 셈이다.
특히 입시철이 되면 우리나라의 절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도하면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일까? 한식, 추석이나 제삿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이나 가족의 무덤에 간다.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분들이 후손에게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