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을 사람”
내가 초등학생 때다. 나는 두 언니와 한방을 썼는데 밤이면 어김없이 라면이 생각났고, 언니 중 한 명이 선창을 외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야심한 밤에 라면을 끓여 와 방에서 먹었다. 안 먹겠다고 한 사람도 라면 냄새에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까 안 먹는다며! 이러면 양이 너무 부족하잖아! 담부터는 얄짤없어!” 금세 바닥을 보인 라면 냄비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큰언니가 이야기했다.
그렇게 라면 우정을 쌓다가도 언니들은 치고받고 싸우기도 잘했다. 나는 언니들과 7살, 4살 터울이 있어 그런지 싸운다기보다는 혼나는 쪽이었다. 하루는 작은언니가 큰언니의 새 옷을 먼저 개시했고, 이에 분노한 큰언니가 작은언니가 들어오자마자... 그 뒤의 상황은 상상에 맡기겠다. 그렇게 한바탕 몸을 푼 언니들은 서로 억울해하며 눈물을 쏟는다. “네가 먼저 때렸잖아” “그래서 결국 네가 더 많이 때렸잖아” 이러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서로 정리해 준다.
뭔가 서로에게 불만이 있거나, 언니에게 야단을 맞은 날에는 냉랭한 기류가 방안을 감싼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갑자기 서로 각자 책상 정리를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애꿎은 책상에 화풀이하듯 책을 탁탁! 두드리며 꽂고, 서랍을 탕탕 닫으면서 누가 봐도 나 지금 화가 난 걸 알리듯이 말이다.
그렇게 한 방에서 웃고 울고 지지고 볶던 둘째 언니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기쁨보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언니가 22살 때였다. 언니가 다른 집에 간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결혼식 전날 세 자매와 엄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늦은 시간까지 수다를 떨다가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군가가 “라면 먹을까?”를 외쳤고, 마다할 리 없는 우리는 라면을 먹었다. 그다음 날 결혼식 준비를 위해 미용실에 들른 엄마는 “따님 시집보낸다고 어젯밤에 많이 우셨나 봐요”라는 소리에 “아 네...”라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사실 우리는 전날 둘째 언니가 결혼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눈물보다는 옛날이야기 수다에 빠져 눈물 흘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딸 결혼식 전날 라면 먹고 자서 부었다고 말하기는 머쓱하지 않은가. 엄마가 이지경인데 둘째 언니도 마찬가지 상황. 하지만 얼굴이 붓는 이 상황을 알았다 해도 우리는 그날 밤 라면을 먹었을 거다. 그것은 뭔가 우리 세 자매의 시그니처 같은 행동이었으므로.
우리는 결혼식을 앞두고 가족, 친척끼리 식장에서 울지 말자고 약속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은 시작됐고, 결혼행진곡 노래에 맞춰 언니가 보이자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눈물을 감추려고 화장실로 달려가다 눈물을 삼키고 있던 막내 이모와 눈이 마주쳤고, 막내 이모 역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눈물이 전염돼 우리 집은 눈물바다가 됐다. 누가 보면 억지로 결혼시키는 가족인 줄 알 테지만, 외가 중에 첫 결혼식인 데다,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은 풍성한 감성 세포를 가진 집안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인사하러 들린 형부와 언니는 저녁을 먹고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언니가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언니 집은 여기인데 말이다. 10대였던 나는 8살이나 많은 형부가 나의 친구이자 언니를 빼앗은 것 같아 언니의 빠른 결혼을 원망했다. 형부가 한눈에 반할 만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언니는 뭐 때문에 그리 일찍 결혼한 건지 궁금했다. 남들은 모르는 둘째 딸의 서러움이 언니를 이렇게 빨리 결혼하게 만든 걸까? 나중에 나이를 먹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언니는 왜 그렇게 빨리 결혼했어?”
“사실 나는 엄마가 반대할 줄 알았는데, 엄마가 허락해 줘서... 그냥 했어”
“뭐라고!? 그럼 엄마가 그때 안 된다고 했으면 결혼 안 했어?”
“아마도...?”
“그럼 엄마는 22살에 결혼하겠다는 언니를 왜 안 말렸어? 그렇게 일찍 보내고 싶었어?”
“키우면서 안 된다고만 했던 게 많은 거 같아 미안해서 결혼이라도 자기 맘대로 하게 하고 싶어 알겠다고 했지”
“무슨 청개구리 스토리도 아니고! 언니는 그럼 그냥... 결혼한 거네...”
둘째 언니는 큰 키와 단아한 얼굴에 착하고 성격도 좋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회사에서 평판도 좋았던 터라 나는 언니가 멋진 커리어우먼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언니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됐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쁜 딸을 낳았다. 나의 첫 조카의 탄생이었다. 언니를 좋아했던 만큼 언니의 딸, 내 조카가 세상 너무 예뻤다. 정말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첫 조카에 푹 빠져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언니는 연년생으로 딸을 낳았고, 난 그렇게 두 번째 조카를 만났다. 천사가 한 명도 아닌 둘이라니.
그렇게 언니는 20대를 육아에 바쳤다. 일을 하는 나를 보며 언니는 부러워하기도 했다. “결혼 일찍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말도 가끔 해주었다.
둘째 언니의 딸들은 언니가 결혼했던 20대 초반의 나이가 됐다. ‘젊은 엄마’ 언니는 어린 자녀가 화장하는 거에 대해 혼내지 않았다. 몰래 밖에서 하지 말고 집에서 하고 나가게 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접 알려줬다. 졸업식 때면 조카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집보다 젊은 엄마, 그리고 젊은 이모, 삼촌이 있는 게 좋았다고 한다. 누가 엄마인지, 딸인지 허물없이 지내는 둘째 언니와 두 딸, 세 사람은 솔메이트이자 친구 사이가 됐다.
큰언니는 성인이 되자 독립했다. 큰언니는 어렸을 때도 나에게 어른 같은 존재였다. 나이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언니의 태도가 어른스러워 보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작은 언니랑 목욕탕을 가면 찬물에서 놀다 만 왔는데, 큰 언니가 같이 갈 때면 온탕에서 몸을 불리고 때도 착실히 밀고 제대로 목욕해야만 했다. 작은언니랑은 말썽을 같이 도모했어도, 큰언니가 있으면 군기가 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언니였기에 언니가 독립한다고 했을 때도 어른의 선택이라고 생각됐다.
큰언니는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고, 엄마에게 허락받고 동거를 시작했다.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가족이었다. 그러다 큰언니는 마흔을 앞두고 결혼식을 올렸다. 큰언니의 결혼식을 둘째 언니 때와 매우 달랐다. 이미 가족 같은 언니와 형부가 결혼식을 올리는 거였기 때문에 스몰웨딩 형식으로 친한 사람들만 초대해 파티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우리는 신나는 음악에 춤도 췄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큰언니와 형부는 여행 다니기 좋아했고, 야식도 좋아했다. 둘만 살아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져보려고 노력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고, 병원에서도 이제는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원래 둘이서도 잘 살았던 두 사람이라 아이 없이 잘살고 있는데,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왔다. 나의 세 번째 조카의 탄생이었다.
마흔을 넘겨 임신한 큰언니는 노산이었던 만큼 더욱 철저하게 관리했고, 그 좋아하던 밀가루와 소시지, 맥주를 단칼에 끊었다. 임신성형이라는 말이 있다던데, 정말 그 말처럼 큰언니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큰언니와 형부는 조금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힘에 부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언니보다 살림 솜씨가 더 좋은 형부가 육아휴직을 내고 조카를 돌볼 정도로 형부는 딸바보였다. 조카라면 껌뻑 죽는 나를 보며 “처제~ 조카도 이렇게 예뻐하는데 처제 자식이면 얼마나 더 예쁘겠어~”라며 은근슬쩍 결혼 압박을 줬던 형부가, 요즘엔 조카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를 보며 “처제~ 일 오래오래 해야 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언니들 덕분에 육아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고, 내 딸 같은 조카들의 성장에서 오는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늦게 결혼하는 것도, 결혼을 아직 하지 않은 것도, 100% 완벽한 선택은 없다.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충실할 뿐이다.
역시, 결혼엔 정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