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를 닦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배우는 것은 날마다 유명을 더하는 것이다. 반면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유명을 덜어내는 것이어서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서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면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다.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사람들을 간섭하지 않는 무사(無事)로써 해야 할 것이며 급기야 유사(有事)로써 한다면 천하를 얻는데 한참 부족할 것이다. (제48장)
배우는 행위는 고대 성인의 가르침인 유학의 개념을 익히는 것으로 그것을 달달 외워서 누군가가 경전에 담긴 성인의 말씀에 대해 그 뜻을 물어 오면 막힘없이 줄줄 답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벼슬자리 하나 얻을 수 있는 옛날 유생들의 아주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들이 왜 배우는 행위를 그다지도 중요하게 생각했느냐 하면 ‘인(仁)’이라든지 ‘예(禮)’라든지 하는 개념을 완벽하게 익혀서 우리 삶에 적용하는 유교의 원리를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요순시대(堯舜時代) 같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꾼 것이었다. 그래서 과거 유학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행위를 유교적 교리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유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한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응징을 가한다. 인간의 행위가 유교적 관점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질게도 인간의 본성을 억압해 왔다.
이 세계를 경전에 나오는 몇 개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개념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패러다임을 바꾸어 가면서 새로운 개념을 찾아내고 축적하는 것만이 이 세계를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옛날 조선 사회는 유교의 개념에 경도된 나머지 이 세계에 대한 탐구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개념 너머에 있는 무명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인의 말씀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데 인생을 바치고 있다.
인간의 감각은 그 감각을 작동시키는 개념이라는 ‘드라이버’가 있어야 무명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드라이버’는 기존 감각을 작동시키던 개념을 버리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는 소프트웨어적인 것으로 항상 업 데이터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道)를 일컬어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을 덜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덜어내어야 비로소 무명의 세계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명의 세계에서 특징, 유사점을 포착하여 새로운 관점이 생겨난다. 인간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지금 AI가 작동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결국 인간이나 기계나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듣기 불편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노자는 천하를 얻고자 하면 무사(無事)로써 하라고 한다. 리더는 반드시 구성원들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어야 원하는 것을 얻는데 부족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무사(無事)는 ‘간섭하지 말라’ 또는 ‘일을 주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전체 맥락상 무리가 없다.
직장은 사실 내가 찾아서 하는 일보다 위에서 내려오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아마 비율로 따지면 8대2 정도 또는 9대1 정도로 하명(下命) 업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다 보니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일들은 항상 뒤로 밀리기 십상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업무를 쳐내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상사들은 늘 부하 직원들에게 업무를 봐준다면서 이런저런 간섭을 한다. 심지어 담당 직원이 잘하는 일조차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뭉개버리기도 한다. 상사의 지시가 불합리해서 그 직원은 입이 나올 법도 하지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직원은 지금까지 해오던 일은 폐기하고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한다. 그렇게 일에 치여 있다가 상사의 간섭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반항 비슷하게 토를 달아 보지만 그때마다 상사는 화를 버럭 내거나 말은 안 하지만 버릇없는 놈으로 낙인을 찍는다. 회사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처음 회사에 입사해서 이런 경우를 몇 번 당해보면 그냥 상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신상에 좋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혁신은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일선 직원에게서 나오는 법이지만 말단 직원은 항상 일이 너무 바쁘다. 윗사람들은 혁신보다는 조직의 안정성을 우선시한다. 그러나 그 조직의 안정성이란 것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개가 윗사람들 자신의 체면을 구기지 않아야 한다거나 자신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들에게 조직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옛날 가부장적 상하 종속 관계로 이루어진 관료조직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던 조선 사회가 분명 이러했을 것이다. 조선말에는 급기야 유사(有事)해서 나라가 망한 것이다. 천하를 얻기에 한참 부족했다는 말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런 노자의 우려 섞인 말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현재 중국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생산성 향상으로 늘어난 부가가치를 통화(通貨)라는 지표에 담아놓은 것으로 유럽에서 발전하여 미국에서 완성된 이 시스템은 군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노자의 가르침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는 혁신(革新)은 반드시 무위(無爲)의 정신에 입각한 자율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기득권이 쳐놓은 규제의 장벽에 막혀 혁신은 애초부터 싹이 틀 수 없는 구조였다. 왜 이런 구조를 만들어야 했을까. 민간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결국 같이 망한다는 걸 몰랐던 것인가.
아직 우리 주변의 많은 사회 조직이 가부장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혁신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혁신이 일어나지 않으니 신(新)산업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공동체가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지 못하니 사람들은 기존 산업을 놓고 밥그릇 싸움에 직장도 국가도 터져나갈 지경이다. 신산업이 일어나서 공동체 전체의 파이를 키우면 기존 산업에서 밀려난 인력을 흡수할 수 있는데 우리의 자본주의는 아직 이런 매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현재 지구상에서 노자의 도(道)가 작동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는 없는 듯하다. 가부장적 종적 질서는 일시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 가능한 성장 모델은 아니다. 가부장적 상하 종속 관계로 이루어진 관료주의는 자율성과 혁신을 가로막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적(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