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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Mar 02. 2024

古典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不尙賢, 使民不爭.

현자를 우러러보지 않게 하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을 것이고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히 여기지 않게 하면 백성들은 남의 것을 훔치지 않을 것이며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보고도 욕심내지 않게 하면 백성들은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이 때문에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뜻을 누르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항상 백성들을 무지 무욕케 하고 무릇 좀 안다는 자들이 감히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면     

爲無爲, 則無不治.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스려지지 않는 법이 없다.(제3장)


 여기서 현자라 함은 공자, 부처님 할 것 없이 노자 자신까지 포함한 모든 성인을 말한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성인들의 말씀조차 우리를 서로 다투게 한다고 한다. 따라서 노자는 성인의 가르침보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계나 삶을 충실히 살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국의 낯선 땅 조선을 다녀간 미국인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그의 저서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통해 당시 서양인들이 갖고 있던 ‘우상숭배’에 대한 보편적 생각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서양인들은 대부분 우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자라 왔다. ‘우상을 숭배하는’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외에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도 외부의 상징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사용해 왔다. 서양인은 고대 유대인이 지어낸 괴물에 익숙해 있으며, 그 괴물들은 오늘날 야만족 사이에서나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초기의 카톨릭 선교사는 동양을 여행하는 길에 극동의 종교를 서양에 가져왔으나, 문제는 우상이 고대에나 존재했다는 점이다. 로마 카톨릭에서처럼 불교라는 문명화된 종교에도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불교 신자가 서양에서 우상이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무언가를 숭배한다고 한다면 이는 로마 카톨릭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무엇을 믿는가를 정확히 가려내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문제이다. 더군다나 신앙이 외적으로 표출될 때 그 어려움은 더 커진다. 정신은 알 수 없는 사이에 감각에 호소하고, 진정한 신앙에 의상을 입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외부적 표현을 만들어 내는 일을 엄격히 금하는 이슬람교를 제외하고, 어떤 신앙에서 이러한 외부적 표현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즉 그림이나 동상은 마음의 투영이며 보이지 않는 무엇을 생각하게 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그것은 눈물이 우리 뺨을 흘러내릴 때까지 우리가 응시하는 부재중인 친구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림을 보고 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상기시키는 생각 때문에 우는 것이다”라는 인도의 어떤 불교 신자가 한 말은 신앙의 외부적 표현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서서히 자기가 파악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하게 되고, 사실 그가 경배하는 것이 그림이나 동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마침내 경악한다. 신앙의 좀 더 높은 경지는 계속해서 더 먼 곳을 보지만 대다수는 모든 의도와 목적이 우상숭배로 떨어진다. 그 신앙이 불교건 기독교건 이는 서로 별개인 두 믿음의 순수성이나 장엄함과는 관계가 없다.』

 퍼시벌 로웰은 서양인 대부분이 우상숭배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자라 왔고 어떤 종교의 가르침도 우상숭배로 떨어질 충분한 여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서양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신앙의 실제 가르침’과 그 ‘외부적 표현’을 혼동하지 않도록 무척 경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는 새 왕조가 들어서거나 망해 갈 때면 항상 좀 안다고 하는 자(夫智者)들이 이상사회라는 걸 인민들에게 제시한다. 청나라 말기에도 좀 안다는 자가 있었다. 강유위(康有爲)는 당시 서구 열강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중국을 재건하기 위해 과감한 제도 개혁을 단행한다.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強運動)이 그것이다.

 그의 궁극적 이상은 ‘대동사회(大同社會)’ 건설이다. ‘대동(大同)’이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대도(大道)가 행해졌던 요순시대(堯舜時代)의 이상사회로 그때에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어서 재산을 공유했기 때문에 권모술수가 없고 도적이 없어 사람들이 대문을 잠그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회였다. 말하자면 원시공산사회(原始共産社會)인 셈이다. 이 대동사회에 근거하여 강유위는 더 나아가 국가가 소멸하고 세계가 하나의 통일 정부에 의해 통합되는 사회 즉 계급, 인종, 남녀의 차별이 없고 빈부의 격차도 없으며 가족제도마저 해체되는 이상사회를 그렸다. 이런 사회는 역사시대 이래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유토피아적 이상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유위가 대동사회를 그린 것은 당시 청나라의 운명이 망국의 상황에 몰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00일 만에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난 후 1958년 소련이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하자 이에 자극받은 모택동은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하자’는 구호로 맞불을 놓는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훌륭히, 더 절약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라는 총노선을 확정하고 공업과 농업 생산의 목표를 세운다. 토법고로, 천리마 운동, 새벽 별 보기 운동을 벌이며 사람들을 동원한다. 그러나 이 운동 역시 3천만 명이 넘는 아사자를 내고 막을 내린다.

 노자는 성인(군주)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대동사회, 사회주의 건설 같은 구호로 사람들을 선동하지 말고, 백성들이 자신의 생계와 삶을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라. 무릇 좀 안다고 하는 자들이 감히 무얼 하지 않게 하라. 그러면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여기에 딱 들어맞는 군주상이 바로 ‘백성들은 그가 있다는 것만 알게 하는 군주’이다(太上下知有之). 사실 필자가 보기에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어떤 가르침도 우상화로 떨어질 염려는 없어보인다. 우상화가 필요한 시대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전제국가나 기득권적 신분사회에서는 늘 우상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보면 어떤 종교적 신념이나 사상적 편향성은 그 사회의 비정상화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비정상의 다른 말은 획일성이고 정상의 다른 말은 다양성일 것이다.


 인간의 편향성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인간적인 것이고 보편적이다. 모두가 좋아할 것처럼 보이는 말이나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기 싫어는 말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의 편향성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대화중에 사람들이 하는 말에 "페인트칠한 게 아니고?"라고 되물어보는 식으로 리액션을 잘하는 편인데 어떤 사람은 그 리액션에 살짝 발끈하면서 '왜 너는 내말을 믿지 못하냐'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대개 사람들은 나의 리액션에 흥을 내면서 더 신나게 말하는 편이지만 그게 아니고 어떤 이는 살짝 자신의 말을 의심하냐는 듯한 눈초리를 보내다가도 나와 조금만 더 얘기해 보면 내가 전혀 그런 의도로 되물어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제대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땐 정말 난감하기 그지 없다. 이처럼 각자에게 쌓이는 데이터는 매우 우발적이며 특별한 상황에서 얻어진다.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유가 이런 인간의 편향성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균형잡힌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다양성을 추구할 이유가 없다. 가중치와 편향값을 갖고 있는 뉴런과 뉴런 사이의 시냅스처럼 사회의 구성원도 편향값을 갖고 있다. 자유로운 사회의 개인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각자의 데이터가 쌓이고 "데이터가 쌓인다"는 말은 이 시냅스나 구성원의 가중치와 편향값이 정확해진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도 개인에게 쌓인 데이터가 그대로 집단지성으로 발현되는 것이 다양성의 원리이다.


 그러나 최근 이 '다양성'에 대해 논쟁이 한창이다. 테슬라의 CEO인 일론 머스크가 트위트에 올린 글로 연일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이 논쟁의 정확한 전말은 알 수 없으나 머스크 본인이 운영하는 'X'(구 트위트)가 표현의 자유를 위해 논필터링 정책을 쓴 것이 미국 민주당의 계열의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상대를 악의적으로 비난하거나 혐오하는 발언이 아니면 글을 무제한으로 올리도록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다양성'에 대한 의견 충돌인 것으로 보인다. 논필터링 정책이 오히려 가짜뉴스를 양산해서 더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논필터링 정책을 바꿀 의향이 없어 보인다. 인위적인 필터링이야말로 편향성을 증폭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류의 집단지성(능)은 인간과 인간의 연결을 강화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이건 마치 뇌의 뉴런과 뉴런의 연결을 강화해서 더 정확한 예측을 하는 거와 같다는 데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필터링하지 않은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쪽의 말이 맞는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지만 우리와는 고민의 지점이 살짝 다르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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