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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Apr 20. 2024

고립된 동아시아

동아시아에서 과학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 3

民之饑(민지기) :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以其上食稅之多(이기상식세지다) : 위에서 세금을 너무 많이 걷기 때문이다 

是以饑(시이기) : 그 때문에 굶주리는 것이다 

民之難治(민지난치) :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以其上之有爲(이기상지유위) : 윗사람이 뭔가를 도모하기 때문이다 

是以難治(시이난치) : 그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民之輕死(민지경사) :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以其求生之厚(이기구생지후) : 사람들이 삶의 두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是以輕死(시이경사) : 그 때문에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夫唯無以生爲者(부유무이생위자) :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은 

是賢於貴生(시현어귀생) : 삶을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낫다 (제75장)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으로 치우쳐 있고 서쪽으로는 높은 산맥과 사막으로 가로막혀 있어 지리적으로 서쪽 문명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대륙은 유럽처럼 복잡한 해안선이 없이 단조로운 지형을 갖고 있다. 분열하기보다 통일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즉 구심력이 원심력보다 강하다. 중국이 주변의 이민족을 모두 한족으로 동화시키면서 지금과 같은 거대한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리적, 지형적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고대 중국은 주변 이민족에 비해 월등히 앞선 나라는 아니었다. 하(夏), 은(殷), 주(周) 모두 서융(西戎), 북적(北狄), 동이(東夷) 같은 이민족의 위협에 항상 시달려 오다가, 급기야 BC 8C 견융(犬戎)의 공격을 받아 주(周) 유왕(幽王)이 죽고 낙읍(洛邑)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동천(東遷)한 주나라는 더 이상 제후국을 다스릴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때부터 제후국은 주나라를 대신할 천하의 패자가 되기 위한 경쟁 체제에 들어간다. 우리가 잘 아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서막이다.

  이전의 주(周)의 봉건제(封建制)는 천자(王), 제후(公), 경(卿), 대부(大夫)가 서열을 이루는 피라미드형 권력 구조였다. 이들의 작위는 모두 세습되었다. 공경대부(公卿大夫) 같은 귀족은 땅을 하사 받았고, 농공상(農工商)이라 불리는 서인(庶人)은 귀족에 예속되어 있었다. 봉건제도 하에서 신분 상승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士)라고 불리는 계층의 지위는 좀 특별했는데, 그들은 약간의 땅을 하사 받았지만 세습되지는 않았고 그의 자식이 다시 사(士)가 되면 그것을 이을 수는 있었다. 그들은 귀족과 서인의 중간에서 실질적인 사무를 보는 사람들이었다.

  춘추전국시대가 되자 드디어 그들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자신을 중용하고 좋은 대우를 해주는 주군을 찾아 원래 속해 있던 영지를 떠나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공(功)을 세우면 농민에게도 작위와 토지를 주었다. 계층 상승의 기회가 폭넓게 주어졌다.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출현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은 유럽처럼 역동성이 넘치는 시대였다. 각 나라의 지배층은 이웃 나라와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자연히 자국의 정치, 경제를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이처럼 역동적인 시대는 없었다. 물론 이 시대에도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 분명 있었고, 이들이 국정을 주도하긴 했으나 부국강병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는 제후 그 자신조차 자신의 이권을 노골적으로 챙기는 행태는 적어도 자중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충실했던 나라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후 5호 16국 시대에 잠깐 중국인의 역동적 DNA가 살아나는 듯했으나 춘추전국시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秦나라가 통일을 완수하면서 이제 통일 제국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은 사실상 사라진 셈이니 내부의 적만 잘 감시하면 될 일이었다. 이미 하나로 통일된 이상, 제국은 더 이상 이웃 나라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적, 물적 개방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 역사상 최초의 군현제(郡縣制)이고, 중앙집권제의 시초이다. 이것이 이후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게 한 관료제(官僚制)의 탄생이다. 이 관료제가 동아시아에서 기득권이 폭발적으로 득세하게 되는 기폭제가 된다. 이전의 周나라의 봉건제가 연방국가 형태였다면 秦의 군현제는 완전한 중앙집권제 국가이다.

  진(秦)을 이은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고 이 시대는 귀족계층의 이전의 봉건제에서 누리고 있던 특권적 지위가 새로운 국가체제인 관료제라는 시스템으로 옮겨가는 시기이다. 처음부터 귀족들이 군현제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봉건시대 누려오던 기득권을 더 이상 세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몇 차례의 반란과 토벌을 거듭하다가 吳楚7국의 난을 끝으로 군현제가 정착된다.

 이후 중국은 관료제 국가로 바뀌었고, 이전의 봉건제 하의 공, 대부 같은 귀족 계급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관료제에 적응해야 했다. 그 해결책이 바로 관리 선발에서 일반 백성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손쉽게 관리에 진출할 수 있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관료제의 관리들은 한나라 때는 찰거(察擧)라는 추천제로 관리를 뽑았고 위진남북조시대에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는 계급제를 통해 관리를 뽑았다. 구품중정제는 가문에 구애됨이 없이 개인의 재능과 덕망에 따라 관리에 임명하자는 것이 원래의 취지였다. 그러나 중정직에 임명되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지방의 유력자들로서, 향품을 정할 때 동료나 중앙의 대관으로부터 청탁을 받고 유력자의 자제는 후하게, 무력자의 자제는 박하게 매기는 폐단이 발생하게 된다. 이 제도는 오히려 귀족 계급에게 유리하게끔 운영되어 귀족 제도의 견고한 하나의 지주(支柱)가 되기에 이른다. 문벌에 관계없이 인재를 널리 등용한다는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호족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게 하는 길을 터주게 되어 결국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기득권적 귀족 계급을 형성한다.

  수·당대에 이르러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시행되면서 계층 상승의 길은 넓어지는 듯했다. 나라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만 하면 관직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험 하나로 신분이 바뀔 수 있으니 경쟁은 치열해졌고 시험도 갈수록 어려워졌다. 명석한 사람도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려야 겨우 합격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이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계층 상승의 길은 열려있으나 오직 한 길이었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통일국가의 군현제는 원래 취지와는 다르게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온 과거제로 인해 신분 상승의 기회는 훨씬 좁아졌고, 설상가상으로 통일국가의 체제 안정을 위해서 농본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자본 축적에 유리했던 상업 활동을 중과세로 불리하게 하여 원천적으로 상공업 활동을 못하게 하니 오직 농사만 짓고 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동아시아가 과학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를 찾자면 군현제와 과거제, 농본주의 등 이런 것을 지목할 수 있겠지만, 군현제와 과거제는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통일국가라는 폐쇄된 체제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을 뿐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물론 '농본주의의 표방'은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의도대로 정확히 잘 작동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군현제 원래의 취지와 달리 파행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던 그 요인이 동아시아가 과학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이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통일국가'였다. 통일국가의 지향이 바로 동아시아가 기득권 사회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이다. 통일국가 하에서 운영하는 관료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체제 안정을 위해 선택한 농본주의 국가체제로는 그 농업생산력이 관료들에게 지급할 녹봉마저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는 실로 심각해서 관료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빈번히 일어나는 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자리를 놓고 관리들끼리 당파를 이루어 대립하다가 마침내 어느 한 쪽이 승리하면 그 당이 자리를 독점하는 식이다. 이런 체제 내부의 자리싸움이 19세기까지 반복된다. 관료제 하에서는 어느 유력한 특정 직위를 중심으로 끼리끼리 모여서 파벌을 형성하고 그 파벌들이 벌이는 권력투쟁은 한 개인으로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인 만큼 자연히 권력투쟁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극단적인 권력투쟁은 다시 평민들의 신분상승의 기회가 더 좁아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통일국가의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서 일단 농업국가를 선택하였다. 그들이 상공업을 중과세로 왜 억압했냐면, 일단 지배권력 자신의 경제적 기반이 토지였고 백성들을 토지에 묶어둘 수 있는 손쉬운 이점이 있다는 것 외에 혹여 토지를 떠난 사람들에 의해 예상치 못한 모처럼 생겨난 상공업은 자칫 자신들의 토지를 통한 지배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체제분해요소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상업 활동은 자본 축적이 농민보다 훨씬 유리하고, 공업은 새로운 생산수단의 발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상업자본가와 새로운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의 등장은 당연히 기존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과학은 사회 계층 분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과학은 새로운 생단수단을 제공한다. 노자의 '無爲而無不'나 '爲無爲卽無不治'는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노장사상이 유교보다 현대성이 강하다고 하는 이유이다.

 결국 중국이 ‘통일국가’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동아시아의 ‘지리적 고립’과 중원이라는 강한 '구심력'에서 주변국의 정체성을 지켜 줄 수 있는 자연 장벽이 없는 ‘단조로운 지형’이 만들어 낸 필연의 결과였다. 동아시아의 단조로운 지형은 漢--唐-宋-明-靑이라는 폐쇄적인 거대한 통일국가만을 2천 년 동안 양산해 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 서양諸國과의 조우는 동아시아의 패배가 자명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동아시아만을 국한해서 얘기했지만 인도, 중동도 동아시아가 걸어온 역사적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도의 뿌리 깊은 카스트제도,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의 신정정치는 이들 지역이 거대하고 공고한 기득권적 사회이고 그것이 아직도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들 지역은 우리 한국사회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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