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 과학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 4
知人者智(지인자지) :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우나
自知者明(자지자명) : 자신을 아는 사람이 밝다.
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 :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지만
自勝者强(자승자강) :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강하다.
知足者富(지족자부) : 족함을 아는 사람은 편안하지만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은 뜻하는 바가 있다.
不失其所者久(불실기소자구) :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오래간다.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 죽을 때까지 그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수명이 길다. (제33장)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삶의 굴레였던 “농본주의”와 “효”의 기원에 대해서 탁월한 견해를 제시한 김성호 박사의 견해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의 통찰은 공자의 “효”사상과 백성들을 땅에 묶어두기 위한 경제시스템인 “농본주의”가 어떻게 결합해서 우리 삶을 짓눌러 왔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봉건제였던 유럽과 일본에 있어서 토지의 제1차 소유권자는 봉건영주여서, 이들은 자기 땅을 경작하는 농가의 경영규모를 안정시키기 위해 장자상속 또는 일자상속(一子相續)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그 결과 농업에서 배제된 2, 3남은 자연 본가를 떠나 삶을 개척하게 됨에 따라 이들이 모이게 되는 도시에서는 개인주의를 기초로 한 상공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탄생하고, 일본이 우리보다 한발 앞서 상공업이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 반해 한중 두 나라 토지제도는 역사적으로 토지를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분할상속제였다. 모든 자식에게 효도를 강요한 데 따른 당연한 보상 시스템이었고, 땅을 받은 자식들은 죽으나 사나 농사를 지어야 했다. 이것이 집권제 하의 경제 질서였던 농본주의였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원시공산제로부터 시발된 ‘아시아적·고대적·봉건적·자본제적’발전단계에 있어서 아시아권이 농본주의로 고착되어 온 것은 “통일체(국가)만이 상위의 소유자 또는 유일의 소유자일 뿐. 개인적인 소유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했지만, 실은 국유제도 아니었고 상공업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가족농적 농본주의는 씨족체제를 개별농가로 전환시킨 진나라 ‘상앙(BC 390~338)의 변법’에서 비롯된 후 진시황의 천하통일(BC 221) 이후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농사가 백성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취한 조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사마천은 《사기》 권129 화식열전에서 “무릇 가난한 자가 부를 얻으려면 농업은 공업만 못하고 공업은 상업만 못하다”고 하여, 산업이 〈농→공→상〉으로 변해야 돈벌이에 유리하다는 근대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Petty)의 경제발전 법칙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이 농본주의를 따르지 않자, 한나라 효문제는 동왕 13년(BC 167) 정월에 “농은 천하의 본이어서 그 임무가 막급하다. 농부를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서도 조세의 부담은 본(本 : 농업)과 말(末 : 상공업)이 전연 동일하니 권농의 도가 마련되겠는가. 전세를 경감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처럼 농본주의란 농업을 적극 개발한 포지티브한 정책이 아니라 실은 농업보다 유리한 상공업을 중과세로 불리하게 만들어 놓고 농업으로만 살라는 일종의 네거티브 시스템이었다.
이것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20C까지 계속된 역대 왕조의 “권농억말(勸農抑末)” 즉 ‘농을 권하고 말을 억제’한 농본주의의 내막이다. 그럼에도 법망을 뚫고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면 으레 감행한 것이 진 무제의 호조식(戶調式, 282), 수 문제의 균전제(均田制, 598), 명 태조의 이갑제(里甲制, 1369) 그리고 공산중국이 단행했던 토지개혁(1949)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기말이반본(棄末而反本)” 즉 ‘말을 버리고 본으로 복구’하는 반동정책이었다. 이로써 모처럼 발생된 상공업마저 농업으로 환원되어 천년을 하루와 같이 농민만이 재생산된 것이었다.
이러한 농본주의를 이념화한 것이 한 무제가 동중서(董仲舒 : BC 179~120)의 건의를 받아들여 배타적인 통치이념으로 확립한 공자의 가르침 즉 효를 근간으로 한 유교였다.
언뜻 볼 때 농본주의와 공자의 효 사상은 전연 별개처럼 보이지만, 실은 표리의 관계였다. 농본주의는 원래 가족농이었고, 가족농은 가족의 영속성 위에 존립되는 생산 활동이므로, 가족의 영속성을 윤리화한 덕목이 다름 아닌 효 사상이다. 따라서 ‘효’란 한마디로 말해서 아버지의 땅을 상속받기 위한 자식들의 사전봉사였으며, 땅을 물려준다는 명분 아래 강요된 의무가 다름 아닌 ‘효’였다.
오늘날 산업의 개방으로 농민의 자녀들이 돈벌이 좋은 도회지로 빠져나가자, 가족농의 버팀목으로 지탱되어 오던 ‘효’도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직장보험에 입각한 고령자 복지제도가 ‘효’를 대신하게 된 것을 보아도 공자의 ‘효’가 만고의 진리가 아니었음이 결정적으로 확인된다. 결국 효는 농본주의 이데올로기였다가, 가족농의 쇠퇴로 빛을 잃고 말았다. 공자는 “죽어야 한다”가 아니라 실은 역사적 사명을 다한 것이다.
그리하여 효와 공자를 제아무리 목청 높여 외쳐보았자 저무는 해를 막지는 못한다. 날로 넘쳐나는 파고다 공원의 노인들 군상을 보지 못하는가. 이제 노인들은 효의 대상이 아니라 호불호와 관계없이 사회 정책적 대상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1970년대에 H. 칸이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가 마치 경제 성장의 원동력처럼 외쳤지만, 실은 동아시아 몬순지대의 쌀농사로 창출된 과잉인구가 살인적인 저임금으로 초기의 공업화를 유리하게 했을 뿐 유교 그 자체가 경제 성장을 촉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의 가난과 정체성은 지난 천여 년 간 공맹론을 우리 본래의 문화적 전통으로 착각하고, 직업의 횡적 분화와 인간의 평등을 모질게도 억제하면서 상하종속의 신분 질서를 강요해 온 유교주의적 집권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