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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May 12. 2024

명태조의 해금정책 1

동아시아에서 과학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 6

將欲取天下而爲之(장욕취천하이위지) : 천하를 취하고자 하지만 

吾見其不得已(오견기불득이) : 내가 보건대 필경 성공하지 못한다. 

天下神器(천하신기) :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니 

不可爲也(불가위야) : 함부로 취할 수가 없다 

爲者敗之(위자패지) : 하고자 하면 실패하고 

執者失之(집자실지) : 잡고자 하면 잃는다. 

故物或行或隨(고물혹행혹수) : 사물은 혹 앞서기도 하고 혹 뒤에서 따르기도 하고 

或歔或吹(혹허혹취) : 숨을 천천히 쉬기도 하고 빨리 쉬기도 한다. 

或强或羸(혹강혹리) : 강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약한 것도 있고 

或挫或隳(혹좌혹휴) : 꺾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것도 있다 

是以聖人(시이성인) : 따라서 성인은 

去甚去奢去泰(거심거사거태) : 지나친 극단을 피한다. (제29장)


「주원장(朱元璋)은 회수상류의 안휘성 종이(鍾離縣:風陽縣) 출신이다. 17세 때 황각사(皇覺寺)의 소승으로 삭발한 그는 25세가 되던 지정 12년(1352)에 미륵파를 대표하는 홍건적의 곽자흥(郭子興)에 가담했다가 분립하여 세력을 잡은 후 장사성(張士誠)과 방국진(方國珍)의 방장집단을 차례로 석권하고, 황건족의 난으로 이미 형해화되어 있던 북경의 원나라를 손쉽게 물리쳐 천하대권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주원장의 집권가도에 걸림돌이었던 것은 바로 장사성·방국진으로 대표되던 해상세력이었다. 더더욱 그는 고려에 보낸 한 조서에서 "나는 일개의 농민으로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我是一介農家 與我中原作主)고 자처할 정도의 소농출신이었기 때문에 해상집단과의 대결은 운명적이었다. 따라서 그의 건국이념은 자연 해금정책을 전제로 하는 농본주의에로의 복고였다.

  즉 천하를 통일한 진무제가 그러했고, 수문제가 그러했득 주원장도 정통왕조의 기본노선에 따라 "기말이반본"(棄末而反本) 즉 "말"(상공업)을 버리고 "본"(농업)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토지만이 진정한 의미의 가치를 생산한다. 이것이 원나라 치하에서 한 세기 동안 중국대륙을 온통 분탕질하여 백성과 땅이 괴리되어 버린 중국경제의 유일한 재생방도였다.

  주원장은 즉위하자 곧 "백성들 중에서 농민들이 가장 근로하고 가장 고생한다. 봄날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소를 몰고 들에 나가 밭을 간다····· 국가의 부세는 모두 농민들로부터 나오지만 이것은 모두 농민들의 집안일이다. 국가가 부강하려면 필히 농민들을 안거낙업(安居樂業)하게 해야 능히 가능하다"(「明太祖實錄」)고 역설하였다.

  주원장이 노린 농본주의에로의 길은 정치적·경제적 최하 단위인 향촌(鄕村)의 체제정비였다. 이것이 홍무 14년(1381)과 동 24년(1391)의 황책찬조(黃冊瓚造)로 마련된 이른바 이갑제(里甲制)이다. 「명사」권 77 식화지 호구조에 규정되었듯, 이갑제란 110호를 단위로 촌락을 구성하여 이 중 10호의 상등호가 번갈아 이장이 되어 100호 농가의 생산과 징세 및 촌락행정을 관할하는 촌락 자치체제이다.

  그는 당초 황건적에 소속되어 토지혁명을 꾀하기도 했었지만 스스로 독자적인 세력으로 분립한 후, 황건적에 대항하여 향군을 이끌고 있던 지주세력을 끌어안기 위하여 토지혁명을 포기하고 촌락정비를 주축으로 하는 이갑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것은 송태조 조광윤 이래 원나라를 거치면서 보편화된 소작-지주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얼핏 볼 때 진무제의 호조식(戶調式)이나 수문제의 균전제(均田制)와 같은 토지혁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좀 후퇴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실은 현실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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