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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May 18. 2024

명태조의 해금정책 2

동아시아에서 과학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 7

持而盈之(지이영지) : 가지고 있으면서 더 채우려 하는 것은 

不如其已(불여기이) : 적당할 때 멈추는 것만 못하다. 

揣而銳之(췌이예지) : 충분히 날카로운데 더 벼리면 

不可長保(불가장보) : 오래 보관할 수가 없게 된다. 

金玉滿堂(금옥만당) : 금은보화가 집에 가득해도 

莫之能守(막지능수) : 능히 이를 지킬 수 없다. 

富貴而驕(부귀이교) : 부귀를 누리면서 교만하면 

自遺其咎(자유기구) : 스스로에게 허물을 남긴다. 

功遂身退(공수신퇴) : 공을 세운 후에는 몸을 물리는 것이 

天之道(천지도) : 하늘의 도다. (제9장)


「  호조식이나 균전제에서 추구된 자작농 원칙(自作農原則)은 마치 만고불역의 진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토지의 고정성과 가족 노동력의 유동성(한 가족의 사망·성장·노쇠·출가·출정·병약·불구 등등)의 불일치로 토지의 과부족이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되며, 이 모순을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장치가 땅을 빌려 주고 빌리는 소작제이다.

  이것은 다시 지주제적 모순으로 발전하지만, 여하튼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한 세대 이상을 지속하기 어려운 자작농 원칙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소작제에 입각한 이갑제는 개별농가의 자급주의 원칙이며, 이것을 확대하는 길은 개간과 복간에 의한 농경지 확대이다. 명태조 집권 13년 동안에 개발한 농경지가 무려 180만 경(頃)으로서, 총면적(366만경)의  근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을 이갑제의 틀 속에 몰아넣자면, 자연 북송과 남송, 그리고 원나라를 거치면서 만연되어 온 공상인들을 농민으로 복귀시켜야 하고, 이 과정에서 유통경제의 첨병이던 해민탄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의 해금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앞으로 논의하게 될 핵심과제이지만, 우선 「고려사」권46 공양왕 3년(1391) 9월조에서 당시 간관이던 허응(許應)의 상소문을 보면, "전하(명태조)가 상업의 폐를 개념하사 사신을 보내어 이를 금단하게 하니, 실로 백성들은 말(상공업)을 버리고 본(농업)을 힘쓸 때"라고 역설하였다. 이것이 다름아닌 "기말이반본"이다. 자기 나라뿐만 아니라 고려에 대하여도 "기말이반본"을 강요한 것이었다.

  종래 남송과 원나라는 해민들의 고려내왕을 금지하였지만 고려를 제외한 무역은 허용했었고, 더더욱 관세수입을 올리기 위하여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은 대대적으로 환영한 처지였다. 그러나 명태조는 쇄국주의 노선을 밟았을 뿐더러 심지어 외교적인 조공까지 단속하였다.

  주변국가에서 조공선이 올 경우 대중화의 정치이념에 따라, 천자로 군림하자면 자연 "유공칙유사"(有貢則有賜)이어야 하고, 조공량보다 하사량이 더 많아야 한다. 대중화의 정치이념에는 막대한 비용부담이 뒤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명태조 즉위 당시의 중국경제는 비록 "천자"라고 으시댔지만 실은 "유공칙유사"의 원칙조차 지키기 버거울 정도로 후퇴한 실정이었다.

  이 결과 주변국가의 입공횟수를 대략 매년일공(每年一貢:고려·유구), 삼년일공(三年一貢:안남·점성·섬라·조왜 등), 십년일공(十年一貢:일본) 등으로 제한할 정도였다. 조공량도 소량으로 제한하여 자신의 부담을 경감하였다. 그리고 입공 때마다 명나라가 발부한 "감합"(勘合)이란 증명을 지참하게 하여 자의에 의한 빈번한 조공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조공을 "감합무역"이라고도 한다.

  자주 조공할수록 좋아하던 당나라 때의 풍성함과 비교할 때 격세지감을 금치 못하게 한다. 명나라 때 중국은 이미 노쇠한 것이었다. 역사의 썰물이었다.

  이로 인하여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오던 해민들은 점차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남송 때 "민절간상"으로, 그리고 원나라 때 "만자"로 매도되던 해민들은 급기야 제거대상으로 전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주원장과 방장집단의 대결은 흔히 생각해 온 것과 같은 단순한 권력싸움이 아니라, 실은 농본주의와 통상주의의 대결이었고 또한 땅과 바다의 싸움이었다. 이 점이야말로 명나라 300년간을 일관한 역사의 기조였다.

  이 결과로 주원장의 집권 2년째부터 멸망 때까지 중국해안 전역이 처절한 해란의 무대로 변모하였다. 바다는 들끓고 배는 솟구쳤다. 침묵의 바다가 아비규환이었다. 이러한 사태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300년간의 대해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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