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나 선민정 Oct 20. 2024

당신과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

<적당한 거리>

나나의 그림책장은

그림책을 통해 고단한 나의 하루를 위로합니다.

오늘의 그림책은 <적당한 거리>입니다.



<적당한 거리>라는 그림책 표지를 보고 '식물을 키우는 이야기인가' 했다. 막상 책을 열어보니 식물(화분)에 빗대어 인간관계를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의 생김새나 성격, 취향이 모두 다르듯 어떤 식물은 물을 좋아하고, 어떤 식물은 물이 적어도 잘 산다고 한다. 어떤 식물은 음지에서 잘 자라는가 싶다가도 일광욕을 좋아하고 어떤 식물 가끔 쓰다듬어 주면 향기를 내뿜으며 좋아한다고 한다.


적당한 햇빛
적당한 흙
적당한 물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우리네 사이처럼.

특히 이 문장은 적당하지 않게 살아오다 최근 큰 깨달음을 얻은 나에게 건네는 대화처럼 느껴졌다.


착하게 살아왔다는 착각

난 가난한 집안에서 부모의 관심 한 톨 받지 못한 안쓰러운 성장기를 보냈음에도 열심히 공부해 서울권 대학에 입학했다. S사라는 번듯한 첫 직장에, 세 번째 회사에서는 부사장까지 올라갔고 퇴사 후 사업을 하며 억대 연봉의 삶도 살아봤다. 분단위로 시간을 쪼개야 하는 워킹맘이지만 아이들에게 사랑만큼은 부족함 없이 주기 위해 육아에도 최선을 다했다. 인생의 길목마다 남들에겐 흔치 않은 고난이 찾아와도 흑화 하지 않고 성실히 해결해 온 내가 기특했고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또 워낙 정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고, 나로 인한 불편함은 주고 싶지 않았기에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자 오만이었는지 깨닫게 된 순간은 우연히 찾아왔다.


상대가 원하는 걸 줘야 배려예요. 그렇지 않으면 부담이나 강요죠.

2024년 뜨거운 여름 한가운데였던 8월, 인생도서관 라이프 디자이너 자격증 과정을 준비하며 자아성찰 워크숍을 하게 되었다. 생애 전반을 6가지 트랙에 맞추어 풀어가며 나를 이해하는 시간이었는데, 삶의 여러 장면들이 잘 연결되는 것 같으면서도 찜찜했고, 실제로도 어긋난 지점들이 보였다. 바로 인간관계 부분이었는데, 과거 나의 호의나 선의를 악용하고 나를 이용해 먹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난 참 호구였구나.' 싶은 마음에 내 인생 전체가 부질없어 보이기도 했고, 막상 그걸 깨닫고 나니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왜곡되어 입력되기 시작했다. 온몸이 따가울 정도로 매일 상처받았다.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결국 라이프 코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전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타입인데, 과거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이 떠올라 상처가 너무 커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죠? 어째서 나의 선의를 이렇게 악용하고 이용할 수 있는 거죠? 이제라도 전화해서 나한테 왜 그랬냐고 따져야 하나요?"라며 울부짖었던 거 같다.

그러자 라이프 코치님의 대답은 따스한 위로 대신 질문으로 돌아왔다.


"민정님의 선의와 호의를, 그들이 원했나요? 스스로 주었던 건 아닌가요? 어떤 사람이 민정님 앞에 있어요. 민정님은 대접하겠다고 물을 한 잔 주는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은 물을 정말 마시고 싶지 않았어요. 그럴 때 민정님이 물을 계속 먹으라고 하면 상대의 기분은 어떨까요? 그건 좋게 말해 부담, 나쁘게 말해 강요예요. 물론 물이 필요한 사람은 고마워할 수는 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걸 이해해야 해요. 앞서서 배려하고 뒤늦게 상처받지 말아요. 먼저 주려다가 지치는 것도 나, 거절당해 상처받는 것도 나예요. 필요하다고 할 때 당신의 호의를 베풀어 주세요. 그때 줘도 늦지 않아요. "


"......"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덮쳐왔다. 상대와 나의 거리를 좁히려고, 혹은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나의 낮은 자존감이 만들어낸 행동들을 '배려'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착한 척을 해왔음을 직시했다. 그리고 선명해졌다. 베풀 때와 아닌 때를 구분하는 것. 상처받는 만큼 나도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당신과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

이후로는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지인, 비즈니스 관계에서 먼저 배려하는 걸 많이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관계가 절대로 나빠지지 않는다는 걸 몸소 깨닫고 있다. 오히려 관계가 좀 더 단단해지기도 하고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머릿속 시끄러움도 사라졌다.

적당한 거리의 다른 말은 건강한 거리인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거리는 지금 내 곁있는 사람들을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거리기도 하다. 적당한 거리를 재기 위한 계산은 필요 없다. 일부러 상처받지 않으려고 멀리할 필요도 없고 가까워지고 싶어 안달낼 필요도 없다. 적당한 거리를 찾기 위해서는 상대와 진솔한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한발자국 물러서 보면
돌봐야 할 때와 내버려 둬야 할 때를
조금은 알게 될거야.
그렇게 모두 다름을 알아가고
그에 맞는 손길을 주는 것.
그렇듯 너와 내가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사랑의 시작일지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