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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다쟁이 Apr 11. 2024

가속, 노화 중 입니다

(1) 철들다

2024년 현재, 대한민국의 평균 연령은 44.9세, 중위 연령은 46세이다. 완벽히 30대에 접어든 현실이지만, 30살이라는 나이는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갓 시작하는 어린 존재라는 것을, 삼순잔치를 하겠다는 위협들에 대한 변명으로 강조해본다. 그럼에도, 서른살이라는 나이를 정신적으로 보나 신체적으로 보나 '청춘의 젊음'으로 포섭하기엔 동떨어진 영역들이 커져감을 너무나 느끼기에 개인적 차원에서 청춘과 늙어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한 때는, 세상 모르게 술을 마시며 시간을 축내던 시절도, 영원한 먼치킨이라 착각하며 세상에 불만을 품은 적도 있었다. 아마 이런 모든 행동들에는 '평생 젊음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던 자아가 있었기에 가능 했을 것이다. 신체가, 정신이 노화와 성숙을 향한 엔진을 점차 예열하고 있을 때 개인적인 자아는 있지도 않은 영속적 젊음에 깃들고자 노력했다. 어린 것과 어린 것 처럼 사는 것은 별개임에도 말이다.




O Captain! My Captain!


족보를 따져가며 나이를 따져묻는 한국 사회에서,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사람들과 '친구'로서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낯선 개념이다. 학부에서도 남자들의 군 복무 등을 고려해 약 5 ~ 6년차이는 찾아볼 수 있지만,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사람들과 '동등한 지위'의 친구로서 교류할 기회는 매우 적다.


운이 좋게, 20대의 끝자락과 30대의 시작에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오고 가는 술잔과 함께 으쌰으쌰 해 나가며, "그래도 어리겠지"라는 일말의 편견은 점차 옅어졌다. 물론 또래들은, 두세살만 차이가 나더라도 '동생'이라 명명하며, 그들의 삶의 궤적은 우리보다 한발자국 혹은 두발자국 뒤에 있기에 "친구는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삶의 경로성에 강하게 의존하는 연애, 취업, 결혼, 사회생활 등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정의한 '어리다'라는 관점이 유효하다. 그럼에도, 보통의 삶이라는 큰 틀 속에, 변화한 시대에 맞는 그들만의 행동 기준을 구성해나가며 우리세대와는 다른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냄을 지켜보았다.


이에, 젊음이, 어린 정신이 나이듦 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새로움을 가감없이 받아들이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호기심으로 접근하던 태도가 사회와 삶의 경로 의존성에 매몰된 우리들과 너무 달랐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세상과 호흡하며 한 명의 사회인으로 자라나면서 점차 새로움에서 멀어져 갔다.


호기심으로 가득하던 안광이 옅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며, 어쩌면 인간은 찰나의 순간에 얻은 인식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어쩌면 내가 틀렸던 것은 아닐지 걱정하며, "철이 들지 않고 죽기 전날까지 20대와 노가리를 떨고 싶다"던 개인적 생각을 점검했다. 오히려 젊음에 천착하여 생의 발전을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 또한 엄습했다.




생전 이어령 선생님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함께 있다. 보라. 손바닥과 손등, 둘을 어떻게 떼놓겠나. 뒤집으면 손바닥이고, 뒤집으면 손등이다.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겠나. '나는 살아있다'는 생명의식은 '나는 죽어있다'는 죽음의식과 똑같다. 빛이 없다면 어둠이 있겠나. 죽음의 바탕이 있기에 생을 그릴 수가 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삶이 더 농밀해"진다 라고 표현했다.


시대의 지성이던 그분의 뜻을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분이 강조한 Memento Mori(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삶에 관한 개인적 인식에 큰 균열을 냈다.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던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와 같은 생각들에 조금씩 감정적 동감을 표했으며, 영속적 청춘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스스로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지식, 새로운 문화 등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철들지 않음'에 대한 천착은 거두지 못했다.


Memento Mori는 로마 공화정 시기 개선식에서 유래했다.




우리 사회에서 철이 든다는 개념은 조금 특별하다. 어린 아이에게 "의젓하네"라고 말하면 보통 그 아이는 철이 일찍 들어 책임감이 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성장과 맞닿아 있어 그랬을까, 우리에게 있어 철이 든다는 개념은 단순히 어른이 된다를 넘어선다.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드는지, 한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생계와 온전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이해하고 실천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철이 든 사람은 단순히 성인이나 개인이 아닌 '사회인'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에 사회인으로서의 개인은 온전한 발언권을 획득한 사회적 '성원'이 된다. 단순하게 취업해서 나가사는 것을 독립이라 부르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더 와 닿을 것 같다.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계와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는, 부모님 혹은 조력자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다. 이에 사회인이 되는 것은, 즉 철이 든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라면 추구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독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철이 든다는 것은 책임과 생계에 기반한 삶 자체가 우리의 인식 지평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2) 인식의 한계'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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