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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샘 Dec 05. 2023

면접관이 되어 보니 알겠다.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는 지인의 부탁으로 시우(가명)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간에는 운영위 회의에 몇 번 참석한 걸 제외하면 크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방과후학교 담당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다. 11월 말쯤 방과후학교 강사 최종면접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방과후학교 소분과에 이름을 올려두었던 게 기억났다. 방과후학교 강사 일도 누군가에게는 생업일 터. 당락을 결정짓는 자리에 앉기란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주어진 일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찬바람에 온몸이 움츠러들던 지난주 어느 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면접 장소에 도착했다. 마주보는 자리에 놓인 지원자용 의자 2개. 우리 아이들 학교에 오시는 지원자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저 자리에 앉으실까. 내게도 기간제 교사 채용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젊고 패기 넘치던 10여 년 전의 내가 당장이라도 면접실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았다. 지원자 대기실이 아닌 면접관 책상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낯설다 못해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어떤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영화의 스틸컷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K고교에서의 면접이 그렇다. K고교는 사범대학을 졸업하던 당해, 임용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처음 지원한 학교였다. 재단이 탄탄하고 이름 있는 학교에서 뽑는 1년짜리 기간제 자리였고, 집에서 멀지 않아 출퇴근하기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의 면접 장소, 면접 분위기, 면접관들의 첫 번째 질문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달리 있다. 당시 나는 신병훈련소에 갓 입대한 훈련병 마냥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 지원자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면접관 한 분이 긴장도 풀 겸 '학교'를 한자로 써보라고 하셨다. <學校> 그 순간 머릿속 회로는 멈춰버렸고, 손이고 턱이고 할 것 없이 덜덜 떨렸다. 화이트보드에 뭐라고 써보았으나 그건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도저히 '학교'라고는 읽을 수 없는, 그림 같은 문자였다. 그 쉬운 한자어가 기억나지 않다니. 그것도 국어 선생이 되겠다는 사람이 말이다. 부끄러움을 넘어 선 수치심과 굴욕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처럼 화끈화끈 붉어졌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은 선생이 될 깜냥이 있다고 봐주신 덕분에 면접에 합격했고, 그 학교에서 열정 넘치는 초짜 선생 시기를 보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교감 선생님과 다른 면접관 두 분이 오시고 곧이어 최종 면접이 시작되었다. 각 지원자의 이력서와 수업계획서 등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며 부담감을 덜어냈다. 어떤 질문을 해야 지원자의 수업 역량이나 교육관이 잘 드러날지 고민스러웠다. 피면접자일 때만큼이나 면접관으로서의 첫 경험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렴 지원자만큼 긴장될까. 부지런히 눈 맞추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다 보니 근 3시간의 면접이 금방 끝났다. 각 과목별 최종 합격자는 여러 면접관이 상의 끝에 결정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한 과목을 제외하고는 면접관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였다. 그 과목도 두 명의 피면접자 모두 탁월해 보였기에 각 면접관이 어느 장점에 주목했는지에 따라 의견이 반으로 갈렸을 뿐이었다. 역시 사람 보는 안목은 다 거기서 거기인가. 다른 건 몰라도 지원자가 조심해야 할 두 가지는 분명하게 알겠다.


   첫째, 긴장감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 면접관도 마음 편히 묻고 답할 수 있는 지원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느 지원자는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삐걱대더니 인사도, 자기소개도, 질문에 대한 답변도 어느 하나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마치 인공지능(AI)이 주어진 대본을 암기해 출력하는 것 같았다. 억양 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는 지루했고, 본인만의 고유한 색깔이나 장점을 드러내지 못했다. (K고교에서의 내 모습도 그랬겠지.) 면접관 입장에서는 후속 질문을 묻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최종 면접 대상자들은 어차피 스펙이나 실력에 큰 차이가 없고, 답변 내용도 대부분 탄탄하게 준비해 온다. 거기에 더해 부드럽지만 당당한 태도, 겸손하지만 자신감 있는 말투로 가산점을 노려보자. 극도로 내향적인 사람이거나 말하기 불안이 강한 사람이라면 끝없는 연습만이 살길이다. 고등학교 <화법과 작문> 과목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니 믿어볼 수밖에.


  둘째, 다른 지원자들과의 비교는 득 될 것이 없다. 비방은 더욱 금물이다. 꽤 값나가는 교구를 사용하는 과목의 강사 면접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업 교구를 직접 가지고 와서 자신감 있게 설명해 주셨고, 면접관들이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교재도 몇 권이나 챙겨 오셨다. 자기 이력이나 경험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여러 학교에서 더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타 브랜드 교구의 단점과 한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본인 수업 교구의 장점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의도였을 게다. 다른 교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뭔가 억울한 마음이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면접관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 살짝 기울었던 몸이 펴지며 의자 등받이 쪽으로 돌아갔다. 호감은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면접에서는 자기 능력과 매력만 맘껏 뽐내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세상에 알려진다는 말이다. 자기 PR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사성어인 듯도 싶다. 하지만 면접장에서만은 분명 일에 대한 애정과 즐거움을 가진 이들이 훨씬 반짝반짝 빛나보였다. 그 마음은 재미있고 유익한 수업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분이라면 얼마든지 내 아이를 맡겨도 괜찮겠다는 믿음. 학부모로서는 가장 감사한 대목이다.

  그렇지만 당락은 결국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시운(時運)이든 운명이든 팔자든 다 같은 말일 터. 멀쩡히 잘해 오던 수업이 내부 사정으로 폐강되기도 하고, 새로 개설된 강의에 강사가 급히 필요해지기도 한다. 면접에서 어떤 상대와 만나느냐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기도 한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그 자리에 더 적합한 경우이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그걸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수없이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아파했던 20대의 나를 위로한다. 늦게나마 토닥토닥.


  합격 노하우를 엿봤으니 용기 내어 다시 지원자 의자에 앉아봐도 될까.



* 제목 배경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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