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bra윤희 May 24. 2024

40대에도 거시기할 수 있다

70대로 예상되는 한 할머니의 전화통화

난 둘째 아이를 기다리며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어제 그 거시기 때문에 거시기가 일찍 거시기한 거 알아?”

(상대 할머니의 대답이 전화기 너머로 흐리게 들린다.)

“아니 거시기가 거시기라고 한 거잖아. 거시기가 아니라”

(상대 할머니 용케 알아들으리고 다시 한 마디 하시는 듯하다.)

“걔가 저번에도 거시기해서 거시기가 거시기했던 건데, 또 거시기한 거잖여.”

(상대 할머니 이제야 정확히 파악이 되셨는 듯 “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정확히 거시기하겠지?”

(이야기는 거기서 일단락)     


 이쯤 되면 나도 ‘거시기’때문에 ‘거시기’ 된 느낌이다. 대화에서 난무하는 ‘거시기’가 도대체 몇 명이며 어떤 상황인지, 이상하게 대충은 이해가 된다.(아마 내가 통역사 출신이라서?) 이 대화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내 옆에 평온하게 앉아계신 할머니와 핸드폰 너머의 다른 할머니 오직 그 두 분 뿐이겠지.


 이 대화는 2차 세계대전 때 에니그마 코드를 해독한 사람도 정확히 해독이 불가능할 듯싶다. 맥락의 의미, 그 심오한 다중의미의 ‘거시기’를 이해하는 건 당사자들 뿐일 테니 말이다. ‘거시기’ 한 단어 만으로도 그렇게 짜임새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니, 옆에 앉아 계신 할머니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문득 ‘70대의 대화는 이렇게 멋지고 쿨내음 가득한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그렇게 멋진 대화가 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할머니도 아무 한 테나 ‘거시기’ 문제를 내시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도 한다. 일상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거시기’의 습격에 노여워하지 않는(나라면 좀 화났을지도 모른다. ‘왜 제대로 된 단어가 없냐고!!’ 하고), ‘거시기’ 하나면 대화가 든든해지는 그런 관계가 나의 70대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된 인친과 우연히 DM(Direct Message) 대화를 나눴다. 그분은 얼굴이나 개인사를 공개하지 않아서 나 혼자 대략의 나이와 상황만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이야기 끝에 그 인친 분이 자기 나이를 공개했는데 나보다 9살이나 어린 친구였다.


 그 친구가 나보다 9살 어리다는 사실보다, 내가 그 친구보다 9살이나 늙은 사실이 머리를 때리고 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9살 차이가 난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눈 대화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DM속의 모든 활자들이 일어나 뿔뿔이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혹시라도 실례가 되는 내용은 없었나 급히 그 전의 대화들을 살펴봤다. 그 친구가 나이보다 성숙하고 내가 나이보다 확실히 유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뭔가 미안해지고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역시 나이 든 나였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만남과 대화가 이뤄지는 온라인 세상에 나도 한 번 껴보겠다고 책 들고 북스타그램으로 난입한 지 7개월째다. 7개월 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나이도 얼굴도 대략 다 공개를 했고 브런치 스토리에 글도 쓰다 보니 내 상황도 어느 정도는 공개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대단할 것 없는 인생 스토리라 딱히 감출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다소 뻔뻔하게 활동했는데, 9살이 주는 충격은 나를 다시금 숙연하게 만들었고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귀한 경험이 되었다.      




 사람이란 나이에 걸맞게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애써 더 젊게 꾸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애써 자신을 아저씨나 아줌마로 만들 필요도 없다. 나이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꼭 필요할 때 혼자서 살짝 머리끝쯤에 떠올리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112쪽)     


 나이 들어가는 것에 이상하리 만치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피부가 처지고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도 몇 가닥 생기는데 ‘뭐 이 정도는 내가 감당해 보지’하는 심정으로 지금까지 살았다. 태생이 겁쟁이라 피부과 좀 다니라는 주변의 권유도 쉽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나를 젊게 포장한 적도, 스스로를 나이 든 아줌마라고 진심으로 깎아 내린 적도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아직은 나의 이런 삶과 뻔뻔함이 허락되는 중년이라 행복하다.

흰머리 때문에 염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지금이 다행스럽다.

‘피부과 시술’이라는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다.


 70대에 저렇게 멋진 대화가 가능한 것이라면 늙는 것도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읽고 쓰는 삶으로 뇌의 노화를, 운동하는 삶으로 신체의 노화를 늦춘다면 어느새 멋진 여자로 늙어가고 있을 것이라고 온 마음을 다해 믿어본다. 내 나이는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꼭 필요할 때 혼자서 살짝 머리끝쯤에 올려보겠다 마음먹는다.  


40대에도 아름다울 수 있다!!






#대문사진: 이상순SNS의 사진을 실은 '스포츠경향' 기사

매거진의 이전글 꿈을 포기하는 것이 삶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기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