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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May 22. 2024

꿈을 포기하는 것이 삶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기에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 박애희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통번역 프리랜서로 경험을 더 해가고 있을 때, 아는 학원 선생님의 부탁으로 중국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미 나 자신에게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 다시 대학원 들어가기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통번역대학원을 선택하실 건가요?”


 아마 그 학생은 ‘당연하죠’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것 같았고 학원 강사로서 정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라는 판단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하다’라는 말의 볼륨은 예상보다 더 줄어들었고 나도 모르게 엄청난 데시벨로 ‘현실적으로 생각하세요’라는 말을 뱉고 말았다. 그 후로 어떤 말을 해버렸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학생의 그 질문 후 나는 더 이상 통번역일을 할 수도 없고, 강사 생활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나처럼 후회로 가득한 30대를 살아갈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아이들에게 미래의 반짝이는 단면만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통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아이들에게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할 용기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내가 강의실에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거짓인 것 같고, ‘이런 행위가 사기꾼과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조금은 극단적인 생각에 치닫게 되었다.

 학생은 한 줄로 질문을 던졌지만, 그 후에 나의 대답은 무수히 많은 고민이 되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견딜 수 없이 뻑뻑하게 돌아가는 나사를 안간힘을 다해 돌리고 있었던 나는, 더 어떤 힘도 끌어내지 못할 것 같은 무기력함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나의 통번역 인생은 그곳에서 일단락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었던 청춘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가질 수 없었던 기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나서야, 해낼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 앞에서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오래도록 걷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정하고 포기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멋진 일이라는 것을. 인생이란 내내 그렇게 우리에게 한계를 가르치며 겸허하게 살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112쪽)     


 나의 중국어 사랑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엄마가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려온 홍콩 무협 드라마(만다린어로 더빙된)에 빠지면서 엄청난 양의 비디오를 소화해 냈다. 그때 우리 가족은 모두 무협 드라마에 매료되어 매일 밤 2시~3시까지 중국어를 듣다 잠들 곤 했다.  

 다른 친구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부르며 방 한켠을 서태지 포스터로 가득 메우던 중등시절에도 나는 홍콩영화에 빠져 하나하나 벽돌 깨듯 탐닉하고 있었다. 홍콩 누아르에도 빠졌다가, 무협 드라마에도 심취했다가, 김용원작 소설에도 매료당했다가, 홍콩의 B급 영화에도 눈을 돌렸다. 한 번도 중국어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자막 없이도 어느 정도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오랜 시간 중국어와 함께했다. 실제로 여러 번 돌려보았던 무협 시리즈 몇 편은 자막 없이도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중국어 전공을 선택했던 나는 대학에서도 중국어만큼은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외고를 졸업하고 같은 학과에 입학한 친구들보다도 나는 더 깊게 중국인 교수님과 소통할 수 있었다. 중국어는 늘 나에게 신명 나는 존재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어학연수로 가게 된 중국에서 우연히 한 친구로부터 ‘외대 통번역대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는 바로 운명처럼 나의 꿈을 결정해 버렸다. ‘데스티니~’하는 소리도 실제로 들리는 듯했고 중국의 누런 황사도 그때는 상당히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자전거를 세 번째 도둑맞았을 때도 ‘그러라지 뭐, 이 꿈 없는 인간들아. 내 자전거를 빼앗아 간다고 내 꿈까지 빼앗진 못해!’라며 허공에 신나게 주먹질을 해댔다. 꿈이 내 삶을 가득 채운 느낌은 중국 연수 시절의 모든 어려움을 0으로 상쇄시켜 주었고 꿈에 중독된 사람처럼 삶을 즐겼다. 한국에 돌아가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통번역대학원 준비에만 전념하겠다는 결심으로 군대에 있던 3년 된 남자친구에게도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2년을 준비해서 대학원에 성적장학금까지 받고 입학했고 내 인생은 그렇게 어긋남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난 이미 어느 정도 꿈을 이룬 듯 보였고 이 길이 내 인생의 꽃길이란 확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졸업 후 만난 통번역의 세계는 나에게 절망을 주었다. 특히 통역은 일을 나갈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 며칠 혹은 하루만 아는 사람으로 지내는, 유통기한 며칠 안 되는 신선한 만남이 기본옵션인 직업이었다. 내향형 인간이라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전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에게 그런 직업환경은 고통이었다. 관계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닫혀버리는 통역의 세계에서 결국 어떤 문도 열지 못한 나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마음의 병을 얻어 힘들었다.


 남의 말이나 글을 옮기는 것이 내 생각을 말하거나 쓰는 그것보다는 훨씬 쉬울 것이라는 생각도 엄청난 오산이었다. 남이 말하고 쓴 이야기의 틀에 갇혀있는 듯해서 터질 것 같은 생각도 마음의 병을 더해갔다. 번역하는 날은 컴퓨터 앞에 늘 초콜릿 봉지가 쌓여있었고 밤에는 맥주 캔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오랫동안 사랑했던 중국어가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소음처럼 들리기 시작했고 하루라도 중국어를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인생은 너무나 자주 내가 기대한 엔딩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보다 너 많이 가진 이가, 나보다 더 운이 좋은 누군가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현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꾸었던 꿈들 중 몇 가지나 이룰 수 있을까. 아니, 인생이라는 무대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한 걸까. (중략) 내 자리인 줄 철석같이 믿고 기쁨에 들뜨는 날도 있지만, 어느 순간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를 절절하게 외치며 무대 밖으로 밀려나는 날도 있다. 우리는 꿈의 그라운드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걸 확인하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다. 그래도 모두 묵묵히 살아간다. (150~151쪽)     

 

 매일 인민일보 사이트에 들어가 중국에 관한 소식을 한국 소식보다 먼저 검색해서 읽어 내려가던 나는, 더 그 사이트를 열지 않았다. 같이 통번역 대학원을 나와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가는 동기, 선배, 후배들의 소식을 알고 싶지 않아서 연락을 끊고 살아갔다. 한 발 두 발, 중국어로부터 도망치기 급급했던 그 시절 나의 모습이 아직도 안쓰럽게 기억된다.

 그토록 오랫동안 운명이라 믿었고 사랑했고 결실을 이뤘던 중국어와의 만남은 그렇게 자기 부정과 환멸로 끝을 맺은 듯했다. 하지만 그 후에 나는 결국 통번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대학원 박사코스에 입학하여 1년을 애썼지만 결국 수료하지 못했다. 중국어에 대한 나의 질척임은 아마 그때 끝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꿈을 포기한 나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아무도 질타한 적 없고, 무시한 적 없는데 나는 매일매일 질타와 무시 속에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그건 결국 나 자신의 목소리였음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결심이다. 때로 그건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끝까지 버티겠다며 괴로움을 참아가며 애쓰는 것보다 조용히 손을 놓고 내가 다치지 않는 법을 택하는 것도 하나의 결심일 수 있다. 모르는 문제만 풀겠다고 그 문제만 잡고 있으면 아는 문제도 풀 수가 없다.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견디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 말고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266~267쪽)     

 

 10년 넘게 도망쳐온 듯한 나의 인생도 결국 모두 지울 수 없는 내 삶의 자국이다. 한 동안은 이렇게 도망쳐온 나를 미워했다.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중국어를 싹둑 잘라내려 한 건지 스스로에게 물었고 혀를 차며 한심해했다. 하지만 결국 오랜 시간 중국어와 행복했던 시간들, 열심이었던 모습, 잠을 털어가며 한계를 이겨내려는 노력, 극단적으로 중국어를 멀리하려 했던 마음, 결국은 포기를 결심했던 순간까지 모든 것이 지금의 나의 모습을 만들었다.

 내 인생에 더 이상 껴들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결국 중국어는 지금도 나의 마음에 흐르고 있다. 진짜 때려치우고 싶다고 했던 번역의 과정도 이렇게 글 쓰는 순간에 녹아들어 있다. 가끔 번역서를 읽을 때 ‘내가 번역했더라면 이렇게 안 하고 이렇게 했을 텐데’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하는 내가 반갑다. 내가 해온 통번역의 기술은 이렇게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통번역하는데 더없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음이다.     

 

 생각해 보면 아프기만 한 시간도 아니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누가 나를 이끌어주길 기다리지 않았고, 열심히 시간을 바쳐 성실하게 일을 했고, 그 돈으로 엄마에게 적지 않은 생활비를 드릴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던 시간이었다.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글쓰기의 성실함에 대해 많은 것을 얻고 배울 수 있던 시간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상처받고 훌쩍이면서도 열심히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지난날의 어린 나에게 이제라도 말해주고 싶다.
“애썼어. 진짜 수고 많았어. 이제 조금 편안해져도 괜찮아.” (256~257 쪽)     


 지난날, '이렇게 꿈을 포기할 수 없다'라고 울고 있는 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는 꿈을 향해 전진해도 되고, 꿈을 포기해도 되고, 다른 꿈을 꾸어도 되고, 꿈을 꾸지 않아도 된다. 꿈을 이루었다고 다 된 것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꿈을 포기한다는 것이 내 삶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조금씩 어긋나는 우리의 삶을 다시 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돌려가는 과정이 모여 결국 ‘나’를 만든다. 그 과정이 아프고 힘들더라도 계속해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다.
인생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과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지만,
누구나 언제든 다시 인생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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