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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May 10. 2024

무라카미 하루키를 닮은 사람

 대학교 때였나... 아빠, 엄마, 동생, 나 이렇게 4인 가족 함께 <화차>라는 영화를 시청한 적이 있다.      


 결혼 한 달 전, 부모님 댁에 내려가던 문호(이선균)와 선영(김민희)은 휴게소에 들른다. 커피를 사러 나갔다 돌아온 차 안에는 선영이 없다. 그녀의 머리핀만 덩그러니. 단순 실종으로 판단한 문호는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는데, 그 후로 어느 곳에서도 선영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점점 초조해진다. 전직 강력계 형사인 사촌 형에게 도움을 청해 알아보니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녀의 이름과 주민번호 모든 게 거짓이다. 실종 당일 은행잔고를 모두 인출하고 집의 지문까지 지워버린 그녀의 묘한 행적은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선영은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우리 가족은 이 영화를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 휴게소에서 선영이 사라졌을 때만 해도 살해당한 줄 알고 얼마나 맘을 졸였던지. 중반으로 가서는 ‘저 여자가 어떻게 한 남자를 이토록 철저하게 속일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비밀이 숨죽이고 있길래 이토록 처절하게 감춰야만 했을까’하는 생각.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졸이며 마지막 비밀의 흔적을 함께 밟아갔다.




 영화를 시청하고 몇 주 후 우리 가족은 부산에 있는 큰댁에 가게 되었고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다. 모두 화장실이 급한지라 화다닥 뛰어 각자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일을 보고 주차된 곳으로 돌아오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나와 같이 심각한 길치여서 이렇게 복잡한 곳에서는 누군가가 옆에서 꼭 보좌를 해주는데 이번엔 모두 너무 급했다. 규모가 꽤 큰 휴게소인 데다 주말이라 사람과 차가 꽉꽉 들어차 있었기에 엄마가 길을 잃었다 해도 우린 모두 엄마를 이해해 줄 참이었다. 차 안에는 엄마의 작은 가방이 덩그러니 있었다. 꽤 시간이 흘러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흩어져 엄마를 찾다가 다시 차 앞으로 모였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하는 걱정으로 정적이 흐르고 있는데 아빠가 툭 한 마디를 뱉으셨다.


“아니, 화차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냐?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왜 이렇게 안 와?”


 아빠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와 갑자기 등장한 ‘화차’라는 단어에 우리는 참지 못하고 ‘푸악’하고 웃어버렸다. 아빠와 여동생 그리고 나는 갑자기 긴장이 풀린 듯 쉴 새 없이 웃음이 나왔고 저 멀리에서 “윤희 아빠~.”하는 소리와 엄마가 뛰어왔다. 엄마가 등장하기 전 딱 1분 전에 아빠가 말씀하신 ‘화차’ 때문에 몇십 분을 기다렸던 우리의 짜증과 걱정이 흔적 없이 날아갔다. 웃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고 미안함 가득했을 엄마의 마음에 조금의 섭섭함이 더해졌으려나.      




 아빠는 이렇게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예상하지 않은 포인트에서 웃음을 주는 능력을 지닌 분이다. 전혀 동떨어진 문제와 지금 벌어지는 상황과의 연결도 늘 기가 막힌다. 기본적으로는 과묵한 성격이라 말이 없다가 갑자기 툭 끼어들어 한마디 던지는데, 그 말들이 모두 담담하게 핵심을 찌르는지라 곱씹을수록 재밌다. 아빠를 만나고 집에 온 날은 여지없이 그날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이 떠올라하던 일을 멈추고 웃게 된다. 아빠는 내가 웃으면 항상 “쟤 또 저런다”하시며 핀잔을 주시지만 아빠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아빠랑 비슷한 유머코드를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됐다.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주로 하루키의 에세이를 많이 읽는데 다른 책들을 읽다가 좀 지쳤을 때, 쓰기도 싫고 읽기도 싫고 유튜브 조차 보기 싫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에세이를 툭 꺼내서 쓱 읽기 시작한다. 읽다 보면 ‘혹시 이 사람도 아무 생각 없이 이 글을 썼나?’ 하는 생각을 시작으로 혼자 낄낄낄 웃게 되는 포인트를 계속 만나게 된다.


 얼마 전 혼자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만을 시킨 채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타표범의 키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조용히 읽고 싶었던 나는 노트북을 켜놓고 작업 중인 사람들이 많은 섹션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혼자 꽤나 큰 소리로 자꾸 ‘큭큭큭’하는 웃음이 터져 나와서 결국 커피와 책을 들고 수다가 많은 섹션으로 옮겨 앉았다. 웃기려 하는 의도가 없는 것 같은데 자꾸 웃음이 나오는 글을 쓰는 사람. 내게 하루키는 그런 사람이다.      


 남자가 화낼 경우, 거기에는 대개 ‘이러이러해서 화난다’는 줄거리가 있다(그것이 적절한지 어떤지는 둘째 치고). 그러나 여자는 내가 본 바,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평소에는 특별히 눈초리를 추켜올리지 않고 온화하게 넘기던 일도 하필 화나는 시기에 걸려버리면 화를 낸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화를 낸다. 말하자면 ‘지뢰를 밟은’ 것이다.
 신혼 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횟수를 거듭하는 동안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하고 대충 그 구조를 알게 됐다. 상대가 화를 내면 방어는 단단히 하되, 얌전히 샌드백이 되는 수밖에 없다. 자연재해를 정면으로 맞서봐야 어차피 이길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뱃사공처럼 그저 목을 움츠리고 뭔가 다른 생각을 하며 무지막지한 태풍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18~19쪽)


 최근에 읽은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사실 완독을 하지 못했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너무나 사랑하는 나는 3분의 1 정도까지 읽다가 책을 덮었다. ‘하루키의 소설은 소설이고 에세이는 에세이니까.’, ‘작가의 어떤 책이 좋았다는 거지, 작가의 모든 책이 좋다는 건 아니었어.’하며 솔직하게 홀로 읊조려보았다.


이렇게 하루키를 엄청 좋아하면서도 나는 그의 소설 중 대부분이 당최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예전부터 ‘양 사나이’니 ‘쥐’니 할 때부터 수상하더라니 <해변의 카프카> <태엽 감는 새>등으로 나아가면서 점점 더 내가 뭘 읽은 건지 알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최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에는 무려 ‘메타포’와 ‘이데아’가 직접 등장해서 말까지 한다(진짜 이 대목에서는 생애 최초로 중도포기할 뻔)! (문유석 <쾌락독서> 138쪽)  


 어쨌거나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사랑한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기 전에는 항상 웃음 필터를 마음에 장착한다. 담담하게 써 내려간듯한 하루키의 글 속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있는 웃음 포인트를 모조리 건져버리고 싶은 나의 마음을 담아 펼쳐본다. ‘어쩌면 이 사람 웃기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 난 고도의 수작에 지금 넘어가고 있는 걸 지도 모르지’ 하는 의심이 가득하다.  그렇게 오늘도 하루키의 책을 책장에서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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