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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츠윌리엄 다아시 Aug 24. 2024

빌바오, 도노스티아

스페인 바스크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오면서 스페인은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렇지만 빌바오에, 아니 빌바오에만 가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엔 유명한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아니면 남쪽에 세비야나 말라가 정도뿐이었다. 그러던 내가 빌바오에 가게 된 것은 100% 내 자의라고는 할 수 없다. 출발하기 대략 한 달 전쯤, 비자가 만료되기 직전까지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던 도중, 교환학생 단체 톡방에 내 눈길을 끄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루프트한자 서프라이즈 부킹을 같이 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여행의 테마를 선택하면 대략 열 가지의 목적지들 중 무작위로 하나가 추첨되어 저렴한 가격에 왕복 항공권을 살 수 있는 이벤트였다—돌려 돌려 돌림판~. 신기한 건 못 참아 나도 참여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그렇게 3명이 모여 추첨을 돌렸더니 나온 곳이 빌바오였다.


첫째 날

구겐하임 미술관 - Plaza Nueva - Erribera merkatua

 8시 4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어두컴컴한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혹여 안 일어났을까 봐 단체톡방에 카톡을 보내놨는데, 한 명이 30분이 넘도록 안 읽길래 전화했더니 그제야 일어났다. 다행히 늦지 않게 뮌헨 공항에 도착해서 쾌적하게 루프트한자 직행 비행기를 탔다. 항공사만 믿고 편안하게 갈 줄 알았지만, 오히려 라이언 에어 비행기보다 불안했다. 잘 가다가 착륙하기 5분 전쯤부터 갑자기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정상 착륙을 할까 기내에 불안감이 엄습하여 사람들은 웅성거리기도 했다. 정말 다행히도 무사히 착륙했다. 우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안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유쾌한 승객들도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본 빌바오의 건물들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세련되어 보였다. 현대식 빌딩들이 많았지만 각자만의 개성이 있는 듯했다. 반면 시내는 유럽의 평범한 건물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도시 분위기를 파악하는 동안 금세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일단 숙소에 짐만 맡기고 시내로 걸어가 점심부터 해결했다. 미리 맛집으로 찾아둔 Elíptica라는 식당에 들어가 조개수프, 생선구이, 하몬—한때 나도 하몽이라 불렀지만 나무위키에 따르면 하몬이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리고 와인을 시켜 먹었다. 첫 끼부터 꽤나 성공적이었다. 조개수프와 생선구이 모두 무난했고, 처음 먹어보는 하몬도 입맛에 맞았다. 처음에 치즈 냄새가 나서 살짝 의심했지만,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그 짭짤한 맛이 은근 중독적이었다. 술안주로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먹는 데에도 30유로 남짓이면 충분했다는 점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기분 좋게 다음 목적지인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갔다.

하몬의 독특한 맛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 구겐하임 미술관과 이를 지키는 초대형 꽃강아지

 구겐하임 미술관은 뉴욕, 베네치아, 그리고 빌바오 딱 3곳에만 있는 프랜차이즈 미술관이다. 그만큼 정말 유명한 곳이지만, 나는 이곳에 오기 며칠 전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쾰른에 있을 때 내가 빌바오에 간다고 하니까 건축학과 친구에게 꼭 가보라고 강요를 받아 찾아보게 되었다—하지만 도시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자신의 건축학적 소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미술관을 좋아하지 않아도, 스페인에 왔다고 계속 먹기만 할 수는 없으니 일단 가보기로 결정하였다. 외관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장미꽃처럼 은색으로 뒤덮인 건물과 그 앞을 늠름하게 지키고 있는 강아지가 매우 이색적이었다.

 이곳도 쾰른에서 갔던 미술관들처럼 현대미술을 주로 전시해 놓았다. 하지만 프랜차이즈 미술관은 확실히 달랐다. 평범한 직사각형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던 루드비히 박물관이나 조형물이라 해봤자 조그마했던 쾰른의 Kolumba와 다르게 규모가 훨씬 컸다. 비록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에 대한 답은 여전히 얻지 못하였지만, 작품들이 시원시원해서 볼 맛이 났다.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서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다 안 오다 하니 우산 쓰기도 애매했다. 신발에 물이 차서 계속 걷기 찝찝해 CAFE IRUÑA에 들러 잠시 몸을 녹였다. 인테리어도 고전스럽게 예쁘고 그만큼 사람도 많았다. 시간이 조금 늦어서 그런지 음식이 거의 다 떨어졌었는데, 에그 타르트만 남아 하나씩만 사 먹었다. 애당초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에그 타르트를 거의 안 먹어봐서 잘 모르지만, 분위기 탓인가 뭔가 실하다는 느낌은 받았다.

 비가 그쳐 다시 일어나 Erribera merkatua라는 시장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전통 시장을 유럽식으로 바꾸면 어떤 느낌일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면 이 시장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육류, 생선, 식료품, 채소 및 과일 등 웬만한 식자재는 다 팔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한쪽에는 핀초스 푸드 코트들로 가득했다. 한 바퀴 쭉 둘러보니 정말 다양한 핀초스가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아 각자 먹고 싶은 핀초스 2개씩과 상그리아 한 잔씩을 사들고 자리를 잡았다. 핀초스도 맛도 기대 이상이었고 상그리아도 맛있었다. 와인의 드라이함은 적고 새콤한 맛이 약한 탄산과 곁들여져 핀초스의 느끼함을 잡아주어 좋았다. 사실 시장이라고 하기에 이 푸드코트 구역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지만, 그래도 이 바스크 지방에 왔다면 꼭 한 번 들러서 군것질하는 경험을 하길 추천한다.

 숙소에 돌아와서 씻고 일기를 쓰는데 어느 순간 눈앞이 아른거리며 내가 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뭐지 싶었는데 금방 내가 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자주 체했다. 당시에는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속을 게워냈었는데, 성인이 되며 그 주기는 점점 길어졌다. 유럽에 온 이후로 체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슬슬 대비를 했어야 했는데 방심하다 하필 여행을 왔을 때 찾아왔다. 그런데 하루를 돌이켜 봐도 이날만큼은 방심할 만한 게, 식사량이 절대 많지 않았다. 배가 적절히 부른 적은 있어도, 배 터지게 먹어 더 이상 못 먹겠다 싶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참 이렇게 뜬금없이 체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굳이 토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바로 침대에 누워 잤는데, 새벽에 깨보니 욕지기가 나 로비 화장실로 조용히 가서 속을 비워냈다. 같은 방에서 잔 친구들이 나 때문에 깨지 않은 것 같은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둘째 날

우르굴 산 - 구시가지 - Zurriola beach

 이날은 도노스티아—스페인어로는 산 세바스티안이라고 한다—이라는 근교 도시에 갔다. 전날 체증 때문에 피곤했지만 체한 것 치고 몸상태가 괜찮아 같이 가기로 했다. 버스로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Alsa에서 편도로 10유로 안 되게 표를 끊을 수 있다. 버스에서 바로 곯아떨어진 덕에 두통은 덜해졌다. 날씨는 전날보다 더 좋았다. 바람도 세고 해가 막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가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일단 우리 다 아침을 먹지 않았기에 요기하러 카페부터 갔다.

 이후 우르굴 산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산이 오름 정도여서 여건이 되면 올라가 보려고 했으나,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바닷가만 둘러보았다. 바람이 어찌나 거세던지 앞으로 똑바로 걷기도 힘들었고 머리카락은 춤을 추었으며 절벽에 치는 파도는 종종 인도로 침범했다.

난간을 침범하기 직전 파도의 모습 | 무지개도 조그맣게 보인다 | 짙은 구름을 보고 또 비가 올까 걱정도 했다

 힘겹게 바닷바람을 뚫고 구시가지로 들어왔다. 배가 금방 꺼져 바로 점심을 해결할 식당을 찾아보았다. 미식의 도시라는 명성에 맞게 미쉐린 가이드 식당들이 꽤나 많았다. 다만 가격대가 너무 비싸 보여 구글맵으로 찾은 Atari Gastroleku라는 식당에 가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영업 시작 시간 10분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다 가장 먼저 들어갔다. 이 식당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고로케 핀초스 8조각과 문어 요리만 주문했다—당연히 상그리아는 빼놓지 않았다. 음식들 모두 제값을 했다. 고로케도 따뜻하고 부드러워 맛있었지만, 문어가 아주 일품이었다. 문어가 기름에 정말 잘 구워져서 고소했고 딱 적절하게 쫄깃했다. 안동식 문어숙회에만 익숙한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우리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릴 때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왔는데, 식사를 거의 다 마칠 즈음에는 어느새 식당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심지어 서서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대로 된 맛집을 발견했고 우연히 시기적절하게 들어가 쾌적하게 먹을 수 있어서 우리 모두 뿌듯해했다.

 이후 소화도 시킬 겸 Zurriola beach로 갔다. 그새 바람은 잦아들고 구름도 어느 정도 걷혔다. 12월이라 그런지 이렇게 광활한 사장에 오직 우리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을 쐬며 바다 멀리 수평선을 한참 구경하다 구시가지로 다시 돌아갔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거닐다 TORRONS VICENS라는 초콜릿 집이 눈에 띄어서 들어가 보았다. 여러 가지 초콜릿들이 있어 맛을 보다 리퀴르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초콜릿 리큐르뿐만 아니라 견과류 리큐르들도 있었다. 시음을 해봤는데 이들 중 이들 중 아몬드 리큐르가 가장 맛있다고 만장일치가 나왔다. 밤에 숙소에서 노가리를 까며 마시기로 하여 한 병을 샀다.

왜 내 휴대전화에 문어 사진이 없지...? | 넓지만 사람은 거의 없던 Zurriola beach

 바스크에 유명한 음식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치즈케이크가 가장 명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내가 치즈를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된 치즈케이크는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 여러 식당들을 찾아보던 중 La Viña라는 식당에 사람이 많길래 여기에 줄을 서보았다. 거의 30분은 대기했던 것 같다. 거의 저녁 시간대가 되어 전시대에 있는 치즈케이크가 점점 떨어져 가 걱정도 되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우리가 마지막 2조각을 먹게 되었다—다음 사람들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셋이서 야금야금 나눠먹었다. 엄청 느끼하지 않고 입에서 살살 녹아 치즈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시간은 많이 남고 더 가보고 싶은 곳은 없어, 마치 우리나라에서 시간을 때우러 카페에 가듯 핀초스 바에 갔다. 각자 핀초 1개씩만 시켜 찔끔찔끔 먹었다. 나는 이왕이면 특이한 것을 먹어보고 싶어서 청어가 들어간 핀초를 사 먹었는데, 너무 비려서 조금씩 먹는 데에는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양철북"에서 아그네스는 도대체 얼마나 미쳐버렸길래 이 비린 청어를 마구 처먹은 걸까.

 숙소에 돌아가서 한 명씩 씻고 아몬드 리큐르를 깠다. 버스 터미널에서 안주로 사 온 하몬과 과자랑 같이 먹었다. 직원의 추천대로 아몬드 리큐르에 우유를 타 먹었는데, 끝에 알코올이 느껴지는 아몬드 브리즈 같았다. 솔직히 둘이 서로 어울리진 않았다. 그래도 각자가 맛있어서 수다를 떨며 무의식적으로 먹고 마시다 보니 다 비울 수 있었다. 전날 체해서 머리가 조금 아파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니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하루 종일 운이 좋아 일정이 딱딱 맞게 돌아가서 정말 알찬 당일치기였다.


셋째 날

 이틀 동안 과도하게 이른 기상으로 피곤했던 우리는 이날 작정하고 늦잠을 잤다. 10시에 일어나서 체크아웃 마감 시간인 11시에 딱 맞추어 나갔다. 사실 빌바오가 큰 도시가 아니다 보니, 더 가보고 싶은 곳은 ZARA 딱 한 곳뿐이었다. ZARA가 뮌헨에도 매장이 있을 만큼 유럽에서 흔하지만, 스페인에 있는 ZARA 매장들이 더 싸다고 한다. 그전에 잠시 어느 쇼핑몰에 들러 여러 옷가게에 들렀다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 가는 길에 이틀 전에 봐둔 엠파나다—만두와 매우 흡사하게 생겼다—식당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모두 궁금하여 하나씩 사 먹고 식당으로 갔다. 점심은 BTQ라는 식당에서 먹었다. 자리가 없어 조금 기다렸다. 처음에 엠파나다를 먹을 때 점심 직전에 이걸 먹는 게 맞나 싶었지만, 이렇게 군것질을 했기에 힘들지 않게 대기할 수 있었다. 직원들이 영어를 못해 음식을 주문하는 데에 애를 먹었지만 음식들은 다 맛있었다. 특히 맥주 전문점이 아니었음에도 맥주가 맛있었는데, 종업원이 크림이 쫀득하도록 생맥주를 잘 따라주어 마음에 들었다—맛있는 맥주에 나 혼자 절제하지 못하고 한 잔 더 시켰다.

 두둑하게 배를 채우고 드디어 ZARA로 갔다. 다른 두 친구들은 나에 비해 옷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많이 둘러보았다. 반면 나는 옷 가게 크기에 한 번, 이렇게 큰 옷 가게에 사람이 가득하다는 것에 한 번 놀란 것으로 충분했다. 한 벌씩은 살 줄 알았던 친구들은 예상외로 구경만 하고 나왔다. 저녁 비행기까지 시간이 붕 떠서 다시 시장으로 갔다. 배가 불러 핀초스는 사 먹지 않고 술만 한 잔씩 마셨다. 이때 교환학생 기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페롤 스피릿을 마셨는데, 감기약맛이 살짝 나는 것 때문에 상그리아가 더 나았다.

튀긴 왕만두 같이 생긴 엠파나다 | 빌바오 중앙 광장에서 찍은 평범한 길거리 |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코펜하겐을 연상케 했다

 다행히 돌아가는 길은 순탄했다. 하필 마지막 날에 가장 날씨가 좋았던 것에 감사해야 할지... 뮌헨에 무사히 도착하여 S반을 타는데 모두 지쳐서 얼이 빠져있었다. 다들 여독이 가득 쌓여있던 것 같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어김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역시 여독에는 라면만 한 약이 또 없다. 아무리 스페인 음식이 맛있다고 한들, 우리나라의 혼이 담긴 뜨끈한 국물을 이기기엔 턱도 없었다.

 후에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북부 여행을 오신 아버지 일행을 만난 적이 있다. 이들 중 스페인어 선생이 있어서, 이분께 내가 스페인 중 빌바오만 가보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이분은 내 말을 정정해 주셨다. 나보고 스페인에 간 게 아니라, 단지 바스크에만 간 것뿐이라고. 지금이야 같은 나라지만, 문화도 언어도 많이 다르다고 한다. 그래도 어느 곳 하나를 찍먹한 게 아니라 바스크만큼은 제대로 즐겼다고 생각하여 후회는 전혀 없다. 이분 말씀마따나, 여담이지만, 나는 이번 파견 기간 동안 많이들 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가지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언젠가 가게 될 신혼여행 후보지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알맞게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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