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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a Jan 26. 2024

<피로사회>

한병철

한병철의 <피로사회>


2012년, 미국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박사 과정을 시작하던 해, 이 책의 번역본이 한국에서 출판 되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2010년에 첫 출판이 되었고. 독일인이 아닌 한국인이 독일어로 철학 서적을 출판 했다고 하니, 모국어도 아닌 2언어로 난해한 주제의 책을 썼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다.

한병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당시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데, 동료 교수님들과의 독서 모임을 통해 10년도 더 지나,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첫 문장이 흥미롭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 질병이라 함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끈질긴 생명력을 지금까지도 뽐내고 있는,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필자는 그 질병을 나열한다. 읽을 수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과거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였던 반면,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점증하는 탈규제화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여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할 수 있다. 'Yes, we can!'이라는 propaganda가,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외침이, 난무하지 않았을까. 


금지, 명령, 법률 등의 규율사회의 언어들이 project, initiative, motivation 등의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단어들로 대체된 세상이 도래했던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광인과 범죄자를 낳았던 규율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내는 성과사회가 되었다. 과도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를 착취하게 되고, 멈추지 못하는 성취욕구가 강한 인간은 결국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까지 다다라 우울증이라는 깊은 슬픔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40대가 되니 가족의 상실로 인한 슬픔, 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한 소진된 에너지의 저항, 그리고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의 아픔이 남의 일이 아닌 듯 다가와 걱정과 슬픔이 자라날 때가 있다. 일면식 없는 타인의 비극적인 뉴스 소재도 모르는 척, 남의 일로 넘길 수가 없다. 최근 교육계에서 일어난 비보들을 충격적으로 접한터라 이 책이 정의하는 우울증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종을 울리는 듯 하다.


누구든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지 않아'라고 생각할  때까지 자기 자신을 밀어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 아무리 고귀한 일일지라도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할 일은 없다. 

그렇다. 백 번 맞는 말일터. 하지만 더 슬프고 두려운 것은, 이미 우울함의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은 이성적인 사고가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이다. 누군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서까지 그 일을 하고 싶었을까.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만큼 아픈 것이다. 우리 몸에 염증이 생기고, 암 덩어리가 자라듯 마음이 아픈 병리적인 증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을 보살펴야 한다. 자신이 아픈지 조차 모르고 있는 이들이 있는지 마음을 써야 한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을 만나며 종종 놀란다. 겉으로 표가 나진 않지만 사회적 불안감, 대인 기피, 신경성 스트레스, 강박증, 우울증 등의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꽤 있다. 한 강의에서 다루는 교재의 본문 내용에 

'공포증(phobia)'이 등장한다. 단순한 글 읽기를 넘어 불안감, 두려움, 공포증 등과 같은 심리적인 현상을 개인/내면화 하며 대화를 더 나누었더니, 상담 약속을 잡고 연구실로 찾아 오는 학생들이 있어 알게 되었다. 또는 지도학생들이 용기 내어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일종의 커밍 아웃처럼. 이들 중에는 이미 학생상담센터에 다니거나 병원 진료를 받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도움을 받고 있지 않은 학생들도 있을 것 같아 우려가 된다. 

얼마 전 수업이 끝나도 가지 않고 앉아 있는 학생과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깊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리적/신체적 현상까지 나타나는 강박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를, 진로 준비를) 너무 잘 하고 싶고,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못 하면 어떡하지?' 못 하게 될까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해 했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왜 이런 마음의 증상이 생겼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아이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받았던 스트레스, 졸업까지 지속하지 못했던 학교생활 등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학생이 안쓰럽고 애처롭다. 성취 욕구가 높고 똑똑했던 학생은 극심한 불안증세 때문에 정작 힘껏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 학업을 지속하지 못했고 남들과는 다른 대입을 치러야 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무거운 이슈들, 학생들의 아픔은 계속 이 책, 피로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한병철은 '관조'를 강조한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햐 한다고 한다. 그리고 부정적 힘으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이야기 한다. 

나는 오늘 그 학생에게 혼자가 아님을 일러주었다. 너보다 중요한 공부가 어디 있고 비교과 프로그램이 어디 있냐고도 했다. 다 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만 살살 해보라고 했다. 나의 학생이, 또 우리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도 발휘하기를 바란다. 그 어떤 성취보다 네가, 내가, 우리가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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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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