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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a Apr 13. 2024

83년 지어진 구축 23평에 삼둥이와 월세 들어간 사연

서울 내 집마련 겁나게 어렵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고 재테크를 하며, 내 집마련의 꿈을 실현하거나, 그 발판을 마련하는 30대. 그 30대를 우리 부부는 미국에서 대부분 보냈다. 학문의 큰 뜻을 품고 공부할 수 있어 깊이 감사했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음을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공부하며 삼둥이 키우느라 경황이 없었다는 핑계를 대 보지만 그저 혼자 삼키는 귓속말일 뿐이다.


2015년, made in US인 셋째를 임신한 채 배가 불러 귀국을 했고, 친정이 있는 대전에서 아파트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안방 문짝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도 '우리 집 아닌데 뭐, 괜찮아 곧 이사 갈 거니까.' 욕실 문에 발린 페인트가 떨어져 상아색 딱지가 바닥 여기저기 붙어도 '잠시 머무는 곳인데 어떤가' 하며 쿨하게 물티슈로 쓱쓱 훔쳐내곤 했다. 첫째의 초등 입학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보다 쾌적한 초품아 단지로 옮겼고, 곧 나의 이직으로 경기도로 이주를 하였으며, 다음은 집주인이 보증금을 1억 넘게 올려달라는 통에 그럴 바에야 서울로 가지(남편 직장 근처로) 싶었다. 이렇게 매번 이유가 생겼고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는 계속되었다.


조금씩 더 넓거나 안락한 집으로 이사를 해도 어딜 가나 뜨내기 같은 심정으로 살림살이를 다시 밀어 넣곤 했다. 애들이 각자 사용하는 5단짜리 큰 서랍장 3개 중 아들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랍이 하나 망가져 잘 닫히지 않았다. 오래 살 우리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으니 늘 조금 더 써야 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께도 "망가진 거 알고 있어요~ 하하, 더 써야 해서 가져갈게요!" 싱겁게 웃으며 말씀드리곤 했었다.


< 불빛으로 가득 찬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이 많은 집들 중 우리 집 한 칸이 없는가 싶었다 >


어디를 가도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이방인의 마음으로 가볍게 적응하려 했다. 여행자처럼 새로운 동네를 탐색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지만 언젠가는 또 떠난다는 마음의 준비를 늘 안고 살았다. 세숫대야의 차가운 물에 발가락만 살짝 담갔다 빼며 씻을까 말까 망설였던 일곱 살의 나처럼, 동네 엄마들과의 관계도 넓지 않고 깊지 않게, 적당히 유지했다.  


이사를 다니며 내가 어린이집, 유치원, 학원, 아이들이 갈 곳을 찾아내는 동안 남편은 둥지 없는 불안한 아빠 새가 되어 시작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주택 청약이었다. 길고 긴 도전과 기다림을 감내하는 자세, 낙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한 마음이 필요한 청약. 우리가 이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청약을 하게 될 줄 알았을까. 남편이 장교 월급을 모아 열심히 부었던 주택청약예이 살아 있었더라면. 20대 초반 첫 발령지에서 만들었던 나의 청약통장을 깨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학 생활을 하며 남편의 통장도, 나의 통장도 이미 공중분해되어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된 상황이었다. 애 셋을 데리고서야 청약통장 보유기간 가산점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남들은 다자녀 가족이니 청약에서 유리하겠다 했지만, 다자녀 특공은 세 자녀가 디폴트이다. 넷, 다섯이 되어야 경쟁력이 있음을 우리는 연이은 낙방에서 몸소 체험했다. 분당, 미사, 감일. 경기도 일대 새로운 분양 공고가 날 때마다 지원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매번 다자녀 특별공급과 일반공급도 함께 지원을 했지만 떨어지며 남편이 어느 날, "와, 애 셋인데 집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 했더랬다. 4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던 남편이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어깨에 짓눌려했던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러다 몇 년 전 서울로 이사를 했으니, 청약이고 뭐고 모든 것이 더 어려워졌다. 매매 집값은 저게 미쳤나 싶었고, 전셋값도 대출 없이는 맞추기가 어려웠다. 애들 셋이 이제 각자 자기 방은 고사하고, 침대도 같이 써야 했다. 풀지 못한 짐을 아쉬워하는 건 이미 사치였고, 거실의 큰 탁자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서로 궁둥이가 부딪치는 사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여유가 필요했다. 이사를 해도 늘 우리 집이 아니니 남들이 발품, 손품 팔며 신나게 한다는 인테리어는 늘 마음에만 품고 지냈다. '언젠가는 우리도 멋지게 해 보자. 욕실 타일도 직접 고르고, 모던한 등도 고르고 말이야. 천장에 팬을 달면 훨씬 시원하다던데 말이지' 하며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머리가 크며 사춘기가 다가오는 아들은 기다려주지 않고 힘들어 하기 시작했다. 같은 라인에 사는 친구네에 다녀오고, 친구들 생일잔치에 다녀오더니 우리 집이 다시 보였나 보다. 어느 날 저녁, 아들은 죄 없는 거실 바닥을 작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오열을 했다. "이 나무색 바닥 싫단 말이야. 너무 시커메. 우리도 하얀 집에 좀 살면 안 돼? 친구들 집은 다 하얗단 말이야! 우리는 왜 맨날 헌 집에 살아야 돼?" 웃을 수도, 같이 울 수도 없고. 어머나.


아들은 내 힘으로 당장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아 속사람이 강건한 아이로 자라게 해 달라 기도했다. 이럴 때는 아몰랑 하며 그분께 맡기는 수밖에.. 맡길 데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우리 부부는 각자 전공보다 부동산 공부에 더 열심이었던 듯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도움이 될만한 유튜버들의 강의, 부동산 전문가들의 소식지를 보며 청약은 어디를 할 것인지, 구축을 산다면 어떤 단지로 갈 것인지 공부하고, 임장도 했다. 세 아이를 데리고 이사를 다니느라 소진한 에너지를 아꼈다면 몇 편의 좋은 논문이 나왔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 시간이 아까웠다. 예민한 둘째, 아들이 더 크기 전에 전학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집에 안착하고 싶었다.




21년 집값은 남산 꼭대기를 찍더니, 22년에는 무중력의 짜릿함을 선사하는 놀이동산 기차처럼 갑자기 활강을 했다. 그러더니 집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줄다리기를 하듯, 밀당을 하는 사이 꿈틀꿈틀 다시 올라 무주택자를 몹시 헷갈리게 했다. 살던 곳의 전세 만기는 다가오고, 예정되어 있던 청약 공고는 하나씩 나오고 있었다. 이제 아파트 청약은 매력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양가는 겁 없이 올라 청약 단지도 선별해야 했다. 쏙쏙 나오는 여러 청약 공고에 남편이 할까 말까 의견을 물을 때 "하지 마, (분양가가) 주변 단지(시세)랑 비슷해" 하며 단호박이 되어 선을 그었다. 할 곳과 안 할 곳을 가려야 했다. 그리고 오래 기다렸던 단지에서 또 낙방.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전세 만기가 임박한 집에서는 나가야 하고, 비싼 청약에 도전할 준비를 해야 했다. 스트레스가 큰 상황이기에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는 남편은 23년 겨울이 오기 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청약에 도전하기 위해 잠시 월세에 살자는 것이었다. 당첨이 되면 바로 계약금과 중도금을 착착 내야 하니, 허름한 아파트의 월세에.


아.. 준신축에 살면서도 바닥 누렇다고 싫어하던 아들이 생각나 마음이 쓰렸다. 서울로 이사오며 집이 계속 좁아졌는데 이젠 오래되어 재건축을 하기로 한 아파트로 애 셋을 데리고 들어가려니 잠시 속상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합리적인 결정임을 인정했다. 비싼 전세로 돈이 또 묶이면 어떻게 청약을 기약하겠는가.


아이들이 전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반경 안에서 월세를 살 수 있는 아파트 단지가 다행히 하나 있었으니, 보증금 5000에 월세 100! 83년에 지어진 구축 23평에 잠시 우리의 보금자리를 트는 것이다. 청약 당첨이 언제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다소 답답했지만 우린 한 마음이 되어 집을 빠르게 고르고 겨울 방학 내내 이사 준비를 했다. 이사 준비란 작은 집에서 더 작은 집으로 가니 짐을 더 줄이는 작업이었다. 우선 아이들 책에 가장 욕심을 부리던 그 마음을 내려놓았다. 커다란 책장 세 개를 정리했다. 100권이 넘는 Why 시리즈도 다른 전집도 모두 당근에서 나누었다. 침대도, 탁자도 모두 나누다 보니 서울에서 팍팍한 경제활동을 시작한 젊은이들이 기쁘고 빠르게 가져가 정이 든 내 물건의 쓸모에 빛을 더해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사를 하기로 한 2월에 들어섰다. 남편은 짐을 더 줄이며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는 우리의 계획과 이유를 아이들에게 여러 번 설명했다. 아빠의 큰 뜻이 숨어 있는 것이라며. 이사가 임박했고, 우리는 기다리던 청약 공고 중 하나가 또 나와 계획대로 특공과 일반 공급에 연이어 신청을 했다. 나온 공고라 지원은 하지만 일반분양 물량이 너무 적어 당첨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늘 하던 대로 남편은 청약 신청을 하였고 일주일간 잊고 있었다. 발표가 나던 날 출근한 남편에게서 카톡이 왔다. 사진을 보내왔는데, 그 사진에는 매우 낯선 글자가 박혀 있었다. "당첨" 당첨? 예비도 아니고 당첨? 바로 전화를 걸어 남편에게, "이게 뭐야? 당첨이라고? 엥? 진짜?" 남편도 믿기지 않아, "응 그러네. 나도 몇 번을 봤어. 이게 맞나." 세상에 마상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아파트 청약에서 당첨이 된 것이다. 서른 번은 넘게 떨어졌을 5인 가족인 우리가, 서울 아파트 청약에 당첨이 된 것이다. 그나마 물량이 많은 21평을 선택했고, 평면도 상 가장 인기가 없을 못난이 타입으로 청약을 넣었더랬다. 그게 신의 한 수였을까. 그래도 그렇지 정말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었는데! 단풍 아파트 청약에 당첨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늘 조급해하던 남편을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다독이던 나였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기뻤다. 이제 정말 남편과 내 이름으로 된 우리 집이 생기다니. 83년 그 옛날 지어진 구축에 살면 어떠하리, 23평이면 어떠하리. 당첨된 집은 더 작아 21평이니 미리 연습하면 되겠구나. 21평에 들어갈 생각을 하면 뭘 더 줄여야 하나 고민스럽지만 진정한 미니멀 라이프를 살아보자는 의욕이 솟구친다. 이사한 단지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가 왠지 정겹다. 아이들이 좋아했던 신비 아파트와 닮아서 정을 붙여 보는 요즘이다. 한 동네에 살았지만 몰랐던 이 오래된 아파트의 장점을 보물찾기 하듯 발견하는 중이다. 더블 역세권이라 위치가 기가 막히고, 외부인들이 구경 오는 벚(꽃)세권이기도 하다. 오래된 만큼 아름드리 벚꽃나무들이 치장을 잔뜩 한 경극배우처럼 화려한 꽃가지를 늘어 뜨리고 있다. 나뭇가지는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왈츠를 추듯 너울거리고, 눈송이보다 더 예쁜 꽃송이를 하늘에 꽃길을 그리듯 날린다. 그저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어마어마한 빚잔치의 시작일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일단 처음으로 생긴 우리 집에 들어가 살아 보려 한다. 5인 가족이 21평에서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또 어떤 묘기를 부려야 하나 고민 중이다. 21평이지만 방 세 개와 욕실 두 개를 보유한 기이한 아파트에서 5인 가족의 적응기를 또 글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 후들후들한 중도금 납부, 잔금 대출까지 모든 과정이 무사히 지나가고, 25년에는 벚꽃 대신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며 가을을 맞이할 수 있기를.  



< 우린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이들과 편히 머무를 내 집 한 칸이면 되었다 >





사진 출처: Unsplash,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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