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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AL 04] 무대 위 뱀파이어

뮤지컬 <배니싱>, 그리고 <카르밀라>

by 현일

*앞선 글들에서 다뤘던 것처럼 극예술은 관객의 경험, 가치관, 중시하는 요소에 따라 해석을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으며, 한 역할에 여러 배우가 캐스팅되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실제로 무대에서 본 것이 배우, 회차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글의 해석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이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본인이 느낀 바가 옳다는 전제에서 참고만 해 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본 글에서 다룬 작품들은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 표현 방식, 상세한 대사나 행동도 상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선정해 다루는 공연들은 그 성공 여부, 완성도와는 별개로 해당 글의 주제와 긴밀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경험과 해석이 매번 바뀔 수 있는 공연예술의 특성상,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지점이 분명히 있다면 논의의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람 후 시간이 많이 경과된 작품이 포함되어 있어,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서양 역사의 긴 전통을 통틀어 극예술은 그것이 발생시킬 수 있는 윤리적 문제에 따른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과잉된 감정과 비극적 정서로 가득한 극예술은 이를 지켜보는 관객이 부정적인 성정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정적인 평가를 넘어 극예술의 독특한 효과에 대한 인상 또한 이런 윤리적 우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극장은 흔히 강한 공감을 발생시킬 수 있는 장소로 여겨지며, 이는 결국 자신에게 존재하는지 몰랐던 성격 혹은 감정을 배우 및 가상적인 상황에 대한 이입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극예술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공감 가능하도록 설계된 인물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공포와 연민, 그리고 정화를 가리키는 고전적인 ‘카타르시스’부터, 재현적 양식을 넘어 집단적 공동 현존 및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퍼포먼스 예술에 이르기까지, 극예술의 경험은 다른 존재와의 긴밀한 소통으로부터 발생하는 변화와 관련되어 왔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 배우의 육체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특징지워지는 공연예술은 타자와의 강력한 소통 가능성을 증명하는 활동으로서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막스 헤르만은 관객이 “배우의 연기를 다시 한 번 희미하게나마 모사해봄으로써, 표정을 지각할 뿐 아니라 몸의 느낌을 수용함으로써, 같은 동작을 하고 싶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싶은 비밀스러운 욕구 속에서” ‘창조적’ 행위성을 창출한다고 보았다. 즉, 연극의 경험에서 결정적인 것은 참여자들이 한 시간과 장소를 공유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참여자들 간의 긴밀한 소통과 동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참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 및 경험은 ‘전염’이라는 은유를 통해 그려져 왔다.

그런데 연극의 효과를 ‘전염’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병원균으로 대표되는 낯선 타자의 침투로 인한, 긍정적이라고만 할 수 없는 변화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이는 극예술이 인간 주체의 정의와 관련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도록 한다. 인간, 주체의 정의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기보다는 그 반대되는 것 (비인간, 대상)의 규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와 유사하게, 질병의 진단 또한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닌 문화, 계층, 사회적 선입관에 따라 신체를 제도화하는 대표적인 기제로서 정상적 신체와 비정상적 신체를 구분하는 기준과 체계를 갖는다. 질병의 진단은 객관적일 수 없으며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증상들을 유사성에 따라 분류하고 이를 특정한 질병으로 명명함에 따라 이루어진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질병으로 인한 현상과 이로 인한 신체적 변화가 아무리 낯선 것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신체에서 이루어지며 병에 의해 변화한 신체가 자신임은 결코 완전히 부정될 수 없기에, 병원균과 자신, 그리고 병든 신체와 건강한 신체의 관계는 고정된 주체성을 위협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따라서 특정한 신체적 증상들을 명명하고 이를 신체와 구분되는 병원균의 유입으로서 과학적으로 설명 및 분리해 내려는 경향과는 별개로, 질병의 문화적 상징들은 완전히 설명되거나 개인 및 사회와 분리할 수 없는 낯선 현상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이는 극예술의 사회적 의의를 가리킬 수 있는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질병의 규정과 이를 통한 배제의 욕망은 질병으로 인해 신체 및 존재를 새롭게 재발견하는 반성적 가능성과 뒤섞여 왔다. 대표적으로 질병의 발생은 병원균의 침투뿐 아니라 비윤리적 행위나 성적 품행, 혹은 종교 및 미신과의 관계를 가져 왔으며, 숨겨져 있던, 혹은 억압되어 잊혀졌던 내면의 드러남이라는 가능성으로서 내재된 타자성을 상기시키는 요소로 문화적 의의를 갖게 된다. 그리고 질병에 대한 사회적 제도 및 관리는 규범화된 인간성을 형성하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영역을 방출하는 사회적 억압의 상징성을 갖게 된다. 질병에 대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일반화된 현대에도 병증 및 환자가 발생시키는 비합리적인 불안감 및 적대심은 쉽게 발견될 수 있다. COVID-19이 오랜 기간 영향력을 발휘하는 동안 우리는 질병이 어떻게 그 신체적 위협 이상으로 집단적 공포심을 자극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질병의 피해자가 적으로 규정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올바르지 않은 품행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제도적 억압의 근거가 되는지 지켜본 바 있다.

이런 질병의 모티브는 고대에서부터 다양한 문학적, 예술적 담론으로 발견되어 왔지만, 특히 세기말 이후 서구의 이성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짐에 따라 문화 전반에서 이질적인 것 혹은 타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되면서, 다양한 문학적 표현을 통해 꾸준한 관심을 끌게 된다. 비록 그 맥락은 달라졌으나 이런 관심으로부터 발전된 문학적 상징들은 여전히 큰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곧 ‘뱀파이어’, 보다 광범위하게 ‘흡혈귀’이다. 이처럼 극예술이 질병과 가져 오는 본질적인 동질성, 그리고 질병이 갖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고려할 때, 현재 국내에서 흡혈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굉장히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극 매체 자체에 집중해 온 앞선 논의와는 조금 달라진 방향성이긴 하지만, 본 글에서는 ‘흡혈귀’라는 소재가 문학적으로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다양한 의미를 구현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어떨까 한다.



1. 흡혈귀와 타자화된 주체: 뮤지컬 <배니싱>


사실 흡혈귀의 외양이나 식성, 본성을 포함하는 특성들은 생각보다 일관되지 않으며, 그것이 문학적으로 구현된 시기나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인문학적 주제들을 그려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는데, 이는 흡혈귀가 중간자로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양가성을 가지고, 그 존재로 인해 산 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며, 흡혈귀로서의 특성은 전염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모호하고 비현실적인 성격을 갖는 ‘유령’과 달리 흡혈귀는 죽은 자의 신체를 가지며 피를 통한 전파라는 질병의 개념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살아 있는 존재처럼 행동한다는 점과 상충한다. 다시 말해, 흡혈귀는 살아 있는 인간의 특성이 부여된 시체라는 점에서 그 모순적인 존재 자체로부터 혼란을 발생시키며, 개별적인 인간에게서 같은 특성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에 내재한 타자성을 구현한다. 이런 흡혈귀는 모호한 정체성을 가지며 이로부터 균열과 혼란을 야기하는 광범위한 타자의 형상을 구현하게 되었다. 특히 민간 전통에서는 단순한 괴물에 가까웠던 흡혈귀가 적대적인 타자의 형상이 된 것은 기독교에 의한 악마화의 영향이 컸는데, 이에 따라 흡혈귀는 제도, 특히 아버지로 대표되는 관습적인 제도에 충돌하는 존재로서 타자의 규정 및 배척에 대한 사회적 의미 또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흡혈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모호한 상태를 통해 죽음을 배척하는 일상적인 체계에 반하는 존재를 구현할 뿐 아니라, 피를 통한 전염으로서 자신과 타자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를 상징한다. 흡혈귀가 되는 과정은 흔히 피의 교환으로서 그려지며, 이에 따라 뱀파이어의 피와 자신의 피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새로운 본능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타자를 규정할 수 없음은 자신의 정의 또한 어렵게 하기 때문에, 이는 주체성에 대한 위협을 발생시킨다. 정체성의 역사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는 회피전략으로 타자를 문화적 무의식의 영역으로 내쫓고 억압했는데, 흡혈귀는 이러한 문화적 무의식을 구현하는 환상적 형상으로서 재생산되었다. 다시 말해, 흡혈귀는 문화적으로 주변화되고 억압된 존재 (그것이 사회적 계층이나 세력을 가리키든, 혹은 주체 자체에 내재한 가상적 가능성을 가리키든)의 복귀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소재로 발전되었다.

2017년 초연된 창작 뮤지컬 <배니싱>은 흡혈귀로의 변환을 그려냄으로써 이런 소재를 폭력적 문명에 대한 고발 및 타자와의 진정한 이해의 개념과 관련해 풀어낸다. 이 작품에서 흡혈귀는 그 다름, 설명할 수 없음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배척된 요소를 상징하는 동시에 문명이 이성적인 껍데기 하에 숨기고자 하는 폭력성을 폭로하는 효과를 가지며, 인물들은 사회적 구조로부터 방출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 및 자신이 속해있던 질서의 편협함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극중 갈등의 중심이 되는, 이 타자화된 정체성에 대한 저항은 타자의 규정을 통해 견고해지는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인 동시에 주체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타자의 규정이 실은 불가능할 수 있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 이 공연은 주인공 본인이 대상화 혹은 배척하던 흡혈귀가 됨에 따라 겪게 되는 고통 및 역지사지의 상황을 따라 흘러가고 ‘누군가의 피부 밑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끝남으로써 견고한 주체성을 버림에 따라 가능한 새로운 현실 인식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배니싱>은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부모를 콜레라로 잃고 같은 비극이 무지로 인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학에 헌신한 김의신, 그리고 가까운 동료 윤명렬은 몰래 시신을 해부하려 찾은 폐가에서 햇빛에 닿으면 화상을 입는 미스터리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의신은 그의 특수한 증상들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이를 연구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에게 ‘K’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하지만 연구가 계속되고 K가 의신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와중에 주변에서는 실종사건이 반복되며, 실종된 사람들은 몸에서 피가 빨려 나간 시신으로 발견된다. 결국 의신은 K가 흡혈을 통해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고 그를 돌려 보내려다, 이에 좌절한 K에게 물려 같은 존재로 변화한다. 자신의 상태를 거부하며 원래의 존재로 돌아가려 연구를 계속하던 중 의신은 자신을 배신하고 친일 우생학 연구에 가담한 명렬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이 연구를 통해 성공하려는 욕구에 사로잡힌 명렬은 의신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연구를 하고 있었음을 아는 순간 본색을 드러내며,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K는 사망하게 된다. 의신이 개발한 백신은 내성 반응으로 인해 그에게 통하지는 않았지만, K에는 효과적으로 작용해 그를 다시 인간으로 돌려 놓았던 것이다. 결국 홀로 남은 의신은 햇빛 아래를 누군가와 걷고 싶다는 K의 소망에 따라 스스로 햇빛 속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흡혈귀라는 존재가 갖는 문화적 의미에 대해 고찰한 바와 같이, K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로 등장하며, 이에 부합하게 극중에는 이를 칭하는 명칭으로 ‘살아 있는 시체’, ‘비과학적 사실’ 등이 사용된다. 특히 K에게 물린 이후 변하기 시작하는 의신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묘사하는 넘버인 “병원의 소문”은 이런 변화가 사람들에게 광기로 치부된다는 점에서 이 극에서 등장시키는 흡혈귀가 영생이나 초인적 힘과 같은 초월성보다는 비참함이나 소외로 특징지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흡혈귀들이 흔히 갖는 마법적인 능력도 극중 암시될 뿐 본격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이런 흡혈귀의 소외는 그가 갖는 모순된 존재 양식으로 인한 이질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햇빛을 받을 수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 시간에는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사실상 죽어 있는 신체를 움직이고 회복하기 위해 피를 필요로 하는 흡혈귀는 인간적인 외양 및 행동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생활 양식의 완전한 전복을 가리킨다. 따라서 의신은 K의 증상을 질병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는 이를 연구의 대상이자 치료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그를 귀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규정하지만, K의 흡혈 욕구를 안 후에는 그를 감당할 수 없는 존재로 거부한다. 특히 의신은 그들의 상태를 질병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지에 대한 K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외곽에서만 이루어지는 삶을 비관함으로써, 타자화된 존재로서 흡혈귀의 상징성을 거듭 보여준다. 이들의 주요 대립자가 친일 연구에 가담하는 명렬이며, 그가 이런 자신의 선택을 밝히고 제국을 거론할 때 의신이 강한 흡혈 욕구를 느끼는 것은 관습적 권위와 대비되는 흡혈귀의 존재를 이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후 명렬은 흡혈귀가 된 의신을 ‘더러운 피’라 칭하며 그의 우열론을 이어가며, 열등함의 규정이 지배층의 논리에 따른 배제로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의신은 K에 의해 그 또한 흡혈귀가 됨에 따라 그는 이전의 자신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타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며, 이로 인한 격렬한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그가 겪는 변화는 K와의 피의 교환, 그리고 단지 피가 아닌 ‘나를 마신다’는 타자의 존재 유입으로 그려지며, 이에 따른 타자로서 자기 발견은 의식 여하에 따라 거의 별도의 자아를 오가는 듯한 극단적인 격차로서 보여진다. 시간이 지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를 갖게 된 이후에도 의신은 새로운 감각과 욕망을 계속 거부하며, 자신이 인간을 해쳤다는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며 흡혈귀로서의 정체성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한편, 인물들의 갈등과 타자로서의 전락에도 불구하고 이 극에서 흡혈귀라는 존재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과 직결되는 이해의 부재에 대립해 제도적 억압에의 대항으로서 비판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의신은 발전한 서양 의학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과거의 미신 혹은 한의학과 분리시키며, 케이의 증상을 질병이자 고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그의 오만으로 드러난다. 특히 이런 주제의식은 의신이 스스로에 대한 반복된 실험으로 인해 생긴 내성 때문에 개발한 백신이 무용지물이 되는 전개로 강조된다. 이런 비극은 결국 의신이 다름아닌 자신에 의해 파멸했음을 강조한다. 그가 비로소 K를 이해하고 마지막에 함께 햇빛 속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할 때 그 결말을 보지 못하고 K가 사망하는 것 또한 인간적인 무력함을 강조한다. 이는 타자성을 정의 가능한 형태로 명명하고 대상화하려는 인간중심적, 문명의 활동이 갖는 한계를 구현한다. 자신이 자초한 결과 앞에서 이를 깨달았을 때 의신은 타자화하려던 상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사회로부터의 방출은 인물들을 괴로움 속으로 밀어넣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와의 거리를 통해 그 문명의 속성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밤의 한켠에서”라는 넘버에서 K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범죄라는 의신의 항변에 대해 그것을 누가 정하는 것인지 되물으며,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갈등 속에 죽어간 사람들, 혹은 강자의 논리에 따라 희생된 사람들에 비하면 매우 적다고 설명한다. 의신에게 경고하며 귀신보다 위험한 것은 사람이라 말하는 명렬, 우생학을 연구하며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를 나누는 명렬 뒤로 퍼지는 군홧발 소리, 일제강점기 및 전쟁이라는 배경은 이런 K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다시 말해,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 의신은 합리적인 인간 문명 혹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따른 이상적인 진보에 대해 되물을 수 있게 된다. 이후 의신을 압박하며 명렬은 그들이 의학 연구를 위해 파헤친 시체들을 거론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하는데, 이는 진보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는 행위들이 누군가에겐 폭력적인 것이 될 수 있음에 대해 관객 자신도 생각해 볼 지점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과학으로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귀신을 믿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단언하던 의신이 (자조적이긴 하지만) 자신을 귀신이라 칭하기까지의 변화에 따라, 그는 일상적인 인식능력을 벗어나는 세계에 대한 확장된 경험이 가능해진다. 특히 K가 의신에게 그가 새로 얻은 감각들을 가르쳐 주는 장면에서 그는 하늘을 보고 원래 별이 이렇게 많았는지 묻는데, 이에 K는 보이지 않았을 뿐 그것들이 원래 있었던 것이라 답한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배니싱>은 가시화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세계가 존재함을 통해 인간중심적인 시각 및 존재가 갖는 한계를 제기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를 “인간이 아닌 수많은 생명이 숨쉬는 밤”이라 칭하며 이들에게만 보이는 “뒤틀린 세상”이 존재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에 부합하듯, 무대는 인위적 정돈이나 진보에 반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큰 무대 전환 없이 진행되는 공연에서, 깨진 유리창, 퇴락한 폐가의 모습은 모든 장면에 존재한다. 천장에 걸린 등에는 마치 문명이 쇠락한 세계의 풍경처럼 풀뿌리가 자라나 있다. 또한 깨진 유리창은 익숙한 현실을 뚫고 그 안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존재를 상기시킨다. K는 유리창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여기서 의신은 처음으로 직접 인간의 피를 탐하며, 명렬은 가까웠던 형을 처음으로 배신한다. 실제로 공연은 커튼콜 후 의신 역의 배우가 유리창을 건너 관객을 응시하고, 모습을 감추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극의 전체적인 흐름은 낯선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주체를 상실하고 타자화되는 과정, 그리고 이에 따라 겪게 되는 인식의 변화를 겹겹이 쌓아 전개시키고 있다. 특히 이는 극 전체가 폐가에 외부인이 찾아온다는 수미상관형의 구조 속에서, 의신과 K의 관계 및 사건들이 명렬과 의신의 관계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극은 명렬이 의신의 연구 자료를 찾기 위해 폐가로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되며, 과거로 돌아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다가 의신에 의해 흡혈귀가 된 명렬이 다시 폐가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흐름은 극중 악역에 해당되는 명렬의 추락을 보여줄 뿐 아니라, 낯선 존재를 대면했을 때 발생하는 주체성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거리를 발생시킨다. 극중 주요 사건이 의신이 K를 연구 및 치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에서 시작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던 중 K를 떠나는 것에서 절정을 맞고,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다른 존재와의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을 찾는 것으로 전개된다면, 의신이 흡혈귀가 됨에 따라 이런 관계는 그와 명렬의 관계에서 반복된다. 명렬이 연구 대상 혹은 수단으로서 의신을 찾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신은 K가 그랬듯 살아 있는 존재로부터 온기를 느끼며, 그의 믿음을 배신당함으로써 본인이 K에게 미친 변화를 다른 맥락에서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의신에게 물려 흡혈귀가 된 명렬은 의신의 기록으로부터 이해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이런 구조를 통해 타자와의 대면, 주체성의 변동, 그리고 타자의 이해와 같은 주제들은 특정 인물의 특수한 상황을 넘어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특히 K와 의신이 햇빛 속으로 들어갈 때, 강렬한 조명은 관객을 향하며 인물들의 경험을 관객과 직접적으로 공유한다. 따라서 누군가와 같은 상태를 공유함으로써 가능한 이해의 경험을 관객 또한 부분적으로 함께하게 된다.

이처럼 뮤지컬 <배니싱>은 ‘흡혈귀’라는 소재가 대변하는 불가해한 존재상태 및 일상적 질서의 전복, 그리고 질병 및 전염과의 관계를 주체성의 변화로서의 ‘이해’라는 주제 하에서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배니싱’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 공연에서 말하고 있는 ‘배니싱’, 즉 사라짐이란 주체의 타자화에 따른 자기상실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K는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원하며 이런 소망은 사라짐이라는 영생의 종료와 맞물린다. 그는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가 가진 사라짐의 소망이 그를 다른 존재라 규정하는 조롱과 대비됨을 보여준다. 즉 K의 소외 상태는 그를 누군가와 관계맺고 섞일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라질 수 없게 했으며, 관계의 형성은 주체의 경계를 변화시켜 그를 이런 소외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사라짐이라는 결말로 비로소 이어진다. 의신은 이전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저항하지만 이를 제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라지고 있는데, K를 진정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짐에 따라 스스로 사라짐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명렬의 인정 욕구 및 사회적 타자와 자신을 분리시키려는 우열론의 주장은 타자화로서 사라짐에 대한 저항이라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그가 과거의 의신과 갖는 유사성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뮤지컬 <배니싱>에서 흡혈귀란 소재는 이를 배제시키는 억압적 제도와 그 제도를 해체시키는 포용 사이에서 움직이며 주체성의 역동적인 위기 상태를 구현하고 있다.



2. 여성으로서의 흡혈귀: 뮤지컬 <카르밀라>


한편, 창작물에서 흡혈귀가 비정상적 상태 혹은 타자로의 배제라는 사회적 작용을 폭로한다는 점은 이런 서사를 여성의 존재와 긴밀히 연결시켜 왔다. 뱀파이어 문학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은 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규정에 부합하지 않거나 건전하지 않은 성적 욕망을 품을 때 괴물로 재탄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경향의 발생은 흡혈귀가 대변하는 사회문화적 장치와 관련되어 있다. 밀리 윌리엄슨은 “뱀파이어는 탐욕스럽게 섹슈얼한 여성, 과잉 성욕을 가진 아프리카인, 몽환적인 유대인 침략자, 여성적이거나 동성애적인 남성이다. 서구의 뱀파이어들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발생시켜, 가부장제, 인종적 우열론, 가족적 가치, 그리고 순결한 이성애적 성향을 재주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설명함으로써 흡혈귀를 타자화된 존재들, 더 나아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적대감을 발생시키려 만들어진 소재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뱀파이어를 공포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대변하는 사회적 타자, 즉 이상적인 사회적 규범에 해당되지 않는 세력들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여성 자체가 사회적 타자의 대표적인 유형으로서 흡혈귀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발전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인식을 반영하듯, 문학에서는 19세기 초반까지는 남성 흡혈귀가 대세였으나 19세기 중후반, 낭만주의 이후 여성 흡혈귀로 초점이 이동되었다. 여성성과 흡혈귀는 둘 다 합리적인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계몽주의적 질서의 타자로 간주되어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낭만주의는 이러한 여성성을 단지 배제의 대상으로 그려낼 뿐 아니라 당대의 문화와 사회의 억압적 조직에 대비시킬 수 있는 비판적 구상으로 발견해내기 시작했다. 이는 현대의 문학 작품들로 이어졌는데, 대표적으로 엘프리데 옐리넥은 희곡 <질병 혹은 현대 여성들>에서 흡혈귀 모티브를 “남성 지배의 문화 속에서 여성적인 것과 여성 예술가의 불완전한 실존에 대한 은유”로 사용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 여성 흡혈귀는 서구 문화사의 다양한 타자성의 특징들을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아이를 낳는 기계로 취급되는 가정주부 카밀라는 여섯 번째 아이를 낳다 죽은 뒤 흡혈귀 에밀리에 의해 흡혈귀로 다시 태어난다. 두 여성은 레즈비언 흡혈귀가 되어 각자의 남편을 상대로 싸우고 여성으로서의 실존에 대해 토로하며 아이들을 먹이로 연명하다가 결국 흡혈귀 사냥꾼이 된 두 남편에 의해 사살되고 만다. 이를 통해 옐리넥은 다음에 대해 말한다. “여성은 타자이고 남성은 규범이다. 남성에게는 현재의 위치가 있고 그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면서 기능을 한다. 여성에게는 장소가 없다.” 이를 인지함으로써 여성은 체제에 반하는 괴물로서 자신을 재발견하며, 도덕과 질서를 방해하고 어지럽히는 존재로서 남성사회에 반격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흡혈귀로 그려지는 여성은 그를 소외시키는 사회적 제도에 따라 타자, 괴물, 위험한 존재로 규정되는 한편 이를 통해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폭로시키거나 이에 복수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갖는다. 2024년 초연된 뮤지컬 <카르밀라>는 최초의 여성 흡혈귀를 등장시키는 조지프 셰리든 르 퍼뉴의 동명의 고딕 소설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며 원작과 비교해 여성 인물들의 관계와 갈등, 사랑을 증폭해 각색한 만큼 흡혈귀와 여성성의 관계를 논할 수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 극은 소외된 인물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유사한 처지의 타인들과 연대함으로써 소외 상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흡혈귀로서 여성에 대한 보다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동성애 소재를 등장시킴으로써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로도 확장될 수 있다.


극은 카르밀라와 로라가 10년 만에 재회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외딴 집에서 혼자 외롭게 살아온 로라는 마차 사고로 인해 찾아온 자매 카르밀라와 닉을 만나게 되며, 선의를 베풀어 이들이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카르밀라와 로라는 점점 가까워지지만, 같은 시기에 근방에서 흡혈귀의 행보로 추정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한 긴장감이 발생한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카르밀라와 닉은 뱀파이어이며, 카르밀라와 로라의 재회 또한 불멸의 삶에 지친 카르밀라가 살아갈 욕망을 회복할 계기를 만들기 위한 닉의 계획이었음이 밝혀진다. 의도적으로 카르밀라와 로라를 만나게 했으면서도 점점 발전되는 이들의 관계에 질투심을 느끼는 닉의 모순적인 감정에 따라 로라는 위험에 처하게 되고, 카르밀라는 자신을 희생할 것을 감수해 로라를 구하려 한다. 결국 사제인 슈필스도르프에 의해 닉은 사망하며, 로라는 카르밀라의 피를 마시고 함께 영원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런 줄거리는 흡혈귀 카르밀라를 로라를 포함한 주변 인간들에게 죽음과 질병을 야기하며 오랜 세월 존재해 온 낯설고 위험한 존재로서 등장시키고 결국 그가 인간에 의해 정복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원작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궁극적으로, 뮤지컬 <카르밀라>는 그 모든 장애물과 차이를 극복하는 순수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극중 인물들을 보면 흡혈귀의 괴물로서의 특성이 거의 그려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라에 대한 흡혈욕구를 철저히 통제하는 카르밀라는 물론이고, 왜곡된 사랑의 욕망을 갖고 있는 닉도 잔인한 본성보다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중심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극중 등장하는 흡혈귀들은 인간적인 존재로서 그려진다. 흡혈귀를 인간과 구분하는 다양한 생활 양식들 및 약점들 (햇빛이나 십자가, 마늘 등에 대한 취약성 등)도 오히려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며, 카르밀라와 닉은 외형상 인간들 틈에 섞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카르밀라는 흡혈이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이며, 이는 그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음을 주장하며 자신을 변론하기도 한다.

흡혈귀가 특히 여성의 존재와 관련해 가져 온 소외의 주제도 로라와 카르밀라가 처해 있는 동질적인 상태로부터 표현된다는 점에서, 제도적 억압 구현 및 그것의 전복 가능성을 포괄하는 폭력성보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의 시각을 통해 그려진다. 로라는 흡혈귀에게 아버지를 잃은 후 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을 피해 외딴 집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리고 그의 사촌이자 견습사제인 슈필스도르프는 로라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뱀파이어와 대적하며 보호라는 명목 하에 로라를 더욱 격리시킨다. 한편, 닉은 사랑이라는 이유로 카르밀라를 속박하며, 그가 카르밀라를 흡혈귀로 만든 주체라는 점은 그에게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해 카르밀라가 그에게 저항하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로라와 카르밀라는 비록 그 양상은 다르지만 관습적이거나 가부장적인 제도를 연상시키는 권위 하에 속박되어 있으며, 이로 인한 소외 상태에 있다. 하지만 외딴 집에서 살아가는 와중에도 로라는 어릴 적 카르밀라의 성에서 가져온 지도를 보며 바깥세상을 상상하고, 더 큰 세계로 떠날 결심을 한다. 따라서 로라와 카르밀라는 그들을 속박하는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중심으로 하며, 이는 극중 그들의 주요 동기가 되어 카르밀라와 로라가 함께 밝은 빛 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결말로 이어진다. 특히 카르밀라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로라를 지키려 하는 것, 그리고 로라가 자신의 과거 비극을 넘어 흡혈귀로서의 영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어떤 편견도 없는 순수한 사랑을 이들을 속박하는 현실과 대비시킨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해방의 희망을 상기시키는 카르밀라와 로라의 관계는 폭력적인 집착으로 이어지는 카르밀라와 닉의 관계와 대비된다.


이 극에서 보여지는 편견 없는 관계의 가능성은 견고한 주체성에 대비되는 타자의 경험으로서 흡혈귀가 가져 온 의미를 연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극이 인물들의 순수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이런 소재가 가질 수 있는 비판성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문학적으로 여성이 흡혈귀로서 악마화되는 것은 그들을 존재 자체로 제도에 반하는 것으로서 소외시킨 남성 중심적 사회를 폭로시키는 의미를 가져 왔으며, 흡혈귀에 의한 공격은 갈 곳 없는 욕망이 어떻게 방출되는지에 대한 경고로서 작용한다. 하지만 이 극에서 로라와 카르밀라의 순결함은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고결함 외의 공격적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갈등의 원인이 되는 닉을 제거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슈필스도르프이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흡혈귀가 가질 수 있는 타자로서의 위험한 이미지는 주로 닉에 의해 표현되는데, 문제는 카르밀라를 속박하고 분명한 위계적 권위를 발휘하는 그의 모습이 가부장적, 관습적 권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극에서 흡혈귀가 된다는 것은 소외된 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 및 이를 전복시키는 위험성을 시각화하는 대신, 오히려 그 억압의 기제로서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카르밀라의 항변은 그 비판성을 잃게 되며, 로라가 스스로 영생을 받아들여 카르밀라와 함께하기로 결정하는 결말조차 억압적인 기제에의 수용처럼 보여질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피해자들의 연대가 오히려 그들을 소외시킨 폭력적인 구조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그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껄끄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극에서 사용되는 흡혈귀의 이미지가 제도화된 권력의 이미지와 구분되지 않음과 더불어, 마치 멸균된 상태에서 성장한 양 과장될 정도로 순수한 성격을 갖는 로라의 존재도 문제가 된다. 로라와 카르밀라의 순수한 사랑과 폭력적인 닉의 욕망을 대비시키는 갈등 구조는 여성 흡혈귀에 대한 구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흔한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 여성 흡혈귀의 문학적 이용은 여성 자체가 죽음과 타자의 장소 혹은 이질적이고 자연적인 것의 장소에 고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비판되곤 하는데, 이런 경향의 결과가 순수한 여성 희생자와 잔인한 팜므파탈, 즉 요녀의 이미지로서 여성 흡혈귀를 대비시키는 것이다. 이런 여성상은 남성에 의해 생산된 여성성의 표상들,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욕망과 불안이 투사된 결과에 불과하기에 여성을 객체화시키는 경향을 낳는다. <카르밀라>의 인물들은 이런 이분법에 부합되며, 사랑으로서 타자화되길 선택하는 인물들의 선택은 그 자체로는 강렬하고 진실될지라도 기존의 관습적인 질서에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만 같다.

따라서 뮤지컬 <카르밀라>에서 인물들의 순수함과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흡혈귀로서의 낯섦, 위험성을 그려내지 않는 것은 이 소재가 상징적으로 가져 온 사회 전복적 가능성을 지워 이를 관습적인 로맨스물 내로 편입시킨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이 극에서 흡혈귀는 제도적으로 타자화된 여성, 그리고 내재된 타자성의 방출을 통한 제도의 전복 가능성을 구현하는 대신 가부장적 질서 및 그 질서에 부합하는 여성상을 오가기에 그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으며, 이 극에서 흡혈귀가 된다는 것은 이해 혹은 연대의 증거가 될 수는 있어도 이로 인한 주체성의 질문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로 인해 로라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카르밀라의 내적 갈등은 사랑을 통해 통제되고 극복됨으로써, 주체의 견고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 극에서 타자, 여성으로서 흡혈귀는 불운하고 순수한 피해자이며, 괴물은 될 수 없다. 여성이자 성소수자로서의 등장 인물들이 중심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비판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볼 수 있는 극이 마찬가지로 비판성을 가질 수 있는 소재의 이용 방식에서 관습적인 질서에 자발적으로 부합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물론 원작의 모티브만 차용해서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질병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현상과 이미지를 같이하는 흡혈귀는 문학적으로 타자의 방출 욕망 그리고 그것의 불가능함으로 인한 주체성의 위협을 상징하는 소재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럼에 따라 이는 억압적인 사회 제도를 폭로하고 그 제도에 복수하는 것과 같은 괴물적인 욕망의 방출을 그려내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흡혈귀는 고통과 해방, 추방과 진실의 양가성을 가져 왔으며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고착화된 이분법을 넘어서는 인식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도 등장한다. 이런 작품들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방출된 요소들은 공포심을 야기하는 괴물인 동시에 인간적이고 생동감 있다는 모순적인 존재 상태를 가지며 사회적인 불안 혹은 내면의 복합적인 존재 상태를 불러내 반성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흡혈귀는 다양한 형식이나 매체 속에서 등장하는 소재이지만, 굳이 공연을 통해 분석해 보고 싶었던 이유가 있기는 하다. 정적인 기의작용을, 그리고 일상적인 이분법을 벗어나는 흡혈귀의 존재가 무대 위에 다양한 이야기를 갖고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질병과 연극의 동질성과 관련해서도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극예술은 무대 위의 사물이나 신체가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연기하는 배우의 존재로서 대표된다. 이런 이중성은 살아 움직이는 시체로서 역겨움과 동질성을 동시에 자극하며, 피의 혼합으로 대표되는 주체의 유동성을 갖는 흡혈귀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니싱>에서 말하는 ‘이해’가 다른 존재의 안으로 들어가 그 존재를 공유하는 것처럼, 배우는 가상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인물 혹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질적인 존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인다. 또한 관객은 기꺼이 이런 허구적 기호작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인식을 왜곡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흡혈귀를 다루는 수많은 극들을 보면서, 종종 극예술은 그 자체로 흡혈귀인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극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특정한 환상의 창출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감염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



*타자성의 측면에서 괴물의 모티브에 관심이 있다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abject’ 개념, 그리고 바바라 크리드의 monstrous-feminine에 대해 알아본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살아 있는 시체로서 흡혈귀의 모순적인 존재 상태를 갖는 유사한 소재로 ‘좀비’가 거론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국내 애니메이션 <서울역> (연상호 감독 작, 영화 <부산행>의 프리퀄로 알려져 있다)에서 사회적 약자인 노숙자들 사이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고, 착취당하던 여성이 좀비가 되어 착취자에게 복수하는 양상 등은 좀비나 흡혈귀가 갖는 사회적 부조리의 폭로 및 비판 가능성을 구현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하나,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공포소설, 구체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여류 작가로서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내는 뮤지컬 <메리 셸리> 또한 흡혈귀의 문학적 모티브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1) 뮤지컬 <배니싱> 포스터 및 무대사진: 뮤지컬 배니싱 공식 X 계정 (@vanishing_neo)

2) 뮤지컬 <카르밀라> 포스터 및 공연사진: 네버엔딩플레이 공식 X 계정 (@nep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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